에티오피아에서 돌아온 후 일을 하다가 미얀마 행 비행기를 타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시간이 멈춘 땅’이라고 불리는 미얀마 역시 가고 싶은 로망의 땅인데 마침 그곳으로 사업을 하러 떠난 친구가 초대를 해 준 것이다. 공항까지 마중을 나온 그가 나를 반기며 호텔로 데려갔는데 그 지역이 ‘9 마일’이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몰라 묻자 서울에서 을지로니 충무로니 부르듯이 ‘9 마일’이라고 부른다는 것이었다. 호텔로 들어서는 길목에 있는 레스토랑 간판에도 ‘9 마일’이라고 표기되어 있자 의아하다는 느낌과 함께 의문이 들었다. 미얀마라는 아시아의 이 나라와 ‘9 마일’은 어쩐지 서로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영국이 미얀마를 식민지로 삼았을 때 많은 주요 도시들을 계획 도시로 만들었지. 양곤도 그 중 하나야. 이 도시의 중심에 술레 파고다(Sule Pagoda) 라는 게 있어. 부처님의 머리 카락 한 올을 모셨다는 유명한 불탑이야. 2007년에 일어난 반정부 시위의 거점인 동시에 군부의 무력 진압으로 수많은 희생자들을 내기도 한 곳이지. 그 불탑을 중심으로 1 마일, 2 마일...이렇게 나가지. 이 호텔은 9 마일에 있는 거고 10 마일에 있는 공항이 양곤의 거의 끝이라고 보면 돼.”
친구의 설명을 듣자 이해가 되었다. 식민지에서 벗어나 민주 공화국이 되었다가 군사 정권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그 시절에도 식민지 시대의 유산을 그대로 쓴 모양이었다. 2010년에 민정 이양은 되었지만 그 이면은 여전히 군부에 의한 조종 성격이 크다하니 어둠 속에 빛나는 ‘9 Mile’이라는 단어가 심상치 않게 들어왔다.
친구와 술을 진하게 마시며 회포를 푼 다음 날 아침 호텔을 나서 걷는데 어느 자그마한 식당 앞에 놓인 물건이 가슴을 쿵 두드렸다. 물항아리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목 마를 때 마시라고 물이 소담하게 담겨 있을 것이다. 물론 외국인인 내가 마시면 배탈이 날지도 모르지만 현지인들에겐 정성스런 선물이자 인심일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옛날에 양조장 앞에 막걸리를 과객들이 공짜로 먹으라고 굵은 소금과 함께 놓아두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바로 그런 것을 내 눈으로 목격한 것이었다.
‘9 마일’이 표상하는 역사 및 정치적인 것과 물항아리가 표상하는 전통적이며 순수한 정감 사이에 이 재래 시장이 놓여 있을 것이다. 보족 시장(Bokyoke Market)이라고 불리는 이 재래 시장 내의 각종 사연들과 삶의 표정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에티오피아에서 무수히 보아온 삶의 얼룩들이 이곳에도 또다른 방식으로 넘쳐대고 있는 것이다. 아우성이기도 하고 생존의 허덕임이기도 하고 희망을 위한 절망적인 몸짓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장 안으로 더 들어가자 청년 한명이 벽면을 청소하고 있었다. 나무 사다리며 새까만 그을음이며 익숙한 것들이었다. 어릴 적에 익히 봤으면서도 까마득히 잊고 있던 풍경이어서 넋 잃듯 서서 바라보았다.
가난의 풍경이라고만 국한하고 싶진 않다. 궁핍하고 비루하긴 하지만 저 몸짓엔 삶을 향한 거룩한 땀방울이 녹아 있다. 다만 적정 가격조차도 못 받는 억울과 한이 있는 것이다.
보족 시장에서 벗어나 고물 버스를 타고 달리다가 정류장에 섰을 때 눈에 들어온 정경이다. 연인이거나 가난한 부부일 것이다. 매연이 들끓는 곳에서 팔아봐야 얼마 남지 않을 물건들을 팔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미소가 싱그럽고 행복해 보인다.
차창 밖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허공에 저울이 그려진다. 세계의 구조적 모순이 저울의 한쪽에 올려 있다. 반대쪽엔 저 미소 아니 저런 미소들이 올려 있다. 한쪽으로 저울이 자꾸 기울어지는 듯하다. 꺼질 듯 여린 미소들이 안간힘으로 저울의 균형을 잡고 있다.
상상의 나래를 더 펼 틈도 주지 않고 버스는 매연을 뿜으며 떠난다. 미소진 얼굴은 저 멀리 사라져가고 버스는 덜컹거리며 가속을 시작한다. 3 마일을 지나 4 마일, 5 마일을 지난다. 멀찌감치 눈에 들어온 허름한 식당 앞에 물이 정성스럽게 담겼을 물항아리가 애잔하게 미소짓고 있다.
이명훈 (소설 ′작약도′ 저자)
“영국이 미얀마를 식민지로 삼았을 때 많은 주요 도시들을 계획 도시로 만들었지. 양곤도 그 중 하나야. 이 도시의 중심에 술레 파고다(Sule Pagoda) 라는 게 있어. 부처님의 머리 카락 한 올을 모셨다는 유명한 불탑이야. 2007년에 일어난 반정부 시위의 거점인 동시에 군부의 무력 진압으로 수많은 희생자들을 내기도 한 곳이지. 그 불탑을 중심으로 1 마일, 2 마일...이렇게 나가지. 이 호텔은 9 마일에 있는 거고 10 마일에 있는 공항이 양곤의 거의 끝이라고 보면 돼.”
친구의 설명을 듣자 이해가 되었다. 식민지에서 벗어나 민주 공화국이 되었다가 군사 정권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그 시절에도 식민지 시대의 유산을 그대로 쓴 모양이었다. 2010년에 민정 이양은 되었지만 그 이면은 여전히 군부에 의한 조종 성격이 크다하니 어둠 속에 빛나는 ‘9 Mile’이라는 단어가 심상치 않게 들어왔다.
친구와 술을 진하게 마시며 회포를 푼 다음 날 아침 호텔을 나서 걷는데 어느 자그마한 식당 앞에 놓인 물건이 가슴을 쿵 두드렸다. 물항아리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목 마를 때 마시라고 물이 소담하게 담겨 있을 것이다. 물론 외국인인 내가 마시면 배탈이 날지도 모르지만 현지인들에겐 정성스런 선물이자 인심일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옛날에 양조장 앞에 막걸리를 과객들이 공짜로 먹으라고 굵은 소금과 함께 놓아두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바로 그런 것을 내 눈으로 목격한 것이었다.
‘9 마일’이 표상하는 역사 및 정치적인 것과 물항아리가 표상하는 전통적이며 순수한 정감 사이에 이 재래 시장이 놓여 있을 것이다. 보족 시장(Bokyoke Market)이라고 불리는 이 재래 시장 내의 각종 사연들과 삶의 표정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에티오피아에서 무수히 보아온 삶의 얼룩들이 이곳에도 또다른 방식으로 넘쳐대고 있는 것이다. 아우성이기도 하고 생존의 허덕임이기도 하고 희망을 위한 절망적인 몸짓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장 안으로 더 들어가자 청년 한명이 벽면을 청소하고 있었다. 나무 사다리며 새까만 그을음이며 익숙한 것들이었다. 어릴 적에 익히 봤으면서도 까마득히 잊고 있던 풍경이어서 넋 잃듯 서서 바라보았다.
가난의 풍경이라고만 국한하고 싶진 않다. 궁핍하고 비루하긴 하지만 저 몸짓엔 삶을 향한 거룩한 땀방울이 녹아 있다. 다만 적정 가격조차도 못 받는 억울과 한이 있는 것이다.
보족 시장에서 벗어나 고물 버스를 타고 달리다가 정류장에 섰을 때 눈에 들어온 정경이다. 연인이거나 가난한 부부일 것이다. 매연이 들끓는 곳에서 팔아봐야 얼마 남지 않을 물건들을 팔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미소가 싱그럽고 행복해 보인다.
차창 밖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허공에 저울이 그려진다. 세계의 구조적 모순이 저울의 한쪽에 올려 있다. 반대쪽엔 저 미소 아니 저런 미소들이 올려 있다. 한쪽으로 저울이 자꾸 기울어지는 듯하다. 꺼질 듯 여린 미소들이 안간힘으로 저울의 균형을 잡고 있다.
상상의 나래를 더 펼 틈도 주지 않고 버스는 매연을 뿜으며 떠난다. 미소진 얼굴은 저 멀리 사라져가고 버스는 덜컹거리며 가속을 시작한다. 3 마일을 지나 4 마일, 5 마일을 지난다. 멀찌감치 눈에 들어온 허름한 식당 앞에 물이 정성스럽게 담겼을 물항아리가 애잔하게 미소짓고 있다.
이명훈 (소설 ′작약도′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