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없어 다니던 대학을 중퇴한 아버지는 가난한 지방 공무원의 길을 가면서 자리를 잡아나갔다. 그러면서 함께 고생한 동생들은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해 그들 모두 대학 교수가 되는 데에 큰 힘을 주었다.
게다가 예술가의 길을 걷던 숙부의 인생마저 책임져야 했다. 일제 시대에 경성제대를 다니며 피아노를 공부하던 그는 사소한 시비로 인생이 망가져버렸다. 전차에서 한국 여자를 괴롭히는 일본인을 끌어내 두드려 팬 것이다. 경무대에 끌려가 모진 전기고문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그 후 미쳐버리고 말았다. 그 후의 징그러운 생애의 돌봄도 할머니와 아버지는 스스럼없이 맡았다.
아버지는 원래 허약 체질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약골이었다고 할머니는 말하곤 했다. 그런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겪어온 세월은 아버지 세대의 사람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혹독하게 무거운 것이었다. 아버지 한 몸도 추스르기 어려운 상황에서 아버지는 졸지에 대가족의 운명을 책임질 자리에 어린 나이에 올라버린 것이었다.
“여기 제일 좋은 걸로 하나 싸주세요.” 내가 대학 졸업 후에 취직도 대학원 진학도 포기한채 사교에 빠져 미쳐있을 때 거의 유일하게 대낮에 집에 들어와 나의 못된 발악을 지켜본 다음 날의 아버지가 나를 옷 가게에 데려가서 한 그 말에서 나는 아버지를 물씬 느꼈다. 석유와 얼음, 엿 공장 모두 줄줄이 무너진 후에 어렵게 견뎌내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티를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은채 잘못 될 수도 있는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싶은 마음뿐이었던 아버지. 그 옷을 입고도 사교에 매진하면서도 그 옷의 느낌은 나를 새록새록 채운 바가 있었다.
아버지의 숙부의 일은 아버지가 책임질 일도 아니었다. 가정마저 내팽개치는 아버지들이 숱하게 맡은 세월이기도 했다. 가족을 지키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책임질 일도 아닌 숙부마저 떠맡아 책임지면서도 아버지는 이렇다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묵묵하고 모질게 인고하면서 그 일 외에도 허다한 궂은 일들을 끌고 나갔다.
위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파탄과 궁핍, 지나간 사상 문제가 노출될 것을 우려한 지옥 같은 불안과 압박감의 세월, 어릴 적 대가족이 모여 살던 훈훈한 기억뿐이었을 것이다. 그 버림받은 황무지에서 근면한 청백리로서 평생 인고의 삶을 살다가 자리가 잡힐만한 중년기에 가내 사업들이 잇따라 망함에 따라 또 다른 아픔의 세월을 가엾은 내 어머니와 함께 견뎌야 했다. 그러나 증조부의 유서에 있는 그대로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원망하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진천 할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며칠이라도 시간을 같이 보냈다면 훨씬 생생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분이야말로 살아계신 분들 가운데 증조부를 가까이에서 직접 뵌 분이었기에. 증조부와는 한 세대 아래이긴 하지만 말이다.
진천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한 시대의 불꽃들은 영원한 어둠 속에 묻혀버렸다. 할머니,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내 유년의 교동집도 철거되어 버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