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아내의 냉정으로부터 심한 수치와 모멸을 느끼더라도 부정되지 않는 것은, 아내의 그런 배타성이 피멍 든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상처의 원인 제공자가 바로 나라는, 가혹한 진실의 확인이었다. 실로 아내는, 카메라 뚜껑이 열려 빛에 노출된 필름처럼, 나와의 기억, 아름다웠던 기억마저 송두리째 지워진 파리하고 초췌한 모습이었다.
미라의 말대로 아내가 ‘사랑이 없으면 죽는 여자’라면, 내 존재는 ‘사랑을 창출해내지 못하면 죽는 남자’로 무섭게 변해 갔다. 그 무서운 속도가 나는 무섭지 않았다. 외통수에서는 외통수의 길이 나오는 법이다. 나는 사랑의 속도에 맹목적으로 감염되어 갔다. 까다롭기 그지없는, 여리게 꺼져가는 사랑체인 한 생명, 한 여자로서의 내 아내가 가엽고 사랑스러워 못 견딜 정도였다. 누가 나를 단지 미쳤다고만 볼 수 있겠는가.
10.25. 용문산(회사 야유회)에서
현주야, 산이야. 단풍 들었어. 산이 너무 이뻐.
당신이 눈에 선해. 개울물 맑게 흐르고, 하늘이 파래. 낮술 몇 잔 마셨어. 동동주. 그래도 정신이 너무나 맑아. 이제 어떤 술을 마셔도, 맑을 것 같애.
가끔 동료들이 말 걸었어. 얘기하다 보면 마음이 풀려. 그래도 그 사람 가고 나면, 허전함이 또 밀려와. 너도 그랬겠구나. 솔개처럼 이 하늘 저 하늘 바꿔 날아다니면서도, 당신 참 허전했겠구나. 그 허전함 커져, 미움 되고 응어리 되고 무감각한 당신 되었구나. 인형처럼 되어버린 당신, 당신의 목각인형, 자동인형이 너무 가엾어 눈물이 나온다. 이제, 내 숨구멍을 닫고 있던 먼지들, 다 사라졌어. 숨구멍마다 호흡을 해. 거기서도 사랑을 해. 거기에도 예술이 있어. 현주야. 나 그동안, 사랑 없는 예술 했나 봐.
당신이란 사람, 그 지극한 사랑, 내 영혼의 심원을 흔들어 놓은 사랑. 그 사랑 모르고 나, 예술의 껍데기에 살았어. 죽은 껍데기 눌러쓰고 갯벌 기어가는 집게처럼, 딱딱하게, 외롭게 살았어.
그렇게 오래 참은 당신, 병 되도록 오래 참은 당신. 단지 무사하기만을 바래. 나 이제, 내 영혼의 차에, 그 빛깔 좋은 볼보 차에 당신 태우고, 멋진 드라이브할거야. 산으로 들로. 꽃향기 속으로. 당신과 마시는 모과차 향기 속으로. 당신의 고통의 잠. 그 곁에 밤을 지새는 인고의 희락 속으로.....인도도 당신과 가고 싶어. 유럽도 당신 데리고 가고 싶어. 이제, 아프지마. 내 보여줄 게 많아.
언젠가 민다나오의 길을, 스리랑카인과 걸은 적이 있어. 참 아름다운 길이었어. 내가 걸은 길 중에 가장 멋진 길이었어. 길 옆에 야자수가 늘어서 있었고, 야자나뭇잎 사이로 석양이 장엄하게 지고 있었어. 그 길보다 더 아름다운 길. 이제 알았어. 당신이 그 길이야. 당신에게도, 내가 길인 적 있었어. 그 길에 돌팍 많아서, 당신 무릎 깨지고, 가슴 다 상했어. 당신의 길이고 싶었던, 나란 사람 속에서, 당신 길 잃었어. 그 혼미함의 극치, 응어리의 극한, 무감각의 극단, 당신 다 겪었어. 그래도 당신 안 떠났어. 이제, 내가 당신 길이야. 내 안의 돌멩이들, 당신 무릎 깨는 돌팍들, 다 치울 거야. 벌써 반은 치워졌어. 이제 선선한 오솔길 되어, 돌아오는 당신 걷게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