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인촌에 들어서니 애저녁이었다. 태극기가 휘날리는 초가집 마을은 조용했다. 사람도 인기척도 없는 마을엔 강아지만이 컹컹 짖어댔다. 지리산 삼신봉 동쪽 기슭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의 행정구역은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다.
1990년대 까지는 100여 명이 살았지만 지금은 4가구만 살고 있다. 도인촌에 거주하는 도인들의 종교는 일심교(一心敎)다. 정식명칭은 '시운기화유불선동서학합일대도대명다경대길유도갱정교화일심(時運氣和儒彿仙東西學合一大道大明多慶大吉儒道更定敎化一心)'이다.
댕기머리를 한 미소년이 어느 초가집에서 나왔다. 나는 그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집안에서 사람기척이 났다. “계세요? 계세요?” 소리쳤다. 60쯤 돼 보이는 점잖은 원광 서형탁 도인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저 방에 들어가 계세요. 저녁 밥 먹고 갈 테니.” 친절한 말씨에 웃음을 함박 띤 모습이었다.
도인이 안내해 준 방안에 들어서니 알 수 없는 한문으로 된 책들이 꽉 차 있었다. 외할머니 없는 외갓집에 온 것처럼 썰렁한 마음으로 한 참을 기다리니 그 도인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서로 명함을 건네며 인사했다. 도인도 명함을 파고 있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도인이 따라준 차를 마시며 도인세계에 대해 이야기가 오갔다.
도의 세계에 대해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도인의 말을 듣는 입장이었다. 도인은 차분하고 조용조용하게 자신의 살아 온 삶의 과정과 도의 세계에 대해 설명해 나갔다.
“저는 15살에 도인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한 때는 이 세계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맞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면서 함께 수학하던 도반들이 도인의 길을 포기할 때 저 역시 흔들렸습니다. 하지만 한 우물을 파면 결과가 나온다는 신념으로 지금까지 도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후회하지 않는 삶입니다.”
“도의 세계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침에 피었다 시들은 버섯이나 꽃은 초하루 그믐을 알지 못하고, 여름 한 철 살다가는 매미는 봄가을을 모르듯이 많은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 매몰되어 무엇이 옳고 그르며, 어느 것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명확히 알지 못한 가운데 정확한 지식과 확실한 정보 부재 속에서 우리는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천기란 하늘의 비밀 즉, 우주 자연계의 시간을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기는 주야 24시간 중 밤이 아닌 낮 시간에 진입하였습니다. 밤은 가고 낮이 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신속히 밤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야행성의 심리와 사고에서 빠르게 벗어나야 합니다. 벗어나지 않고 과거의 타성에 젖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살생, 폭력, 기만, 증오, 비리 등 소인배의 어두운 심리가 판을 치는 암흑의 시대가 가고, 상생, 자비, 진실, 양보, 겸손 등 대인군자의 투명한 심성을 가진 지혜로운 사람이 활보하는 광명의 새 시대가 왔기 때문입니다.
이 밤과 낮이 교차하는 시기를 정확히 밝히면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83년 12월 1일 23시, 단기 4316년 10월 28일 자시부터입니다. 이 날로써 어두운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광명의 새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지금 우리 지구촌은 주야가 바뀐 시기에 살고 있기에 일대 변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식개혁이요 정신혁명입니다.”
알쏭달쏭한 도인의 말을 뒤로 한 채 도인촌을 빠져 나왔다. ‘밤의 시대는 가고, 낮의 시대가 왔다? 범죄 없는 세상이 곧 될 것이다? 그럴까?’하는 의문이 화두처럼 머리 위에서 맴돌았다. 애저녁은 이미 깊은 밤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지리산의 어둠이 숯가루를 뿌린 듯 까맣게 내려앉고 있었다.
변상문 전통문화연구소장 (02-794-8838, sm290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