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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혁 교수의 정치분석] ⑥민주주의 의회 토론의 산실, 영국 웨스트민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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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의회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회로 평가된다. 그 기원은 1215년 러니미드에서 체결된 마그나 카르타로 거슬러 올라간다. 통상 63개 조항으로 구성된 이 문서에는 왕의 과세와 구금 권한을 제한하는 내용과 함께 25명의 남작이 합의 이행을 감시하도록 하는 보증 장치가 포함되어 있었다. 권력은 무제한적 권위가 아니라 조건부 권위로 정의되었다. 대립하던 두 세력 간의 계약은 이후 의회 발전의 토대가 된다.

그러나 이 원칙이 곧바로 안정된 정치 질서를 낳은 것은 아니었다. 17세기 초 찰스 1세는 의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부과하고, 의회를 해산하며, 왕권 중심 통치를 시도했다. 1628년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을 수용하고도 이를 실질적으로 무력화하려 했던 행보는 의회와의 신뢰를 훼손했다. 갈등은 결국 내전으로 이어졌고, 1649년 찰스 1세는 재판을 거쳐 처형된다.

현직 국왕이 법정 판결에 의해 단두대에 오른 사건은 유럽 정치사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웠다.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가 이 사건을 목격하며 출판한 '리바이던(Leviathan, 1651)'에서 시민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강한 군주제를 옹호한 것이 우연이 아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권력 투쟁의 결과가 아니었다. 의회와의 협약을 반복적으로 무시한 결과, 왕권의 정당성이 붕괴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1660년 왕정복고 이후에도 긴장은 지속되었지만, 1688년 명예혁명은 국왕과 의회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정립했다. 권리장전(Bill of Rights, 1689)은 국왕이 의회의 동의 없이 법을 정지하거나 세금을 부과할 수 없음을 명문화했다. 이 시기에 토리(Tory)와 휘그(Whig)라는 정치적 집단이 초기 정당 형태를 띠며 각자의 정치 세력을 형성했고, 반대는 반역이 아니라 제도적 역할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진=Wikimedia Commons / Library of Congress (Public Domain)]

영국식 의회 토론 제도의 성장

조지 1세가 1714년 즉위했을 때, 영국은 이미 1688년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을 거치며 왕권과 의회의 관계를 재정립한 상태였다. 그러나 하노버 왕조의 출범은 또 다른 변화를 촉발했다. 새 국왕은 독일 출신이었고 영어에 능숙하지 않았다. 그는 국내 정당 정치의 세부에 깊이 개입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국정 운영의 중심은 의회 다수파와 그 지도자들에게로 이동했다. 왕이 직접 정치를 통제하던 구조는 점차 내각 중심 체제로 바뀌었고, 의회 안에서 다수의 지지를 확보한 인물이 정부를 이끄는 관행이 강화되었다. 권력은 여전히 군사력과 왕권이라는 상징을 지녔지만, 실제 정책 결정의 무게는 토론과 표결의 장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이 시기 로버트 월폴(Robert Walpole)은 흔히 영국 정치사에서 '최초의 총리'로 불린다. 추밀원 위원(Privy Councillor)이기도 했던 그에게 The Right Honourable Sir Robert Walpole이라는 타이틀이 붙기 시작했다. 월폴은 1721년 이후 21년간 정부를 이끌며 사실상 최초의 총리로 평가받지만, 당시에는 "Prime Minister"라는 공식 직함이 제도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정치 방식은 의회 다수의 지지를 유지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는 공개 토론을 피하지 않았고, 세금과 재정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 설득과 타협을 통해 지지를 모았다. 웨스트민스터는 점점 더 단순한 입법 기관이 아니라, 정책을 설명하고 반대 의견을 조정하는 공간으로 기능했다. 권력의 정당성은 점차 무력 충돌이 아니라 토론을 통과한 표결에서 비롯된다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18세기 후반 미국 독립전쟁이라는 거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1776년 7월 4일, 북아메리카 13개 식민지는 독립을 선언하며 영국에 엄청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영국 의회 내부의 논쟁은 7년 전쟁(1756-1763) 이후 이미 시작되었다. 전쟁 이후 약화된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으로 제기된 영 식민지 세금 부과 권한, 식민지 대표권, 군사적 대응의 범위를 둘러싸고 하원은 분열되어 있었다. 일부 의원들은 식민지의 반발을 단호하게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른 이들은 과도한 세금과 강경 조치가 오히려 제국을 분열시킨다고 비판했다.

당시 야당 소속이었던 찰스 제임스 폭스(Charles James Fox)는 북미 식민지 정책을 비판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1770년대 후반 의회 토론 기록(Cobbett's Parliamentary History, vol. XIX 등)에 따르면 그는 정부의 조치가 "영국의 자유의 원칙에 배치된다"고 주장하며, 무력에 의존한 통치는 식민지를 더욱 멀어지게 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는 전쟁의 확대가 재정 부담을 심화시키고, 장기적으로 국가 신용을 훼손할 수 있다고 지적한 것이었다.

이에 맞서 윌리엄 핏 주니어(William Pitt the Younger)는 국가 재정과 전략적 이해를 중심에 두고 논리를 전개했다. 그는 의회에서 영국의 공공신용(public credit) 유지와 해군력 강화가 국제적 위상을 유지하는 핵심 조건임을 강조하였다. 이 논쟁은 단순한 전쟁 수행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제국의 정체성과 재정 운영의 원칙을 둘러싼 정책 철학의 충돌로 전개되었다.

당시 기록은 오늘날의 완전 속기록과 달리 편집적 성격을 지니지만, 발언 중간에 'Hear him!' 혹은 'No!'와 같은 반응 표기가 등장하는 장면도 확인된다. 이는 논쟁이 단순한 독백이 아니라 즉각적인 반응 속에서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18세기 기록은 현대 Hansard와 달리 회의장 분위기를 체계적으로 서술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토론은 공개된 절차 속에서 이루어졌고, 정책의 방향은 결국 표결을 통해 결정되었다.

이 시기 논쟁은 영국 정치 문화에 장기적 영향을 남겼다. 미국 독립을 막지 못했지만, 의회는 전쟁의 경과와 재정 문제를 지속적으로 점검했다. 전쟁 수행의 실패는 정부 교체로 이어졌고, 정책 책임은 공개적으로 논의되었다. 이는 웨스트민스터 모델의 핵심 원리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권력은 여전히 군사적 수단을 동원했지만, 그 정당성은 의회의 토론과 표결을 통해 확인되어야 했다.

폭스와 핏의 대립은 이후 영국 정당 정치의 형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정부와 야당이 단순히 반대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국가 운영 철학을 경쟁적으로 제시하는 구조가 자리 잡았다. 재정, 외교, 제국 문제는 개인의 충성심이나 왕의 의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의회 안에서 논증과 반론을 거쳐 결정되는 사안이 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훗날 그림자 내각 제도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정부–야당의 정책 경쟁을 제도화하는 기반이 되었다.

영국 한사드(Hansard) [사진=© UK Parliament (Open Parliament Licence)]

한사드, 영국 의회 토론의 기록

오늘날 우리는 Hansard라는 방대한 속기록을 통해 수 세기의 영국 의회 토론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초기 의회 토론은 공개 기록의 대상이 아니었다. 17세기와 18세기 초반까지 의회 토론은 사실상 국가 비밀이었다. 의원들이 발언한 내용은 공식적으로 출판이 금지되었고, 이를 보도하는 것은 특권 침해로 간주되었다. 의회는 외부의 간섭 없이 토론할 권리를 보호하려 했기 때문에 국가의 비밀로 보호했다.

18세기 초, 일부 인쇄업자와 언론인들이 의회 토론을 간접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종종 가명을 사용하거나 "가상의 토론" 형식으로 내용을 전달했다. 당시 인쇄업을 운영한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조차 의회 토론을 문학적 재구성 형태로 작성한 적이 있다. 이는 공식 기록이 아니라 비공식적 재현이었다.

당시의 의회는 기록을 남기기보다 자율성을 유지하는 데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 인쇄 기술과 신문의 발전은 상황을 바꾸었다. 대중은 의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어 했고, 언론은 이를 보도하려 했다. 초기에는 가명이나 우회적 표현을 사용해 의회 토론을 재구성하는 방식이 등장했다.

1771년 런던의 인쇄업자와 의회 사이에서 벌어진 충돌은 전환점이 되었다. 의회가 언론 보도를 강하게 제지하려 하자, 여론은 오히려 기록 공개를 요구했다. 결국 의회는 토론 보도를 사실상 묵인하는 방향으로 움직였고, 이는 공개 기록 문화의 출발점이 되었다.

Hansard라는 이름은 19세기 초 Thomas Curson Hansard라는 인쇄업자에서 유래한다. 그는 1803년부터 의회 토론을 체계적으로 수집해 출판하기 시작했다. 이 초기 Hansard는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공식 속기록과는 달랐다. 발언은 완전한 속기라기보다 편집과 요약을 거친 형태였고, 정부 기관이 아니라 민간 출판사가 발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Hansard는 점차 의회 토론의 사실상 표준 기록으로 자리 잡았다. 의회는 이를 공식적으로 승인하지는 않았지만, 점차 이 기록에 의존하게 되었다.

Hansard는 여러 시리즈로 구분된다. 1803년부터 시작된 First Series(1803-1820)를 시작으로, Second Series(1820-1830), Third Series(1830-1891), Fourth Series(1892-1908)를 거쳐 1909년부터는 현재까지 기록된 Fifth Series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리즈 구분은 단순한 연대 구획이 아니라, 기록 체계와 제도적 위상의 변화를 반영한다. 특히 1909년부터는 'Official Report'로서 정부가 출판을 맡으며 현대적 의미의 공식 속기록으로 자리 잡았고, 이때부터 상·하원 기록이 분리되는 전환도 함께 진행된다.

19세기 영국 의회 논의 내용이 인쇄된 한사드(Hansard) 회의록 [사진=Wikimedia Commons / Hansard Parliamentary Debates Archive (Public Domain)]

19세기 Third Series는 연구 측면에서 특히 중요한 시기로 간주된다. 산업혁명, 선거개혁, 곡물법 폐지, 아일랜드 문제, 제국 팽창, 두 차례의 아편전쟁 등 근대 영국 정치의 핵심 논쟁이 이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이 시기의 Hansard는 아직 완전 속기록은 아니지만, 발언의 재현 수준은 상당히 높다. 로버트 필(Robert Peel)의 곡물법 폐지 연설, 팔머스턴의 외교정책 방어, 글래드스톤과 디즈레일리의 재정 논쟁 등은 모두 이 기록 속에 남아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정치인들이 어떤 논증 구조를 사용했는지, 반론이 어떻게 제시되었는지를 분석할 수 있다.

Fourth Series와 Fifth Series로 넘어가면서 기록의 정밀도는 더욱 높아진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 논쟁,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불신임 토론, 수에즈 위기, 유럽 통합 논쟁, 브렉시트에 이르기까지 주요 역사적 순간들이 Hansard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20세기 이후의 기록은 발언자의 이름, 직함, 발언 전문, 의장의 개입, 청중 반응, 표결 결과까지 체계적으로 남긴다. 이는 단순한 정치 기록을 넘어 민주주의의 작동 방식을 분석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Hansard의 구조적 특징은 민주주의 연구에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발언의 길이와 논증 구조, 반론의 존재 여부, 상대를 지칭하는 언어, 의장의 질서 개입 빈도 등은 모두 토론의 질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가 된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속기록이 괄호 안 분위기 묘사를 통해 언어적 붕괴를 드러냈다면, Hansard는 발언의 구조 자체를 통해 설득의 지속성을 보여준다. 기록이 남는다는 사실은 정치인에게 설명의 의무를 부과하고, 반대 의견을 역사 속에 보존한다.

Hansard는 단순한 기록물이 아니다. 그것은 책임 정치의 기반이다. 정치인은 자신의 발언이 영구적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알고 발언한다. 반대파의 주장은 삭제되지 않고, 다수결에 의해 패배하더라도 기록 속에 보존된다. 이 기록은 후대의 평가와 비교를 가능하게 하며, 민주주의의 언어 규범을 축적한다. 또한 Hansard는 공개성의 상징이다. 의회 토론이 비밀에서 출발해 공개 기록으로 제도화되었다는 사실은 민주주의가 단지 선거 제도만으로 유지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말은 기록되고, 기록은 책임을 낳는다. 기록은 갈등을 투명하게 만들고, 투명성은 제도적 신뢰를 강화한다.

오늘날 디지털 Hansard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다. 특정 날짜의 토론, 특정 의원의 발언, 특정 정책 논쟁을 손쉽게 검색할 수 있다. 이는 의회가 더 이상 폐쇄적 공간이 아니라 공적 토론의 장임을 의미한다. 동시에 일정 기준으로 추출해낸 코퍼스(corpus) 자료는 설득 구조와 민주주의 건강성을 정량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Hansard의 역사는 곧 민주주의 언어의 제도화 과정으로 간주된다. 처음에는 기록이 금기였으나, 이후 비공식 기록이 등장했으며, 마침내 공식 속기록으로 자리 잡았다. 이 발전 과정은 의회가 자신이 하는 말을 역사 앞에 남기겠다는 선택을 했음을 의미한다. 그 선택이야말로 웨스트민스터 모델의 지속성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다.

Hansard 1차 시리즈(1803–1820)는 나폴레옹 전쟁기와 전후 재정 및 국가 운영의 문제들이 겹친 시기다. 2차 시리즈(1820–1830)는 선거권과 종교·시민권 문제를 둘러싼 긴장이 커진 시기다. 가령 1829년 가톨릭 해방법(Catholic Emancipation) 같은 쟁점은 국가 정체성과 권리 확대가 충돌하는 토론을 촉발했고, 토론은 더 대중적 관심을 받게 된다. 3차 시리즈(1830–1891)는 웨스트민스터 토론의 성숙을 논할 때 핵심 창고에 해당한다.

산업혁명, 선거개혁, 자유무역 전환, 제국 확장, 아일랜드 문제 등 근대 영국의 가장 격렬한 정책 충돌이 이 시기에 집중돼 있고, 그만큼 설득의 기술과 인식적 편향, 논리적 오류가 함께 드러난다. 4차 시리즈(1892–1908)는 제국주의 경쟁과 사회개혁 논쟁, 노동 정치의 부상이 겹치는 시기다. 설득의 기술은 더 세련되어지지만, 그만큼 대중 동원형 언어와 계급적 도식도 함께 유입된다. 토론의 논점이 복잡해지는 만큼, 상대를 단순한 유형으로 환원하는 인식적 편향이 작동하는 장면도 늘어난다. 동시에 의장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

기록은 오늘날의 완전 속기와는 거리가 있고 편집적 성격이 강하지만, 이미 정책 선택의 근거를 설명하고 반론에 답하는 의회적 화법이 핵심 장르로 자리 잡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디지털 아카이브는 1차 시리즈가 1803년 11월 개시되어 1820년 2월까지 이어진다고 명시하고, 각 권마다 개시·종료 날짜를 붙여 토론이 '연속된 공적 기록'으로 정리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 설득의 질은 종종 계급적 전제와 제국적 편향을 내포했지만, 결정의 정당성을 명백한 근거로 제시해야 한다는 규범이 정치의 언어로 자리 잡는 단계였다고 말할 수 있다. 5차 시리즈(1909–하원 기준 1981)는 Hansard가 'Official Report'로 제도화된 뒤의 시대다. 즉, 기록의 정밀도와 공적 책임성이 이전과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높아진다.

앞으로 네 번에 걸쳐 영국 의회 토론의 특징, 그리고 세계 의회 민주주의의 모델을 구축한 캐비닛(Cabinet)-그림자 캐비닛(Shadow Cabinet)의 발전 과정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최연혁 스웨덴 린네대학교 교수 [사진=뉴스핌 DB]

*필자 최연혁 교수는 = 스웨덴 예테보리대의 정부의 질 연구소에서 부패 해소를 위한 정부의 역할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스톡홀름 싱크탱크인 스칸디나비아 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매년 알메랄렌 정치박람회에서 스톡홀름 포럼을 개최해 선진정치의 조건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그 결과를 널리 설파해 왔다. 한국외대 스웨덴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스웨덴으로 건너가 예테보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런던정경대에서 박사후과정을 거쳤다. 이후 스웨덴 쇠데르턴대에서 18년간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버클리대 사회조사연구소 객원연구원, 하와이 동서연구소 초빙연구원, 남아공 스텔렌보쉬대와 에스토니아 타르투대, 폴란드 아담미키에비취대에서 객원교수로 일했다. 현재 스웨덴 린네대학 정치학 교수로 강의와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좋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민주주의의가 왜 좋을까' '알메달렌, 축제의 정치를 만나다' '스웨덴 패러독스' 등이 있다.

kimsh@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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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참 "북한군 지뢰일 가능성 매우 높다" [서울=뉴스핌] 오동룡 군사방산전문기자 = 합동참모본부는 지난 21일 육군 25사단 지역 비무장지대(DMZ)에서 발생한 지뢰 폭발 사고의 원인을 "북한군 지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했다. 부상 장병의 장구류에서는 TNT 성분과 갈색 계열 이물질이 검출됐다. 폭발하지 않은 채 발견된 1발은 북한군 수지(樹脂)반보병지뢰로 추정된다. 합참 현장조사 태스크포스(T/F)장인 권대원 합참차장(육군 중장)은 28일 저녁 국방부 청사에서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권 차장은 "최종조사 결과 북한군이 매설한 지뢰로 판정되면, 군사분계선(MDL) 이남에서 정상적으로 작전하던 우리 장병이 북한군 지뢰에 부상을 당한 것"이라며 "모든 책임은 북한에 있고, 합당하고 상응한 조치를 시행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최종 결과는 유엔군사령부와 평가를 거쳐 발표할 예정이다. 권대원 합참차장(육군 중장)이 28일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에서 '25사단 지역 DMZ 내 지뢰 폭발 사고'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권 차장은 "국과수 1차 감정에서 TNT 성분과 갈색 계열 이물질이 검출됐고 철제 파편은 없었다"며 "이번 지뢰 폭발 원인은 북한군 지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밝혔다. [사진=국방부 브리핑 화면 캡처]2026.09.29 gomsi@newspim.com ◆폭발 지점 MDL 남쪽 10여m…"철제 파편 없어 아군 지뢰 아냐" = 합참에 따르면, 폭발은 21일 오전 10시 51분쯤 MDL 남쪽 10여m 지점에서 일어났다. 이곳은 북한군이 최근 지뢰를 매설한 것으로 추정되는 지형 변화 지역에서 10여m 떨어진 곳이다. 폭발은 2발이었고, 철수 과정에서 1발을 더 발견했다는 진술을 근거로 원점 일대에 모두 3발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국과수 1차 감정 결과는 이날 오후 4시 4분 합참에 통보됐다. 작전 병력의 피복·장구류와 화약흔 채취 거즈 등 10종을 감정한 결과, 방탄헬멧 1개와 방탄조끼 2개 등 3개 품목에서 TNT 성분과 갈색 계열 이물질이 나왔다. 양진혁 합참 작전부장(육군 소장)은 "주 장약이 TNT인 아군 지뢰는 폭발 시 철제 파편이 다량 발생하고 살상 반경이 20m 이상"이라며 "이번에는 철제 파편이 없고 갈색 이물질만 있으며 살상 반경도 상대적으로 작아 아군 지뢰는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합참은 북한군 지뢰로 판단한 근거로 네 가지를 제시했다. 우선 해당 지역에는 아군 지뢰 매설 기록이 없는 반면, 인근에서는 2025년 9월 북한군의 지뢰 매설 흔적이 발견됐다. 국과수 1차 감정에서 갈색 이물질이 검출됐고 철제 파편은 나오지 않았다. 1차 폭발 지점에서 1m가량 떨어진 곳에서 갈색의 북한군 수지반보병지뢰를 봤다는 진술도 있었다. 폭발 지점의 화구와 화염 형태, 장병들의 부상 정도, 작전 인원들의 진술 역시 북한군 지뢰를 가리킨다는 것이 합참의 판단이다. 폭발 당시 영상은 확보되지 않았다. 다만 800여m 떨어진 GP의 집음기에 약 58초 간격으로 비슷한 폭발음 두 번이 녹음됐고, 작전 요원들도 "1분 정도 간격이었다"고 같은 진술을 했다. 양진혁 합참 작전부장(육군 소장)이 28일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에서 '25사단 지역 DMZ 내 지뢰 폭발 사고'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수색로 개척 종료 시점과 1·2차 폭발 당시의 대형(隊形)을 요도로 설명하고 있다. 양 작전부장은 "철수를 준비하던 공병 요원이 왼발을 내딛는 순간 1차 폭발이 일어났고, 쓰러진 요원을 구하던 중 2차 폭발로 수색대대장이 중상을 입었다"고 밝혔다. [사진=국방부 브리핑 화면 캡처] 2026.09.29 gomsi@newspim.com ◆미폭발 1발은 '북한 수지반보병지뢰' 추정…탐지기엔 안 잡혀 = 미폭발 지뢰는 1차 폭발 지점에서 약 1m, 탐지를 마친 수색로 끝에서 5~10㎝ 깊이에 매설돼 있었다. 2차례 폭발 뒤 공병 요원이 무릎을 꿇고 손곡괭이로 땅을 찔러 가며 탈출로를 내던 중 발견했다. 발견한 요원은 "갈색의 네모난 형태에 표면은 매끄러운 플라스틱이고 무늬가 있었다"고 진술했고, 북한군 교리에 나오는 지뢰 사진을 보고는 "대단히 유사하다"고 했다. 주변에서 함께 본 3명의 진술은 '적색', '갈색', '목함지뢰' 등으로 엇갈렸다. 합참 공보실은 이 지뢰를 목함지뢰가 아닌 수지반보병지뢰로 정정했다. 합참 관계자는 "목함지뢰와 형태는 같고 재질만 플라스틱"이라며 "북한이 1969년부터 운용해 온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국과수가 검출한 갈색 이물질이 나무인지 플라스틱인지는 아직 구분되지 않았다. 지뢰를 수거할지는 29일 현장에서 유엔사와 협의해 판단한다. 지뢰 3발이 1~2m 간격으로 있었는데도 탐지기가 잡아내지 못한 데 대해 합참 관계자는 "탐지기를 바닥에 최대한 붙여 나갔지만, 수년간 쌓인 잡목 등으로 지뢰가 탐지 성능 깊이 아래에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3발 모두 매설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미폭발 1발은 매설로 추정되지만, 터진 2발은 매설인지 유실인지 아직 특정할 수 없다"고 했다. 28일 현장조사에는 유엔사 군사정전위원회 비서장과 25사단 작전부사단장 등 40여 명이 참여해 2차 폭발 지점 2m 앞까지 접근했다. 1차 폭발 지점은 여기서 2m 더 떨어져 있다. 조사단은 작전 병력의 군장과 방탄헬멧, 지뢰화를 확보하고 웅덩이 형태의 화구 2곳을 육안으로 확인했다. 목격 진술이 나온 지뢰 추정 물체와 잔해물까지는 가지 못했다. 합동조사팀 조사도 시간 관계상 진행하지 못해 29일 다시 들어간다. 지난 28일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비서장과 25사단 작전부사단장 등 40여 명으로 구성된 조사단이 '25사단 지역 DMZ 내 지뢰 폭발 사고' 원점 일대에 접근해 촬영한 현장 모습이다. 흰색 원 두 개는 지뢰 폭발로 생긴 웅덩이 형태의 화구로, 아래쪽이 2차 폭발, 위쪽이 1차 폭발 지점으로 추정된다. 조사단은 2차 폭발 지점 2m 앞까지 접근했고, 1차 폭발 지점은 거기서 2m 더 떨어져 있다. [사진=합동참모본부] 2026.09.29 gomsi@newspim.com ◆1차 폭발 뒤 전우 구하다 2차 폭발…GP 집음기에 58초 간격 폭발음 = 이날 합참은 사고 경위도 처음으로 자세히 공개했다. 이번 작전은 북한군의 지뢰 매설 추정 지역을 유엔사와 함께 조사하기 위해 새 수색로를 여는 작전이었다. 수색대대장 등 18명은 GOP 철책에서 소형 전술차량과 산악 바이크로 추진철책 소통문까지 이동한 뒤, 기존 수색로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이어 MDL 방향으로 수십 년간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 수풀 지대를 공병 요원이 앞장서 탐지와 예초를 번갈아 하며 약 200m 전진했다. 18명 가운데 9명은 탐지조·지휘조·작전지원조로 앞에 섰고, 나머지 9명은 20~100여m 뒤에서 통신, 후방 경계, 의무 지원을 맡았다. MDL에 근접했다고 판단한 대대장이 철수를 결심했고, 철수를 준비하던 공병 요원이 왼발을 내딛는 순간 1차 폭발이 일어났다. 주변 3명이 동시에 쓰러졌고, 수색 요원이 화구에 빠진 요원을 끌어내던 중 2차 폭발이 이어졌다. "괜찮아?"라고 외치며 달려가던 대대장이 쓰러졌다. 대대장은 왼쪽 발목에 심한 부상을, 오른쪽 허벅지 등에 파편상을 입었다. 서 있던 정보참모는 얼굴 등에 파편상을 입었고, 1m 옆에 웅크리고 있던 수색 요원은 다치지 않았다. 지난 21일 육군 25사단 지역 DMZ 지뢰 폭발 사고 직후, 메디온 의무후송헬기에서 하강한 응급구조사가 중상을 입은 수색대대장을 호이스트에 결속하고 있다. 장병들은 폭발 직후 지혈 조치를 한 뒤 수색대대장을 2인 1조로 안고 옮기다가 들것으로 교대해 가며 약 200m 떨어진 호이스트 지점까지 후송했다. [사진=합동참모본부] 2026.09.29 gomsi@newspim.com GOP 대대는 오전 10시 59분 의무사령부 의료종합상황센터에 지원을 요청했다. 메디온 의무후송헬기 3대가 차례로 출동했다. 합참의 요청에 유엔사는 11시 38분 DMZ 진입을 승인했고, 헬기는 11시 40분쯤 진입했다. 장병들은 대대장을 2인 1조로 안고 옮기다가 들것으로 교대해 가며 약 200m 떨어진 호이스트 지점까지 후송했다. 대대장과 공병 중사는 호이스트로 각각 헬기에 올라 국군수도병원으로 옮겨졌고, 나머지 인원도 모두 헬기 2대로 후송돼 정밀검진을 받았다. 18명 중 15명은 퇴원했고 중상자 2명과 경상자 1명은 입원 중이다. 대대장의 지뢰 덧신 착용 여부에 대해 합참 관계자는 "일부는 착용하고 있었다고 진술했다"면서도 "조사 중인 사안이라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대대장은 중환자실에 있어 아직 면담하지 못했다. 지난 21일 육군 25사단 지역 DMZ 지뢰 폭발 사고로 중상을 입은 수색대대장이 호이스트에 결속된 채 메디온 의무후송헬기로 끌어올려지고 있다(흰색 원). 수색대대장은 첫 번째 헬기에, 부상한 공병 중사는 두 번째 헬기에 태워져 국군수도병원으로 옮겨졌다. 현장에 하강한 응급구조사는 "수색 요원들의 신속한 응급처치가 출혈을 최소화해 더 큰 피해를 막았다"고 진술했다. [사진=합동참모본부] 2026.09.29 gomsi@newspim.com ◆"고의 지연 없었다"…매설 시점·고의성 판단은 유보 = 현장조사 지연 논란에 대해 합참 관계자는 "축소·은폐, 북한 눈치 보기, 상부 지시 같은 의혹은 일절 사실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현장 안내를 맡을 작전 병력이 모두 입원해 있었고, 1군단장이 직무배제된 상황이었다는 설명이다. 22일 합참의장 주관 상황평가에서 군단장 직무대리가 29일 투입을 건의했고, 의장은 이를 승인하면서 앞당길 방안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25일 의장이 25사단을 방문했을 때 직무대리가 "제한 사항이 해소돼 더 일찍 들어갈 수 있다"고 건의해 일정이 27일로 당겨졌다고 합참은 밝혔다. 안내를 맡은 수색중대장, 공병중대장, 공병 중사 3명은 23일 퇴원했다. MDL에서 10여m까지 접근한 경위도 논란이다. 합참 관계자는 "최초 계획 경로의 개척이 어려워 대대장이 더 양호한 지역으로 판단한 곳으로 갔다는 중대장 진술이 있지만, 대대장에게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고 했다. 사고 초기 '수십m 떨어진 곳'이라고 알린 데 대해서는 "통신 난청 지역이라 위치를 찍은 지점과 차이가 있었고 GPS 오차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다족보행로봇 등 무인장비는 시험해 봤지만 덩굴과 급경사 때문에 기동이 어려워 투입하지 않았다. 북한군의 지형 변화는 지난해 9월 위성영상으로 처음 식별됐다. 작업 시기는 지난해 8~11월로 추정되지만, 북한군 병력의 활동이 직접 포착되지는 않았다. 매설 시점에 대해 합참 관계자는 "당시 표시한 흔적보다 바깥에 있어 과거에 매설한 지뢰일 가능성도 있다"며 "양면성이 있다"고 했다. 고의성 판단도 유보했다. 합참 관계자는 "2015년 목함지뢰 도발은 우리 장병이 매일 드나드는 통문 앞뒤에 심은 것이어서 의도가 명확했다"며 "이번 지역은 50여 년간 사실상 가지 않은 곳이라 아군 병력을 노렸다고 보기에는 제한이 있다"고 말했다. 2015년 8월 10일 북한군 목함지뢰 도발 현장인 경기 파주 서부전선 GP 추진철책 통문에서 국방부 출입기자들이 취재하고 있다. 당시 한·유엔사 합동조사단은 현장에서 철제 용수철·공이 등 잔해물 43점을 수거해 북한군 목함지뢰 3발이 의도적으로 매설된 것으로 결론 냈다. 폭발 지점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는 경사지라 떠내려온 지뢰일 가능성도 배제됐다. [사진= 국방일보] 2026.09.29 gomsi@newspim.com MDL에 대해서도 "1292개 표지판이 촘촘히 있는 것이 아니어서 남북 간, 유엔사와도 인식 차이가 있다"며 "북한이 자기 땅으로 여겨 매설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군은 유엔사와 MDL 기준선을 일치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군은 사고 이후 DMZ 2단계 수색로 개척 작전을 잠정 중단하고 원점에서 재평가하고 있다. 대응 수위에 대해 양 작전부장은 "최종조사 결과가 나오는 대로 합참은 군사적으로, 국방부는 정책적으로 모든 옵션을 올려놓고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gomsi@newspim.com 2026-09-29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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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공개] 靑 신규 참모 6명 재산공개 [서울=뉴스핌] 김미경 기자 = 올해 6월 21일 임명된 청와대 신규 참모 가운데 박지영 사법제도비서관이 92억여 원을 신고해 재산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본인·배우자 명의로 주택 2채 이상을 보유한 다주택자는 김경자 사회수석비서관 1명이었다.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가 29일 관보에 게재한 9월 수시 재산등록사항을 살펴보면 대통령비서실과 국가안보실 신규 재산공개 대상자 6명 중 박 비서관이 92억1772만 원으로 재산이 가장 많았다. 이어 성기홍 홍보소통수석비서관이 86억6347만 원, 한찬식 민정수석비서관이 58억6067만 원으로 뒤를 이었다. 강건작 국가안보실 제1차장은 10억4150만 원, 김태근 자치발전비서관은 5억5398만 원, 김경자 수석은 5억748만 원을 신고했다. 청와대 전경 [사진=뉴스핌 DB] ◆ 김경자 수석, 성남 태평동에 아파트·다가구주택 보유 본인과 배우자가 소유권을 가진 주택을 기준으로 다주택 여부를 판단하면 신규 참모 중 다주택자는 김 수석뿐이다. 김 수석은 경기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 선경태평아파트(35.51㎡·1억6700만 원)와 같은 지역의 다가구주택(59.91㎡·2억2200만 원)을 본인 명의로 신고했다. 두 주택에는 임대보증금 채무가 각각 1000만 원, 1466만 원 잡혀 있다. 김 수석은 예금 8474만원을 신고했다. 임대보증금과 은행 대출을 합친 채무는 1억7502만원이었다. ◆ 박지영 비서관, 반포자이 부부 공동명의…임대보증금 29억5000만원 박 비서관은 서울 서초구 반포동 반포자이 아파트(165.45㎡)를 본인(132.39㎡)과 배우자(33.06㎡) 지분으로 나눠 신고했다. 신고가액은 본인 지분 36억6400만 원, 배우자 지분 9억1600만 원으로 모두 45억8000만 원이다. 이 아파트에 걸린 임대보증금 29억5000만 원은 채무로 올렸다. 박 비서관은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 센트럴파크 아파트 전세권(114.50㎡·21억3000만 원)도 신고했다. 배우자는 전북 군산·김제·완주 일대 밭과 임야 지분 1억2779만 원어치를 보유했다. 금융자산 규모도 컸다. 박 비서관 일가의 예금은 28억5785만 원, 증권은 24억440만 원이었다. 박 비서관 본인은 한국전력 3853주, 한화오션 1371주, 삼성전자 422주 등 상장주식 8억9937만 원어치를 신고했다. 배우자는 LS 일렉트릭 1321주, 이수페타시스 1750주, 한국전력 5030주 등 13억1834만 원어치를 보유했다. ◆ 성기홍 수석, 대치우성 부부 공동 39억 성 수석은 서울 강남구 대치동 대치우성 아파트(125.17㎡)를 배우자와 절반씩 나눠 보유했다. 지분별 신고가액은 각 19억5000만 원으로, 모두 39억 원이다. 본인·배우자 기준으로는 1주택자다. 성 수석 일가의 예금은 14억1605만 원, 증권은 13억6567만 원으로 집계됐다. 성 수석 본인은 삼성전자 2194주와 SK하이닉스 6주, 달바글로벌 192주 등 상장주식 8억3159만 원어치를 신고했다. 연합인포맥스 비상장주식 248주(4162만 원)도 갖고 있다. 배우자는 미국 국채 등 채권과 마이크로소프트·엔비디아·브로드컴 등 해외 주식을 보유했다. 성 수석은 비트코인 0.74개(7187만 원)도 신고했다.  ◆ 한찬식 수석, 서초 아파트분양권·강남 아파트 전세권 보유…채무 10억 한찬식 수석은 소유권을 가진 주택 없이 서울 서초구 신반포로 '디에이치 클래스트' 아파트 분양권(130.96㎡·25억5665만 원)을 신고했다. 서울 강남구 개포동 현대2차아파트 전세권(165.08㎡·12억 원)도 함께 올렸다. 한 수석의 배우자는 경기 부천시 소사구 괴안동 근린생활시설 지분(14억6559만 원)과 경남 산청군 임야(1억4410만 원)를 보유했다. 장남·장녀·차녀는 경기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임야 지분을 각각 1307만 원어치씩 신고했다. 한 수석은 농협은행 9억 원을 포함해 금융채무 9억5178만 원을 신고했다. 가족 전체 채무는 10억350만 원이었다. 한 수석 본인은 반얀트리클럽 앤 스파 서울 회원권(1억5000만 원)을, 배우자는 서울클럽 회원권(5000만 원)을 보유했다. ◆ 강건작 1차장·김태근 비서관, 1주택 강 1차장은 서울 은평구 불광동 메트로타워 아파트(104.49㎡)를 배우자와 공동명의로 보유했다. 지분 가액을 합치면 8억9000만 원이다. 강 1차장은 예금 2억340만 원, 채무 7155만 원을 신고했다. 김 비서관은 울산 중구 태화동 일신아파트(59.84㎡·1억1300만 원) 1채를 본인 명의로 신고했다. 김 비서관 일가는 예금 2억2180만 원, 증권 2억1887만 원을 보유했다. 배우자는 로킷헬스케어 1260주와 삼성전자 200주, 삼양식품 26주 등을 신고했다. 박 비서관은 모친, 김 비서관과 강 1차장은 장남에 대해 독립생계유지 등을 이유로 재산 고지를 거부했다. the13ook@newspim.com 2026-09-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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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이 내용에 포함된 데이터와 의견은 뉴스핌 AI가 분석한 결과입니다. 정보 제공 목적으로만 작성되었으며, 특정 종목 매매를 권유하지 않습니다. 투자 판단 및 결과에 대한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주식 투자는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으므로, 투자 전 충분한 조사와 전문가 상담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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