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월 이만 원짜리 셋방마저 비워줘야 했을 때는 갈 곳이 없어 내 방을 거처로 삼아야 했다. 시멘트 바닥에서 꺼이꺼이 울던 국졸 출신 청년, 그의 여자 친구, 부랑아 같은 사내, 몇 명의 남녀 대학생들, 이상한 걸 좋아하는 사람들, 일반인들이 수시로 내 방에 들락거렸다.
그들 모두와 그들이 데려오는 새로운 신도들에게 이 시대에 떨어진 불같은 진리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방안에 열기와 긴장감이 감돌았다. 더군다나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라고 굵은 붓글씨로 벽에 써 붙여놓아 충절의 도는 극에 달해 있었다.
모일 때마다 집이 떠나가도록 군가처럼 개사한 찬송가를 함께 부르고, 청주에 불을 던지자고 전의를 다져나갔다. 어머니는 내가 돈이 떨어지면 더 이상하게 변할까 근심하며 주머니를 털어 용돈을 찔러주곤 했다.
하루는 아버지가 근무 중인 낮에 집에 돌아왔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지방공무원인 아버지는 살림은 비록 어려웠지만 청렴결백하기로 소문이 나신 분이다. 출퇴근이 정확하시고 신문에 연일 터지는 공무원 비리 따위엔 일절 관계 없는 분이다. 그런 아버지가 나 때문에 분통이 터져 근무 중에 집으로 오신 것이다. 일요일에 설교하기 위해 사도행전 부분을 뒤적거리던 참이었다.
“들어와 봐.”
아버지의 단호한 한마디에 의해 성경을 접고 안방으로 건너갔다. 어머니는 밖에서 안을 살피고 있었고 아버지는 무거운 침묵 속에 있었다. 그 침묵이 나를 짓눌렀다.
“꼭 이래야겠니?”
아버지는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평소엔 아버지 말이라면 무조건 듣는 나였지만 그날만큼은 그 단순한 말에도 미친듯이 대들었다.
“아버지 절 제발 내버려두세요. 이 일은 꼭 해야만 돼요. 그냥 이해해 주세요”
말을 내지르면서 감정이 복받쳐 올라 방안에 떼굴떼굴 굴렀다. 방엔 그때 나를 안쓰러워 하는, 나보다 더 안쓰러운 어머니가 쟁반에 놓고 나간 사과가 있었다. 그 주먹만 한 사과로 내 가슴을 마구 쥐어박으며 아버지 앞에서 짐승처럼 뒹굴었다. 엉엉 울면서. 제발 절 그냥 내버려두세요.
아버지는 말없이 일어나더니, 벗어놓은 양복을 입고 나갔다. 그리고 다음날, 전화로 날 불러내 옷 가게에 데려갔다.
“하나 골라. 제일 좋은 걸로”
“괜찮아요, 아버지”
“여기 제일 좋은 걸로 하나 싸주세요”
.....아버지는 그런 분이었다. 그런 식으로, 우리 집의 궂고 험한 일들을 앞장서서 다 꾸려나갔다. 어렵고, 독특한 우리 집안의 장손으로서. 그 옷을 입고도 나는 개척 교회를 세우는데 매진했었다. 몸무게가 십 킬로가 빠져 나중에는 옷이 헐렁헐렁해졌다.
그랬었다. 초기의 그 순수하고 정열적이었던 신앙 운동이 그후 왜 변질된 건지,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던 건지 잘은 모르겠다. 매스컴에서 내가 믿어마지 않던 랍비의 섹스 스캔달과 피해 사례들을 보도할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고락과 진리 운동을 함께 나누었던 여대생들이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피해자의 대열에 합류되어간 사실에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세상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지. 끝도 없이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