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는 청교도적 삶을 사는 남편 알렉시아 카레닌의 정숙한 부인이다. 그는 바람을 핀 오빠에게 반목하는 올케의 마음을 돌리고자 모스크바에 방문했다 젊고 잘생긴 기마부대 장교 브론스키와 열렬한 사랑에 빠진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말처럼 안나는 오빠 부부에게 했던 조언과 정반대로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의 원작 '안나 카레니나'는 무려 1000페이지가 넘는 대작. 어지간한 집중력이 아니라면 읽을 엄두를 내기도 어렵다. 조라이트 감독은 그 중에서도 '사랑'에 관한 대목만 뽑아 영화를 만들었다.
'안나 카레니나'는 이미 수차례 영화화된 작품일 뿐더러,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줄거리를 가졌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조라이트이기 때문이고 또 키이라 나이틀리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이미 '오만과 편견' '어톤먼트'로 두 차례에 걸쳐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경력이 있다. 당시에도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을 때 으레 받기 마련인 박한 평에서 그들은 자유로웠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조라이트 감독은 놀라우리만치 뛰어난 고전 해석과 화면 구성 능력을 보여준다. 첫 장면부터 연극적 무대와 세트 안에서 진행되는 영화 장면들은 관객들에게 묘한 낯설음과 흥미를 준다. 뚝뚝 끊어지지 않고 세트가 바뀌면서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화면 전환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미술 장치와 의상, 음악, 배우들의 열연과 어우러져 상투적 소재의 영화를 새롭게 재탄생시킨다.
특히 '안나 카레니나'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무도회 장면은 무려 엑스타라 300명이 동원됐다. 강도 높은 댄스 리허설로 배우들이 모두 혀를 내둘렀다는 후문이다. 키이라 나이틀리와 브론스키 역의 애런 존슨은 고난이도의 손동작과 안무로 인물의 감정을 담아냈다. 무엇보다 손끝까지 섬세함이 돋보이는, 또 이미 사랑에 빠져버린 안나와 브론스키의 설렘과 뜨거운 감정의 교류가 드러나는 명장면이다. 이는 수많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브론스키의 지난 여인 키티의 절망적인 감정과 대조돼 빛를 발한다.
키이라 나이틀리는 청렴하고 도덕적인 정치가 카레닌의 아내이지만 생각지 못했던 사랑에 빠져 현실을 부정하는 귀부인을 열연했다. 뜨거운 사랑을 갈구하며 절망하는 불륜 상대까지 설득력 있게 그려내 관객의 공감대를 이끌어냈다. 남편과 자식을 진심으로 아끼는, 하지만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는 바람을 피워보지 않은 여성의 마음까지 파고들었다.
세상의 눈이 무서워 바람이 난 아내 안나와 이혼조차 못했던, 그러면서도 솟아나는 질투를 어쩌지 못해 번뇌하는 카레닌을 연기한 주드 로 역시 섹시남 이미지를 벗고 성공적인 연기 변신을 했다. 그는 끝내 안나와 브론스키 모두 용서하고 포용하는 성자의 모습으로 톨스토이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삶의 가치를 가리키는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캐스팅 단계에서 일부 팬들의 우려를 샀던 애런 존슨은 하이틴 스타의 이미지를 벗고 어느 여자의 마음이라도 빼앗을 만한 매력적인 눈빛과 연기로 기마 장교 브론스키 역을 소화해냈다. 불꽃 튀는 첫 만남과 정열적인 사랑 앞에, 그는 "우리에겐 불행 혹은 최고의 행복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최고의 행복의 '순간' 이후 이어지는 일상은 불행일 수밖에 없음을 증명해준다.
조라이트 감독과 환상의 궁합을 이어가고 있는 다리오 마리아넬리의 음악은 물론 올해 아카데미 수상의 영광을 누린 재클린 듀린의 의상은 영화의 가치를 극대화시킨다. 키이라 나이틀리와 '오만과 편견'에서 커플 호흡을 맞췄던 매튜 맥퍼딘이 안나의 오빠 오블론스키로 등장하는 점도 색다른 볼거리다.
[뉴스핌 Newspim] 양진영 기자 (jyyang@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