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뉴스핌] 장일현 특파원 = "트럼프도 아니었다. 그린란드도 아니었다. 덴마크 총선을 좌우한 것은 돼지였다."
지난 24일(현지 시간) 실시된 덴마크 총선에서 메테 프레데릭센 총리가 이끄는 중도좌파 집권당 사회민주당이 120여년 만에 최악의 득표율을 기록한 것은 유권자들이 전쟁이나 외교·안보 같은 '거대 담론'이 아니라 생활 밀착형 이슈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기 때문이라고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가 25일 보도했다.
이번 총선에서 사민당은 21.85%를 득표해 전체 의석 179석 중 38석을 얻어 원내 제1당 지위를 지켰지만 지난 2022년 때보다 12석이 줄었다. 사민당의 득표율은 20.4%에 그쳤던 1903년 총선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사민당을 비롯해 범좌파 진영(레드 블록)이 얻은 총 의석이 84석에 그쳐 과반에 미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당분간 연정 구성을 위한 치열한 협상이 벌어질 전망이다.

덴마크 정치 전문가들과 일반 시민들 인터뷰에 따르면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들은 투표소로 향할 때 그린란드 이슈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고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무력을 써서라도 그린란드를 손에 넣겠다"고 위협하면서 덴마크는 물론 유럽 전체가 이 문제로 큰 홍역을 치른 점을 감안할 때 의외의 분석인 것이다.
브뤼셀에 있는 연구기관인 브뤼겔의 선임 연구원 야콥 펑크 키르케고르는 "덴마크의 주요 정당들은 주요 외교 정책 이슈 등에서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한다"며 "결국 그들은 지역적인 문제들을 놓고 경쟁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번 선거는 사실상 지방선거였고, 매우 좁고 지역적인 쟁점들을 놓고 치러진 선거였다"고 했다.
이번 총선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로 주목을 받은 것은 돼지 문제였다.
카스퍼 몰러 한센 코펜하겐대 정치학과 교수는 "각 정당들은 매우 국내적인 문제에 집중했다"며 국내 돼지 사육두수와 적정 돼지 생산량, 식수, 은퇴 연령, 세금 문제 등이었다"고 했다.
덴마크는 인구 대비 돼지 사육 밀도가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이다. 총 인구는 600만명인데 사육하는 돼지는 그 두 배인 1200만 마리에 달한다.
덴마크의 환경운동가들과 좌파 진영에서는 토양의 높은 질산염 수치와 식수 오염 가능성 등을 거론하며 돼지 농가에 대한 규제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중도좌파인 사민당의 프레데릭센 총리도 이 같은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프레데릭센 정부가 부유세 도입을 검토하는 상황에서 덴마크 사회에서 부유층으로 분류되는 돼지 사육 농가의 현 정부를 향한 분노는 더욱 커졌다.
20년 넘게 덴마크 정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프레데릭센 총리에 대한 정치적 염증도 커지고 있다는 관측도 제기됐다.
그는 지난 2001년 총선에서 24세 나이로 의회에 입성한 뒤 사민당의 차세대 리더로 주목받으며 급성장했다. 고용부·법무부 장관 등 요직을 거친뒤 최연소 당 대표를 거쳐 지난 2019년부터 7년 동안 총리로 재직하고 있다. 이번에 3선 연임에 성공한다면 덴마크 최장수 총리 기록을 세울 수 있다.
한 정치학자는 "확고부동하고 단호하며 솔직한 프레데릭센 총리의 스타일은 국제 무대에서는 효과적이었지만 국내에서는 그다지 통하지 않는다"며 "유권자에게는 그가 폭군이고 오만한 사람이라고 여겨진다"고 했다.
유권자들이 기존 주류 정당에 대한 실망·지지 철회와 함께 극좌·극우 정당과 소수 대안 세력에 점점 더 힘을 실어주는 '보편적 현상'이 반영된 것이라는 진단도 나온다. 실제로 이번 덴마크 총선에서 의석을 획득한 정당은 무려 12개에 달했다. 덴마크 이외에도 벨기에와 네덜란드 정치권도 12개가 넘는 정당들이 활동하고 있다.
NYT는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상이 유럽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특정 이익 집단에 속한 정당들이 주류 정당으로부터 지지를 빼앗아가고 정치 지형을 분열시키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고 했다.
다만 덴마크의 경우 범좌파와 범우파의 권력 구도는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레데릭센 총리가 다시 정부를 이끌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