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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전쯤인 듯 싶다.
한석규과 심혜진이 주연한 <은행나무 침대>라는 영화가 있었다. 석판화가이자 대학강사인 수현과 외과의사인 선영, 그리고 천년전 가야금 악사인 종문과 공주 미단과의 사이에는 밀레니엄이라는 긴 시공의 간극이 있지만 그들에겐 이루지 못한 아련하고 환상적인 사랑의 감정이 지속된다. 그 애련한 사랑의 감정과 서정적인 분위기가 겹쳐지면서 관객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던 기억이 있다.
찌는듯하던 무더위가 언제였느냐 싶을 정도로 싸늘해진 요즘, 가을이 무르익어가면서 가로수의 은행잎도 조금씩 누렇게 물들어간다. 간혹 떨어지는 은행열매를 줍다가 허리를 뜨끔하셔서 한의원에서 치료를 받으시는 분들도 있다. 노오란 아기손처럼 앙징맞고 아름다운 은행잎과 옹골찬 은행열매에 걸맞지 않게 생은행의 악취(!) 때문에 곤혹스러운 경우도 있다.
은행은 한의본초학에서는 ‘백과(白果)’라고 하여 오래전부터 선조들이 한약재로 많이 애용해 왔다. 주로 폐쪽으로 들어가서 폐의 기운을 수렴시켜서 가래 해수 천식에 널리 응용되었다. 또한 몸에 있는 습기를 제거하고 대하를 그치는 작용이 있어서 대하, 소변이 심할 때 이용되기도 하였다. <본초구진(本草求眞)>이라는 책에는“담을 제거하고 술을 깨게 하며 독을 씻고 살충하며, 코와 얼굴에 바르면 여드름 기미도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이 먹으면 배가 부풀어 오르고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하며, 천 개를 먹으면 죽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은행 천 개를 먹으면 죽는다는 기록은 최근 현대약리학적으로 은행에 독성 청산가리성분이 소량 포함되어 있다는 연구결과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생것으로 쓰기보다는 볶아 먹는 것이 안전하고, 하루에 10-20개 정도 이내로 복용하는 것이 좋다. 살구씨에도 은행과 비슷한 거담효과가 있기 때문에 해수 천식에 함께 사용할 수 있으나, 마찬가지로 독성이 약간 있으므로 복용량은 전문가의 지시에 따라 엄격하게 제한해야 한다.
최근에는 은행잎이 혈액순환에 좋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다. 1960년대부터 독일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은행잎에 함유된 징코플라보노이드 성분이 인체의 유해산소를 제거하고 모세혈관의 흐름을 원활히 해주며 혈관을 강화시켜줌으로써 뇌졸중과 심장병등의 예방에 효과를 본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스피린처럼 관상동맥등의 혈전용해에 효과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은 확실히 입증된 바가 없지만 이미 여러 제약회사에서 이를 기초로 혈액순환보조제를 시판하고 있다.
또한 은행잎에는 피부노화와 건성피부에 좋은 징케틴, 잔주름을 막아주는 티페노이드가 들어있어 여드름, 비듬, 탈모 등에 나름대로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은행잎차를 만드는 요령은 우선 은행잎을 3일 정도 소금물에 담가 둔 후 맑은 물에 다시 하루 정도 담갔다가 소량으로 달여서 차처럼 마시면 된다. 체질에 따라 감초를 적당량 가해도 좋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서 손쉽게 접하는 은행과 은행잎에도 엄청나게 많은 약효가 있을진대 조물주는 이 광대무변한 우주엔 만 가지 병만큼이나 만 가지 약들을 준비해 놓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우리 인간의 지혜와 학문이 일천하여 아직도 이 땅에 수많은 불치, 난치병들이 존재할 뿐임에랴! 의업(醫業)에 종사하는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움과 함께 대오각성과 분발을 다시 한번 다짐해 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