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적 위험 발언'이 정부의 공식입장으로 굳어져
세계가 주목하는 韓 관료·정치인 '외교 감수성' 필요
[서울=뉴스핌]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 안규백 국방부 장관은 지난 17일과 24일 국회에서 미국으로부터 호르무즈 해협 항로 보호를 위해 파병해 달라는 요청을 공식적으로 받은 바 없다고 거듭 밝혔다. 안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의 SNS 메시지를 "공식 요청으로 보지 않는다"고 했다. 또 "공식적인 서한(레터)을 받은 것이 없다"는 말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4일 이 문제를 처음 언급한 이후 "필요 없다"는 변덕을 잠시 부리긴 했지만 여전히 호르무즈 해협 항로 보호를 위해 각국이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참여 여부를 기억할 것'이라는 협박성 언사까지 곁들여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 공식 요청이 아니라면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안 장관은 공식 서한을 언급했지만, 외교적으로 이런 문제를 문서로 요청하는 경우는 없다. 대통령·총리의 공개 발언은 곧 국가의 공식 입장이며 발언 자체가 '공식 요청'이나 마찬가지다. 미국 대통령의 공개 발언을 비공식적이고 개인적인 희망 사항 정도로 격하시키는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하다. 파병 요청을 받은 많은 나라 중 "트럼프의 SNS 메시지는 공식적인 요청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밝힌 나라는 한국뿐이다.
상대의 요청을 못들은 척하고 피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공이 이미 우리 코트로 넘어왔는데 아직 상대쪽에 공이 있다고 우기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불이 난 것이 뻔히 보이는데 신고 전화가 없어서 소방차 출동 준비를 안 하고 있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각국은 미국의 공개 압박을 요청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 거절·유보·대안 제시 등의 자국 입장을 내고 있다. 대응하기 어려운 사안이지만 정부도 한국의 상황에 맞는 입장을 밝혀야 한다. 한국의 군사적 지원이 의미있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전력 유지 차원에서 파병이 어렵다는 점을 설명하고 호르무즈 해협을 다시 열기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적극 동참할 의지가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강조해야 한다. 미국이 벌인 전쟁에 동의하는 것과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풀기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안 장관의 발언이 외신에 보도된 이후 "공식 요청 받은 바 없다"가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인 것처럼 굳어지고 있다. 국내 언론도 안 장관의 발언을 정부 공식 입장이라고 거리낌 없이 소개하고 있는 실정이다. 각료급 인사가 동맹국 대통령의 발언을 공식 요청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이번 사태가 가라앉은 이후에도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 뒤끝이 유별난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을 자신의 발언을 무시한 나라로 기억하게 되면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안 장관뿐 아니라 정부의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인사들이 외교적 파장을 의식하지 않은 부적절한 언행을 함으로써 외교적 손실을 초래하는 경우는 매우 흔하다. 지난달 이재명 대통령이 자신의 엑스(X) 계정에 캄보디아에서 한국인 대상 온라인 사기 범죄를 저지르는 조직을 두고 "한국인을 건들면 패가망신, 빈말 같습니까"라는 험악한 경고를 크메르어로 썼다가 삭제한 것이 대표적이다. 캄보디아가 만만한 나라라고 생각해서 외교적 고려 없이 국내정치적 용도의 메시지를 썼다가 망신을 당한 경우다. 상대가 캄보디아가 아니었다면 망신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지난 1월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상반기 중 대미투자 자금 집행이 어렵다"고 밝힌 것도 외교적 파장을 인식했다면 나올 수 없는 발언이었다. 중간선거를 의식해 한국의 즉각적인 대규모 투자 집행을 강력히 원했던 트럼프 대통령을 자극한 것이 관세 재인상으로 이어지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한국은 국제사회가 주목하는 중요한 나라가 된 지 이미 오래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뉴스, 유력 인사들의 발언 등은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퍼져 나간다.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고 대외 영향력이 커진 만큼 리스크도 크다. 국내적 파급력을 가진 관료·정치인들이 말 한마디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외교적 감수성'을 갖지 않으면 국가 경쟁력에 커다란 손실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명심했으면 한다.
opento@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