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얼빠진 모습은 일제 강점기 일제에 의해 자행된 민족문화 말살정책 때문이다.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한 직후부터 우리의 민족문화를 말살시켰다. 학교에서는 조선말과 글을 쓰지 못하도록 했으며,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을 단행했다.
또한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우리들의 역사를 왜곡했다. 대표적인 역사 왜곡이 임나일본부설이다. 삼국시대에 일본이 백제, 신라 땅을 정복했다는 터무니없는 조작 역사를 만든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전국의 민족정기가 흐르는 곳엔 여지없이 쇠말뚝을 박았다.
이와 같은 일제의 수많은 민족문화 말살 만행 중 여기서는 무당과 기생에 대한 말살 죄악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 나라의 얼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요, 이러한 자부심은 그 나라의 전통문화를 통해 계승되고, 전통문화는 그 나라의 정신문화가 담겨있는 말과 글을 통해 이어진다. 이 말과 글이 가장 온전하게 감정적으로 담겨 있는 것이 그 나라의 악이다. 즉 국악인 것이다.
무당은 우리 기층문화를 형성한다. 즉 우리 전통문화의 뿌리인 것이다. 무당의 굿판에서 우리의 소리, 춤, 악이 나왔다. 굿은 다양한 형태로 행해진다. 그 중 하나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흔히 볼 수 있었던 대동 굿이다. 대동 굿은 정월초하루 마을의 안녕을 비는 축제다.
일제는 대동 굿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경계했다. 항일 운동으로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그래서 일제는 굿을 못하도록 탄압했다. 일제 강점기 때 사실상 무당의 굿판이 사라질 위기에 처할 정도로 크게 훼손당했다. 뿐만 아니라, 무당의 굿판에 들어있는 우리 민족의 기층문화가 미신 문화임을 강조해 열등감까지 심었다. 그 결과 우리 악의 태 자리가 미신으로 떨어졌으며, 국악은 천한 음악으로 왜곡 변질되기에 이르렀다.
이능화는 조선해어화사에서 기생의 연원을 신라 진흥왕 때로 정하면서 남자 화랑에 해당하는 여자 원화(原花)를 기생의 출발로 보았다. 기생은 고려와 조선조 공히 국군을 위무하고 외교사절을 위해 연향하는 계층이었다. 즉 국가 공무원 신분의 예능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생은 조선조 때는 예조 산하에 장악원을 두어 기생을 관리했다.
연산군 때는 흥청이라는 궁궐 조직에서 궁내부의 기생을 관리했다. 관리 인원은 대략 300명 내외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방은 운평이라는 조직을 통해 약 700여 명의 기생을 관리했다. 연산군이 폐위 된 후 연산군을 비하시키기 위해 노론에서는 연산군이 기생 1천여 명과 음주가무를 즐겼다고 했다.
그러나 이덕일 같은 역사학자는 이 같은 주장이 근거 없는 것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곁가지 이야기지만, 흥청 망청이라는 말은 연산군 폐위 후 흥청이 없어졌다는 의미로 쓰는 말이다.
아무튼 일제는 1910년 강제 한일합방 후, 장악원을 이왕직 아악부로 축소시켜 기생을 관리하다 1914년 모든 기생을 궁궐 밖으로 쫓아냈다. 이때 궁중에서 음식관리 업무를 담당했던 안순환이 궁궐에서 나와 지금의 동아일보 자리에 그 유명한 명월관을 개업한 후 궁궐 출신 기생을 고용해 일약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한편, 궁중에서 쫓겨난 기생들은 생업을 잇는 것이 문제였다. 일제는 이러한 기생의 취약점을 이용해 여항(閭巷)의 갈보 등과 동급으로 취급해 일제 경찰 통제 하에 매매춘을 하도록 했다. 그 결과 기생의 몸속에 담겨져 있는 민족의 악이 창녀의 악으로 떨어지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일제는 이렇게 교묘하게 우리 악을 천박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그들의 엔카 문화(소위 뽕짝)를 강제 이식했다. 광복 후 우리들은 건국, 좌우 이념 대결, 6.25전쟁, 산업화, 민주화를 거치면서 숨 가쁘게 살다 보니 끊어진 민족 얼과 전통문화를 제대로 복원하지 못했다. 그 결과 위에서 열거한 얼빠진 사례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변상문 전통문화연구소장 (02-794-8838, sm290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