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톈, 사람을 말하다(이중톈 지음. 심규호 옮김. 중앙북스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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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에 잠긴 볏단을 들고서 주역의 64궤 중 마지막 궤인 미제(未濟)에 관한 생각을 말한다. 미제는 ‘어린 여우가 물을 거의 건넜을 때 그만 꼬리를 적시고 말았다. 이로운 바가 없다’는 뜻이다.
작은 실패가 있음으로써 전체 국면은 ‘완결’이 아닌 ‘미완’에 머물고, 이 미완은 더 높은 단계를 향한 새로운 출발점이라는 의미에서 완결을 의미하는 기제(旣濟, 형통함이 적고 처음은 길하지만 마침내 어지러워진다)보다 좋은 궤다. 그러니 작은 실패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면 더 크게 나아갈 수 있지만 문제는 ‘실패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고, 실패 자체가 값진 것이 아니라 실패로부터의 교훈이 값진 것이라는 게 편지의 요지다. 이만 봐도 주역이라는 것이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철학임이 어렴풋이 와 닫는다.
무려 삼천 년이나 된 주역은 맹자, 장자, 아리스토텔레스보다 700년이나 앞섰다. ‘거북이 등뼈로 점을 치던’ 무술이 (서양에서 주로 과학으로 발전하는 대신) 중국에서는 지혜의 철학으로 발전했는데 그것이 주역이라는 것이다. 주역이 단순히 ‘3월에 동쪽에서 귀인이 올 수’나 짚어 주는 점술이 아니었던 것이다.
주역의 핵심은 ‘변화’다.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 모든 사물은 극에 달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 간다. 만물 중 오직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한다는 사실’뿐이다. 기쁨도 뒤집으면 슬픔이고, 슬픔의 꼬리를 기쁨이 물고 간다. 삶은 항상 미제와 기제가 뒤섞여 돌아간다. 그러니 편안할 때 항상 위기를 염두에 두어야 하고, 어렵다고 기죽을 일도 아니다. 옳고 그름, 성공실패가 고정불변이라면 우리의 삶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고로 변화를 두려워할 게 아니라 변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라는 가르침은 결국 ‘도전하는 주역’으로 귀결된다.
<이중톈, 사람을 말하다>는 이렇게 고전에 대한 명쾌한 강의로 대중적 인기가 높은 중국의 이중톈 교수가 여섯 번에 걸쳐 강연한 ‘중국의 지혜’를 엮은 책이다. 주역을 필두로 공자의 중용, 손자의 병법, 노자의 도, 위진 시대 르네상스, 중국식 불교 선종 등 여섯 항목으로 전개된다. 저자가 ‘고전은 영원한 지혜의 우물이다. 물통만 있으면 언제든 채워서 돌아올 수 있다’고 한 만큼 삼천 년 중국인의 키워드인 ‘원칙, 상식, 변화, 겸손, 절제, 도전, 지혜’의 바다에 한동안 몸을 담그게 한다.
중용(中庸)의 중은 극단으로 치우치지 말라는 것이고, 용은 현실과 동떨어진, 교과서에서나 가능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선택할 줄 아는 융통성과 다양성을 인정하되 원칙을 지키는 통일성이 중용이다. 이때의 원칙은 시대의 상식 정도로 읽힌다. 그러므로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중용의 사회다. 장삼이사의 눈높이에 맞는 상식을 강조한 공자가 그래서 위대한 스승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영원한 인도주의자 노자는 흐르는 물이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세상의 모든 것을 받아 들이는 바다, 그 겸손의 바다에 모인 가장 유약한 물이 결국엔 바위를 뚫는다. 물이 사실은 가장 강한 것이다. 노자는 가장 약한 어린아이나 물처럼 나서지 않고 참는 용기, 그 진짜 용기를 발휘해야 이기는 것이 삶이라고 가르친다. 절벽과 바다는 시간싸움, 결국은 바다가 이기는 것이다.
그러니 안될 것 같으면 ‘36계 줄행랑’이 남는 장사인 것은 당연하다. 노자도 손자도 싸우지 않고 이기는 부전승을 최고로 친다. 싸움에는 상대가 있다. 내가 최대한 할 수 있는 것은 ‘지지 않는 것’이지 ‘이기는 것’이 아니다. 이기는 것은 상대의 실수 때문이다. 항상 이기려면 내가 실수하지 않고, 적이 실수하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23연승 무패가 자신이 실수할 부분을 꼼꼼히 챙겼기 때문임이 논리적으로 들어맞는 이 대목에서 탄성을 금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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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염두에 둘 것은 이중톈 교수 역시 중국인이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중국인들을 ‘중화민족’이라고 부른다. 중화민족이라고는 원래 없었다. 한족 외의 다른 소수민족들을 포용하기 위해 새롭게 만든 ‘용어’일 뿐이다. 이는 발해와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포함시키려는 ‘동북공정’과 맥락을 같이 한다. 중국의 지식인들이 그들의 고전에서 중화민족을 찾아내는 지금 ‘선택 과목’으로 전락한 우리 국사(國史)교육의 현주소를 짚어봐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