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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혁 교수의 정치분석] ③의회 속기록으로 본 바이마르 민주주의 후퇴의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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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연재에서 다루는 1차 자료는 독일 의회 속기록이다. 분석의 기본 접근은 의회 담론을 코퍼스(corpus)로 보는 방식이다. 코퍼스란 일정한 원칙으로 수집된 텍스트 집합을 뜻한다. 정치언어학과 정치담론분석 분야에서 코퍼스는 중요한 자료 수집의 형태로 사용된다. 정치가 언어의 표출과 소통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할 때, 언어의 반복 패턴은 정치의 구조를 보여주는 데이터가 된다. 칠턴이 정치 담론을 권력, 정체성, 현실 구성의 메커니즘으로 분석해 온 연구 전통은 바로 이러한 관점의 확장 위에 있다(Chilton 2004). 바이마르 의회 속기록은 그 전통을 역사 연구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게 해주는 대표적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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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로는 슈테노그라피셰 베리히테(Stenographische Berichte, 속기보고서)라고 부르는 이 기록은 본회의장에서 누가 언제 어떤 내용으로 발언했는지, 어떤 야유와 박수가 터졌는지, 발언 중단과 정정이 어떻게 일어났는지까지 상세하게 보여준다. 특히 괄호 속 표현, 예컨대 박수, 야유, 웃음, 고성, 항의, 발언 방해 같은 반응은 문장 자체만큼이나 의사당 내의 현장 분위기와 질서 상태를 생생하게 묘사하여 연출해 낸다. 이러한 기록은 바이에른 주립도서관(Bayerische Staatsbibliothek) 디지털화 사업과 독일 의회 속기록 포털 라이히스타크프로토콜레(Reichstagsprotokolle)에서 체계적으로 접근 가능해졌고, 1867~1942년 구간의 방대한 분량이 디지털로 제공된다는 점 자체가 비교민주주의 연구 방법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계기가 되었다.

첫 장면은 1919년 2월 6일이다. 바이마르의 국민의회(Deutsche Nationalversammlung, 제헌의회) 제1회기 제1차 본회의, 장소는 베를린이 아니라 바이마르의 국립극장(Weimar, Deutsches Nationaltheater)이다. 제국 수도 베를린을 떠나야 했던 사실 자체가 이미 정치의 불안정성을 말해 준다. 그날 단상에 선 사람은 제국대통령이 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Friedrich Ebert, SPD)다. 그는 전쟁 패배 직후의 사회를 하나로 묶는 언어를 선택한다. 기록은 개회, 의장단 구성, 선서, 절차의 확인을 이어가며, 연설은 분열의 상처를 봉합하려는 어조로 흐른다. 이 첫 본회의 속기록은 위키미디어 공용(Wikimedia Commons)에 공개된 원문 스캔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연설의 미학이 아니라 연설이 전제하고 있는 청중의 지위다. 민주주의 언어가 건강할 때, 정치인은 시민을 판단 가능한 주체로 취급한다. 이 지점은 저자가 개발한 Civic Persuasion Score 15, 즉 CPS-15가 측정하려는 핵심과 맞닿는다. CPS-15는 설득의 구조를 기술적으로만 보지 않고, 설득이 시민의 자율성과 숙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하는지를 묻는다. 같은 말재주라도 시민을 도구로 만들면 점수는 떨어지는 방식이다. DRHI 6, 즉 민주주의 수사 건강지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말이 다원적 소속을 인정하는지, 갈등을 완화하는지, 법과 제도에 정당성을 기대는지, 진실과 증거를 존중하는지, 상실을 통합하고 화해의 기억을 만드는지, 시민을 판단의 동반자로 세우는지를 묻는다. 이 틀은 하버마스적 규범뿐 아니라, 언어가 현실을 구성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설(John Searle)의 언어행위론의 통찰과도 연결된다. 발언은 단지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하고 위협하고 배제하며 제도를 사실로 만들어버리는 사회적 행위다(Searle 1969; Searle 1995).

바이마르의 비극은 1919년의 첫 장면이 곧바로 1931년의 마지막 장면으로 곤두박질친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변화는 세 구간으로 나누어 보면 더 선명해진다. 첫째, 1918~1923년은 탄생과 혁명, 패전 책임, 폭력의 정치가 한꺼번에 충돌한 시기다. 둘째, 1924~1928년은 안정의 환상이 잠시 작동한 시기다. 셋째, 1929~1931년은 경제 붕괴와 함께 언어가 급격히 경직되고 공격화되는 시기다. 문제는 이 구분이 정치사적 구분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의회 언어는 이 구간을 따라 어휘의 중심축을 이동시킨다. 초기에는 헌법, 질서, 재건, 책임, 절차가 반복되다가, 후기로 갈수록 배신, 수치, 기생, 처단, 내부의 적 같은 단어가 토론의 중추로 올라온다. 코젤렉(Reinhart Koselleck)이 말한 언어개념사(Begriffsgeschichte)의 개념으로 보면, 위기의 시대에는 단어가 단어 이상의 힘을 얻는다. 말은 사건을 설명하기보다 사건의 지평을 규정하고, 가능해 보이는 선택지를 바꿔버린다(Koselleck 1979). 의회에서 특정 어휘가 일상화되는 순간, 정치가 허용하는 폭력의 범위도 넓어진다.

바이마르 의회 언어가 변질되는 과정을 가장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민주주의가 막 태어난 직후의 제헌의회 속기록에서 발견된다. 아직 공화국이라는 말조차 낯설던 시기, 토론 규범은 헌법보다 먼저 시험대에 올랐다.

바이마르 의회 [사진=Bundesarchiv, Wikimedia Commons]

1919년 2월 25일 오후, 바이마르에 모인 독일 국민의회(Deutsche Nationalversammlung)는 제15차 본회의를 열고 있었다. 회의 안건은 전쟁 책임 문제와 군의 명예, 그리고 혁명 이후 국가의 정당성이었다. 제국이 무너진 지 석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고, 의회 안에는 패전의 상처와 혁명의 열기가 동시에 남아 있었다. 속기록에는 회의 초반부터 "불안정한 분위기"라는 표현이 반복된다.

이날 단상에 먼저 오른 이는 독일국민당(DNVP) 소속의 막스 배제케(Max Baesecke)였다. 그는 비교적 차분한 어조로 발언을 시작한다. 전쟁의 책임을 군 전체에 묻는 것은 역사적 부당함이며, 혁명의 언어로 제국의 명예를 지우려는 시도는 국가의 근간을 흔든다는 주장이다. 발언 초반, 속기록의 괄호는 짧다.

(동의의 표시.)

그러나 몇 문장이 지나면서 배제케의 어조는 서서히 변한다. 그는 더 이상 정책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던진다. 누가 이 전쟁을 배신했는가. 누가 조국을 약화시켰는가. 이때부터 속기록의 괄호가 길어진다.

(야유.)

이 야유는 반론의 시작이 아니다. 발언의 자격 자체를 흔드는 소음이다. 배제케는 멈추지 않는다. 그는 혁명 세력을 가리켜 국가를 내부에서 붕괴시킨 집단으로 지칭한다. 말의 방향이 정책에서 인격으로, 판단에서 낙인으로 이동하는 순간이다.

곧이어 독립사회민주당(USPD)의 알프레트 헹케(Alfred Henke)가 단상에 오른다. 그는 배제케의 발언을 "군국주의적 자기기만"이라고 규정하며 맞선다. 혁명은 배신이 아니라 불가피한 역사적 귀결이었고, 구체제의 책임을 회피하는 언어야말로 독일을 파멸로 이끈 원인이라는 주장이다. 그의 문장 역시 점점 단정적으로 바뀐다. 상대의 논리를 해체하기보다 상대의 도덕적 위치를 공격한다.

(웃음. 야유.)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옳았는가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순간 토론의 규칙이 눈에 띄지 않게 이탈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두 연설자는 더 이상 서로를 설득의 대상으로 다루지 않는다. 상대는 반박해야 할 시민이 아니라 배제해야 할 존재로 호명된다. 논증은 논증으로 끝나지 않고, 사람의 자격을 문제 삼는 방식으로 마무리된다.

이날 배제케가 선택한 논법의 핵심은 인신공격(ad hominem)이다. 인신공격은 상대의 주장 내용을 반박하는 대신, 주장자를 도덕적으로 불신할 만한 존재로 규정해 논증 자체를 무효화하는 방식이다. 논리학적으로는 논증의 결함을 겨냥하지 않기 때문에 오류에 속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강력하다. 상대를 시민적 동료가 아니라 공동체 밖의 인물로 밀어내며, 청중이 더 이상 상대의 논증을 '듣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설의 언어행위론으로 말하면, 이 공격은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지위를 재분류하는 선언적 행위다. 상대는 이제 토론의 파트너가 아니라 도덕적 피고가 된다(Searle 1969). 이 순간 의회는 숙의의 장에서 재판정의 분위기로 바뀐다.

인신공격은 거의 언제나 허수아비 공격(strawman)과 결합한다. 허수아비 공격은 상대가 실제로 주장한 내용을 정직하게 재현하지 않고, 더 쉽게 공격 가능한 약한 버전으로 바꾼 뒤 그 버전을 무너뜨리는 방식이다. 이때 토론의 목적은 합의 가능한 대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상대 진영을 '원래부터 반국가적' 혹은 '본질적으로 배신적'이라는 도식에 가둬버리는 데 있다. 이 논법의 정치사적 의미는 이견을 정책 차이가 아니라 정체성의 결함으로 바꾼다는 점이다. 스키너가 강조한 것처럼 정치 언어는 단지 의견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행위를 수행한다(Skinner 1969). 허수아비 공격은 반대의견을 반대의견으로 존재할 수 없게 만드는 행위다. 야당의 발언권은 제도적으로 남아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정당성을 상실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이 논점일탈(red herring)이다. 논점일탈은 질문의 핵심을 피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대화를 이동시켜 청중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판단을 흐리게 하는 방식이다. 의회에서 논점일탈은 단순히 토론을 지연시키는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책임을 흐리게 하고, 정책의 타당성 평가 자체를 어렵게 만든다. 페어클러프가 말한 담론의 권력성은 바로 이런 곳에서 드러난다. 어떤 쟁점이 중심 의제로 유지되는가, 어떤 언어가 반복되며 공적 상식으로 굳는가가 권력의 작동 방식이기 때문이다(Fairclough 1995). 논점일탈이 반복될수록 의회는 정책검증 기구가 아니라 감정 동원 무대가 된다.

그리고 바이마르의 위험한 전환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위협의 논증(ad baculum)이다. 이는 '납득'이 아니라 '복종'을 목표로 하는 설득 방식이다. 논증이 결론을 정당화하는 대신,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불이익이 온다는 공포를 근거로 삼는다. 민주주의에서 정당성은 이유에 의해 지지받아야 하지만, 위협의 논증은 이유를 공포로 대체한다. 하버마스의 개념으로 보면, 이것은 소통행위가 전략행위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상대를 설득하는 대신 제압하려 하고, 공적 정당화의 규범은 붕괴한다(Habermas 1984). 정치사적으로 이 변화는 결정적이다. 이유의 경쟁이 사라진 자리에 폭력 가능성의 암시가 들어오면, 민주주의는 제도적으로 유지되어도 언어적 토대는 이미 무너진다.

AI 이미지.

이 네 가지 오류는 단지 논리학의 목록이 아니다. 바이마르에서는 이 오류들이 하나의 목적적 방향을 갖고 결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인신공격은 상대를 공동체에서 밀어내고, 허수아비 공격은 이견을 배신으로 재구성하며, 논점일탈은 정책 평가의 기준을 흐리고, 위협의 논증은 공포를 정당성의 대체물로 만든다. 이 결합이 반복되면 무엇이 발생하는가. 첫째, 상대는 토론의 파트너가 아니라 제거의 대상이 된다. 둘째, 시민은 판단의 주체가 아니라 분노와 공포에 반응하는 군중으로 호출된다. 셋째, 의회는 합리적 정당화의 장이 아니라 적대적 동원의 현장이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레비츠키와 지블랫이 지적한 민주주의 후퇴의 징후인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가 동시에 붕괴한다(Levitsky and Ziblatt 2023). 그리고 그 붕괴는 법률 개정이나 계엄보다 먼저 의회의 호명 방식에서 시작된다.

이 변화는 괄호 속에서도 더 분명해진다. 속기록은 발언의 내용뿐 아니라 방해의 밀도와 반응의 폭력성을 기록한다. 초기에 괄호는 주로 박수, 동의, 질서 요청 같은 절차적 표식으로 기능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괄호 안의 표현은 점차 고성과 조롱, 야유, 발언 중단 등 난장판의 기록으로 채워진다. 페어클러프(Norman Fairclough)의 비판적 담론분석이 강조하듯, 담론은 권력관계를 반영할 뿐 아니라 재생산한다(Fairclough 1992). 의회가 발언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해도 언어의 습관이 상대를 말할 자격 없는 존재로 만들기 시작하면 제도는 껍데기로 남는다. 스키너(Quentin Skinner)가 고전 텍스트 해석에서 강조한 맥락주의는 여기서 방법론적 지침이 된다. 같은 문장도 어떤 정치적 게임 속에서 어떤 의도로 발화되었는지를 보지 않으면 우리는 언어의 기능을 놓친다(Skinner 1969). 바이마르의 속기록은 바로 그 게임의 규칙이 바뀌는 순간을 날것으로 보여준다.

1929년의 의회 토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영 플랜(Young-Plan)이 무엇이었는지를 짚지 않을 수 없다. 이 계획은 단순한 재정 협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패전국 독일이 전쟁 이후의 국제 질서 속에서 어떤 국가로 살아남을 것인가를 둘러싼 정치적 시험대였다.

영 플랜은 1924년의 도스 플랜(Dawes-Plan)을 대체하기 위해 제안된 전쟁 배상 재조정안이었다. 도스 플랜이 미국 자본 유입을 통해 단기적 안정을 도모했다면, 영 플랜은 배상 총액과 지급 구조를 장기적으로 확정하려는 시도였다. 총액은 감축되었지만 지급 의무는 1980년대까지 이어지는 형태였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신뢰를 회복하고 외교적 고립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것이 당시 연정 정부와 중도 세력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곧바로 정치적 상징으로 변했다. 우파 민족주의 세력에게 영 플랜은 경제적 타협이 아니라 패전의 영구화이자 국가 주권의 포기였다. 배상 문제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명예와 굴욕의 문제로 재구성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의회 언어는 정책 논쟁의 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1929년 7월, 라이히스타크(Reichstag) 본회의. 안건은 영 플랜 비준 문제였다. 회의 초반부터 속기록에는 소음과 야유가 잦다는 표시가 반복된다. 이날 단상에 오른 인물 가운데 하나는 독일국민당(Deutschnationale Volkspartei, DNVP) 소속 의원으로, 알프레트 후겐베르크(Alfred Hugenberg)가 이끄는 민족주의 진영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는 배상 조건의 세부 항목을 설명하지 않는다. 발언의 첫 문장에서 이미 방향을 제시한다. 영 플랜에 찬성하는 것은 외교적 현실주의가 아니라 독일 국가에 대한 배신이라는 규정이다. 이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속기록에는 반응이 기록된다.

(박수.)

이 박수는 같은 진영에서 터져 나온다. 그는 말을 이어가며 영 플랜에 동의하는 정당과 정치인들을 하나의 범주로 묶는다. 국제 금융 자본과 결탁해 독일을 묶어 두려는 세력이라는 규정이다. 정책의 효과를 논하지 않고 동기를 단정하는 방식이다. 이 표현이 등장하자 반대편에서 즉각 반응이 나온다.

(야유.)

그러나 야유는 반박의 시작이 아니다. 발언을 끝까지 들을 필요가 없다는 집단적 신호에 가깝다. 후겐베르크 진영의 의원은 멈추지 않는다. 그는 타협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한다. 타협은 현실적 선택이 아니라 국가를 약화시키는 행위라는 주장이다. 이 지점에서 속기록의 괄호는 길어진다.

(격렬한 야유. 웃음.)

곧이어 사회민주당(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SPD) 소속 의원이 반론을 위해 단상에 오른다. 그는 영 플랜이 최선의 선택은 아니지만 국제적 고립과 경제 붕괴를 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정이라고 설명하려 한다. 그는 실업률과 재정 수치를 언급하며 논증을 구성하려 한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여러 차례 끊긴다.

(야유.) (고성.)

그가 문장을 완성하려 할 때마다 소음이 커진다. 정책 설명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한다. 반대편에서는 그의 논증을 반박하지 않는다. 대신 그의 발언 동기를 문제 삼는다. 그는 국민을 대표하지 않는 엘리트라는 낙인이 던져진다. 질문은 던져지지만 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미 판단은 내려져 있다.

이 시점에서 의회는 더 이상 정책을 설계하는 공간이 아니다. 영 플랜을 둘러싼 논쟁은 타협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토론이 아니라, 누가 애국자이고 누가 배신자인지를 가르는 의식에 가까워진다. 다원적 소속을 인정하던 언어는 빠르게 사라지고 갈등을 완화하려는 표현은 조롱의 대상이 된다. 법과 제도는 신뢰의 근거가 아니라 공격의 표적이 된다.

독일역사박물관(Deutsches Historisches Museum)과 바이에른 지역 역사 사전이 이 시기를 우파 민족주의 동원이 급격히 강화된 전환점으로 정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 플랜 자체가 민주주의를 무너뜨린 정책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을 둘러싼 의회 언어는 민주주의의 설득 구조를 빠르게 침식시켰다. 증거와 조건부 판단 대신 확언과 조롱이 늘어났고, 반대자는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배제의 대상으로 호명되었다.

이 변화는 전체주의가 갑자기 출현하는 과정이 아니라 현실을 함께 판단하는 능력이 서서히 붕괴되는 과정이었다. 사실과 의견의 경계가 흐려지고 정치적 논쟁이 진위의 문제에서 충성의 문제로 이동한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전체주의의 전제 조건으로 지적한 현실감각의 붕괴는 바로 이런 언어적 전환 속에서 진행된다(Arendt 1951).

1929년의 라이히스타크는 여전히 존재했다. 헌법도, 규칙도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속기록에 남은 문장과 괄호를 따라가다 보면, 민주주의를 떠받치던 언어의 토대는 이미 크게 훼손되어 있었다. 영 플랜 논쟁은 그 전환이 가장 또렷하게 드러난 장면 가운데 하나였다.

아돌프 히틀러. [사진=독일 연방 아카이브(Bundesarchiv)·위키미디어 공용]

독자들이 특히 궁금해하는 질문이 하나 있다. 히틀러(Adolf Hitler)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독일 의회에서 의원으로서 본회의 단상에 서서 연설한 장면이 실제로 남아 있는가 하는 문제다. 결론부터 말하면 바이마르 의회 속기록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소란, 고성, 공격적 언어의 상당 부분은 나치당(NSDAP)과 공산당(KPD) 의원들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히틀러 개인이 본회의 단상의 핵심 연설자로 등장한 흔적은 없다. 아니, 존재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1932년 2월에야 독일 시민권을 취득했으며, 그 이전에는 독일의회 선거 출마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후 나치당이 의회 내에서 대규모 의원단을 형성한 뒤에도 의회 내부의 언어적 공세와 전술적 충돌의 전면에는 히틀러가 아니라 다른 당 인물들이 나섰다는 점이 정치사 연구에서 반복적으로 지적되어 왔다(Evans 2003; Mommsen 1996).

특히 연구자들이 주목해 온 인물은 괴벨스(Joseph Goebbels)와 프리크(Wilhelm Frick)다. 괴벨스의 경우, 그의 의회 전략은 단순한 개인적 선동이 아니라 나치당의 조직적 전술로 분석되어 왔다. 리처드 에번스(Richard J. Evans)는 나치당이 의회를 민주적 숙의의 장으로 인식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체제의 무능과 분열을 과시하기 위한 무대로 활용했다고 분석한다(Evans 2003). 괴벨스가 1928년 무렵 "우리는 의회에 들어가 민주주의의 무기를 이용해 민주주의를 파괴할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점은 이후 여러 정치사·전체주의 연구에서 나치 의회 전략의 자기 진술로 반복 인용된다(Mommsen 1996; Kershaw 1998). 이 발언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나치가 의회 발언을 정책 설득이 아니라 정당성 훼손과 체제 마비의 도구로 이해했음을 보여주는 핵심 자료로 취급된다.

프리크의 역할은 보다 제도적 차원에서 분석된다. 디트리히 오를로프(Dietrich Orlow)와 한스 몸젠(Hans Mommsen)은 프리크를 나치당 내에서 의회 규칙과 행정 절차를 가장 잘 이해하고 활용한 인물로 평가한다(Mommsen 1996; Orlow 1969). 프리크는 본회의 발언뿐 아니라 의사진행 발언, 규칙 해석을 둘러싼 이의 제기, 반복적 동의·반대 표명 등을 통해 회기 자체를 지연시키고 토론을 교착 상태로 몰아넣는 전술을 구사했다. 이러한 행동은 단순한 소란이 아니라 의회의 기능적 신뢰를 지속적으로 약화시키는 전략으로 작동했다. 최근의 비교민주주의 연구 역시 나치가 의회 절차를 의도적으로 과부하 상태로 만들어 민주적 결정 능력을 마비시키려 했다는 점을 강조한다(Müller 2016).

이와 같은 나치 의원들의 조직적 언어 전략은 의회 밖의 거리 폭력과 선전 정치와 결합해 더욱 큰 효과를 발휘했다. 이 점에서 나치의 의회 언어는 독립된 현상이 아니라 선전·폭력·제도 교란이 결합된 복합 전략의 일부로 이해된다(Eatwell 2003). 연구자들은 이를 '내부로부터의 민주주의 잠식'으로 규정하며, 민주주의 제도를 전면 부정하기 이전에 먼저 그 작동 규범을 붕괴시키는 단계로 해석한다(Levitsky and Ziblatt 2023). 의회는 여전히 열렸고 발언은 계속되었지만, 그 언어는 점점 설득을 포기하고 조롱과 위협, 도덕적 배제의 문법으로 이동했다.

나치의 의회 전략은 특정 지도자의 연설 능력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의원단 전체가 공유한 공격적 언어 사용과 의도적 충돌의 정치에 의해 구현되었다. 따라서 히틀러의 정치 언어를 평가할 때는 바이마르 의회 속기록에 남아 있는 발언만으로 판단할 수 없으며, 그의 대중 연설과 선전 담론, 그리고 1933년 이후 정부 수반으로서 행사한 제도적 발언을 별도로 분석해야 한다. 이 구분은 단순한 방법론적 선택이 아니라 언어행위가 수행되는 제도적 위치에 따라 그 정치적 효과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는 점에서 분석 윤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언어는 말해진 내용뿐 아니라 누가 어떤 권한을 가지고 말하는가에 따라 정치 현실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더욱 명료해진다(Searle 1969).

그럼에도 히틀러의 그림자는 의회 속기록에 점점 더 짙게 드리운다. 역설적으로 그가 단상에 서지 않아도 그의 이름은 상대를 공격하는 호명으로, 위협의 배경음으로, 그리고 어떤 결정을 미루게 만드는 공포의 계기로 등장한다. 푸코(Michel Foucault)가 권력은 말해지는 내용뿐 아니라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있는 자의 질서를 통해 작동한다고 했을 때(Foucault 1971), 바이마르의 의회는 바로 그 질서가 재배열되는 장면을 보여준다. 누군가의 발언이 반박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의 대상으로 취급되는 순간, 토론의 공간은 더 이상 민주주의의 심장이 아니다.

이 연재에서 저자는 정량 연구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수치를 앞세우지 않으려 한다. CPS-15와 DRHI는 결국 인간의 언어를 계량으로 번역하는 도구이지만, 그 번역이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먼저 독자가 현장의 감각을 충분히 공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방향은 분명하다. 1918년부터 1923년까지의 구간에서 CPS-15와 DRHI가 흔들리는 핵심 원인은 혁명과 정치적 폭력의 후폭풍 속에서도 절차와 제도를 붙잡으려는 언어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의회 언어는 공격과 설명, 낙인과 정당화가 불안정하게 공존하는 상태였다.

1924년부터 1928년으로 넘어가면 상황은 달라진다. 경제적 안정과 국제적 고립 완화 속에서 의회 언어는 일시적으로 안정을 회복한다. 발언은 다시 길어지고 토론은 정책 조정과 제도 개선으로 이동한다. 이 시기에는 CPS-15와 DRHI가 반등할 수 있는 언어적 조건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 회복은 구조적이라기보다 표면적이다. 이전 국면에서 도입된 공격의 어휘와 조롱의 문법은 사라지지 않은 채 잠복해 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1929년 이후다. 세계대공황의 충격과 함께 공격의 어휘가 의회 토론의 중심으로 이동한다. 이 시점에서 DRHI는 특히 급격히 하락하는 임계점에 도달한다. 설득의 질이 나빠진다는 것은 단순히 말이 거칠어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상대를 더 이상 시민 공동체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언어가 재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가 붕괴되는 순간 민주주의의 규범적 토대 역시 함께 훼손된다(Levitsky and Ziblatt 2023; Habermas 1984).

다음 칼럼에서는 이 전환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어떤 정치적 언어가 반복되었는지, 그리고 속기록의 괄호 안에 기록된 야유, 고성, 의사진행 방해와 같은 방식으로 토론을 어떻게 중단시키고 변질시켰는지를 가능한 한 현장에 가깝게 재구성해 보고자 한다. 이어서 CPS-15와 DRHI의 항목에 하나씩 대조하며, 민주주의의 붕괴가 어떻게 말의 질 변화로 예고되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민주주의의 붕괴는 생각보다 조용하게 시작된다. 법률이 바뀌기 전에, 내각이 무너지기 전에, 먼저 연설의 질이 변한다. 그 문장의 변색은 가장 먼저 의회 속기록에 역사적 증거로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록을 통해 붕괴가 시작된 정확한 시점을 되짚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최연혁 스웨덴 린네대학교 교수. [사진=뉴스핌 DB]

(시리즈 마지막 부분에 참조문헌을 제공할 예정이지만, 각 부분별 자료도 먼저 제시하고자 한다. 학자, 대학원생, 연구에 관심 있는 일반 독자들도 활용했으면 한다.)

*참조문헌 (APA 7th 형식)

Arendt, H. (1951).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Harcourt, Brace & Company.
Chilton, P. (2004). Analysing political discourse: Theory and practice. Routledge.
Eatwell, R. (2003). Fascism: A history. Pimlico.
Evans, R. J. (2003). The coming of the Third Reich. Penguin Books.
Fairclough, N. (1992). Discourse and social change. Polity Press.
Fairclough, N. (1995). Critical discourse analysis: The critical study of language. Longman.
Habermas, J. (1976). Legitimation crisis (T. McCarthy, Trans.). Beacon Press. (Original work published 1973)
Habermas, J. (1984). The 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 Volume 1: Reason and the rationalization of society (T. McCarthy, Trans.). Beacon Press. (Original work published 1981)
Iyengar, S., & Westwood, S. J. (2015). Fear and loathing across party lines: New evidence on group polarization. American Journal of Political Science, 59(3), 690–707. https://doi.org/10.1111/ajps.12152
Kershaw, I. (1998). Hitler 1889–1936: Hubris. Penguin Books.
Koselleck, R. (1979). Futures past: On the semantics of historical time (K. Tribe, Trans.). MIT Press. (Original work published 1979)
Levitsky, S., & Ziblatt, D. (2023). Tyranny of the minority: Why American democracy reached the breaking point. Crown.
Mommsen, H. (1996). The rise and fall of Weimar democracy.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Orlow, D. (1969). The history of the Nazi Party, 1919–1933. University of Pittsburgh Press.
Rosling, H., Rosling, O., & Rosling Rönnlund, A. (2018). Factfulness: Ten reasons we're wrong about the world—and why things are better than you think. Sceptre.
Searle, J. R. (1969). Speech acts: An essay in the philosophy of langua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Searle, J. R. (1995). The construction of social reality. Free Press.
Skinner, Q. (1969). Meaning and understanding in the history of ideas. History and Theory, 8(1), 3–53. https://doi.org/10.2307/2504188

*필자 최연혁 교수는 = 스웨덴 예테보리대의 정부의 질 연구소에서 부패 해소를 위한 정부의 역할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스톡홀름 싱크탱크인 스칸디나비아 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매년 알메랄렌 정치박람회에서 스톡홀름 포럼을 개최해 선진정치의 조건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그 결과를 널리 설파해 왔다. 한국외대 스웨덴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스웨덴으로 건너가 예테보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런던정경대에서 박사후과정을 거쳤다. 이후 스웨덴 쇠데르턴대에서 18년간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버클리대 사회조사연구소 객원연구원, 하와이 동서연구소 초빙연구원, 남아공 스텔렌보쉬대와 에스토니아 타르투대, 폴란드 아담미키에비취대에서 객원교수로 일했다. 현재 스웨덴 린네대학 정치학 교수로 강의와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좋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민주주의의가 왜 좋을까' '알메달렌, 축제의 정치를 만나다' '스웨덴 패러독스' 등이 있다.

kimsh@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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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참 "북한군 지뢰일 가능성 매우 높다" [서울=뉴스핌] 오동룡 군사방산전문기자 = 합동참모본부는 지난 21일 육군 25사단 지역 비무장지대(DMZ)에서 발생한 지뢰 폭발 사고의 원인을 "북한군 지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했다. 부상 장병의 장구류에서는 TNT 성분과 갈색 계열 이물질이 검출됐다. 폭발하지 않은 채 발견된 1발은 북한군 수지(樹脂)반보병지뢰로 추정된다. 합참 현장조사 태스크포스(T/F)장인 권대원 합참차장(육군 중장)은 28일 저녁 국방부 청사에서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권 차장은 "최종조사 결과 북한군이 매설한 지뢰로 판정되면, 군사분계선(MDL) 이남에서 정상적으로 작전하던 우리 장병이 북한군 지뢰에 부상을 당한 것"이라며 "모든 책임은 북한에 있고, 합당하고 상응한 조치를 시행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최종 결과는 유엔군사령부와 평가를 거쳐 발표할 예정이다. 권대원 합참차장(육군 중장)이 28일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에서 '25사단 지역 DMZ 내 지뢰 폭발 사고'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권 차장은 "국과수 1차 감정에서 TNT 성분과 갈색 계열 이물질이 검출됐고 철제 파편은 없었다"며 "이번 지뢰 폭발 원인은 북한군 지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밝혔다. [사진=국방부 브리핑 화면 캡처]2026.09.29 gomsi@newspim.com ◆폭발 지점 MDL 남쪽 10여m…"철제 파편 없어 아군 지뢰 아냐" = 합참에 따르면, 폭발은 21일 오전 10시 51분쯤 MDL 남쪽 10여m 지점에서 일어났다. 이곳은 북한군이 최근 지뢰를 매설한 것으로 추정되는 지형 변화 지역에서 10여m 떨어진 곳이다. 폭발은 2발이었고, 철수 과정에서 1발을 더 발견했다는 진술을 근거로 원점 일대에 모두 3발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국과수 1차 감정 결과는 이날 오후 4시 4분 합참에 통보됐다. 작전 병력의 피복·장구류와 화약흔 채취 거즈 등 10종을 감정한 결과, 방탄헬멧 1개와 방탄조끼 2개 등 3개 품목에서 TNT 성분과 갈색 계열 이물질이 나왔다. 양진혁 합참 작전부장(육군 소장)은 "주 장약이 TNT인 아군 지뢰는 폭발 시 철제 파편이 다량 발생하고 살상 반경이 20m 이상"이라며 "이번에는 철제 파편이 없고 갈색 이물질만 있으며 살상 반경도 상대적으로 작아 아군 지뢰는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합참은 북한군 지뢰로 판단한 근거로 네 가지를 제시했다. 우선 해당 지역에는 아군 지뢰 매설 기록이 없는 반면, 인근에서는 2025년 9월 북한군의 지뢰 매설 흔적이 발견됐다. 국과수 1차 감정에서 갈색 이물질이 검출됐고 철제 파편은 나오지 않았다. 1차 폭발 지점에서 1m가량 떨어진 곳에서 갈색의 북한군 수지반보병지뢰를 봤다는 진술도 있었다. 폭발 지점의 화구와 화염 형태, 장병들의 부상 정도, 작전 인원들의 진술 역시 북한군 지뢰를 가리킨다는 것이 합참의 판단이다. 폭발 당시 영상은 확보되지 않았다. 다만 800여m 떨어진 GP의 집음기에 약 58초 간격으로 비슷한 폭발음 두 번이 녹음됐고, 작전 요원들도 "1분 정도 간격이었다"고 같은 진술을 했다. 양진혁 합참 작전부장(육군 소장)이 28일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에서 '25사단 지역 DMZ 내 지뢰 폭발 사고'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수색로 개척 종료 시점과 1·2차 폭발 당시의 대형(隊形)을 요도로 설명하고 있다. 양 작전부장은 "철수를 준비하던 공병 요원이 왼발을 내딛는 순간 1차 폭발이 일어났고, 쓰러진 요원을 구하던 중 2차 폭발로 수색대대장이 중상을 입었다"고 밝혔다. [사진=국방부 브리핑 화면 캡처] 2026.09.29 gomsi@newspim.com ◆미폭발 1발은 '북한 수지반보병지뢰' 추정…탐지기엔 안 잡혀 = 미폭발 지뢰는 1차 폭발 지점에서 약 1m, 탐지를 마친 수색로 끝에서 5~10㎝ 깊이에 매설돼 있었다. 2차례 폭발 뒤 공병 요원이 무릎을 꿇고 손곡괭이로 땅을 찔러 가며 탈출로를 내던 중 발견했다. 발견한 요원은 "갈색의 네모난 형태에 표면은 매끄러운 플라스틱이고 무늬가 있었다"고 진술했고, 북한군 교리에 나오는 지뢰 사진을 보고는 "대단히 유사하다"고 했다. 주변에서 함께 본 3명의 진술은 '적색', '갈색', '목함지뢰' 등으로 엇갈렸다. 합참 공보실은 이 지뢰를 목함지뢰가 아닌 수지반보병지뢰로 정정했다. 합참 관계자는 "목함지뢰와 형태는 같고 재질만 플라스틱"이라며 "북한이 1969년부터 운용해 온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국과수가 검출한 갈색 이물질이 나무인지 플라스틱인지는 아직 구분되지 않았다. 지뢰를 수거할지는 29일 현장에서 유엔사와 협의해 판단한다. 지뢰 3발이 1~2m 간격으로 있었는데도 탐지기가 잡아내지 못한 데 대해 합참 관계자는 "탐지기를 바닥에 최대한 붙여 나갔지만, 수년간 쌓인 잡목 등으로 지뢰가 탐지 성능 깊이 아래에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3발 모두 매설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미폭발 1발은 매설로 추정되지만, 터진 2발은 매설인지 유실인지 아직 특정할 수 없다"고 했다. 28일 현장조사에는 유엔사 군사정전위원회 비서장과 25사단 작전부사단장 등 40여 명이 참여해 2차 폭발 지점 2m 앞까지 접근했다. 1차 폭발 지점은 여기서 2m 더 떨어져 있다. 조사단은 작전 병력의 군장과 방탄헬멧, 지뢰화를 확보하고 웅덩이 형태의 화구 2곳을 육안으로 확인했다. 목격 진술이 나온 지뢰 추정 물체와 잔해물까지는 가지 못했다. 합동조사팀 조사도 시간 관계상 진행하지 못해 29일 다시 들어간다. 지난 28일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비서장과 25사단 작전부사단장 등 40여 명으로 구성된 조사단이 '25사단 지역 DMZ 내 지뢰 폭발 사고' 원점 일대에 접근해 촬영한 현장 모습이다. 흰색 원 두 개는 지뢰 폭발로 생긴 웅덩이 형태의 화구로, 아래쪽이 2차 폭발, 위쪽이 1차 폭발 지점으로 추정된다. 조사단은 2차 폭발 지점 2m 앞까지 접근했고, 1차 폭발 지점은 거기서 2m 더 떨어져 있다. [사진=합동참모본부] 2026.09.29 gomsi@newspim.com ◆1차 폭발 뒤 전우 구하다 2차 폭발…GP 집음기에 58초 간격 폭발음 = 이날 합참은 사고 경위도 처음으로 자세히 공개했다. 이번 작전은 북한군의 지뢰 매설 추정 지역을 유엔사와 함께 조사하기 위해 새 수색로를 여는 작전이었다. 수색대대장 등 18명은 GOP 철책에서 소형 전술차량과 산악 바이크로 추진철책 소통문까지 이동한 뒤, 기존 수색로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이어 MDL 방향으로 수십 년간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 수풀 지대를 공병 요원이 앞장서 탐지와 예초를 번갈아 하며 약 200m 전진했다. 18명 가운데 9명은 탐지조·지휘조·작전지원조로 앞에 섰고, 나머지 9명은 20~100여m 뒤에서 통신, 후방 경계, 의무 지원을 맡았다. MDL에 근접했다고 판단한 대대장이 철수를 결심했고, 철수를 준비하던 공병 요원이 왼발을 내딛는 순간 1차 폭발이 일어났다. 주변 3명이 동시에 쓰러졌고, 수색 요원이 화구에 빠진 요원을 끌어내던 중 2차 폭발이 이어졌다. "괜찮아?"라고 외치며 달려가던 대대장이 쓰러졌다. 대대장은 왼쪽 발목에 심한 부상을, 오른쪽 허벅지 등에 파편상을 입었다. 서 있던 정보참모는 얼굴 등에 파편상을 입었고, 1m 옆에 웅크리고 있던 수색 요원은 다치지 않았다. 지난 21일 육군 25사단 지역 DMZ 지뢰 폭발 사고 직후, 메디온 의무후송헬기에서 하강한 응급구조사가 중상을 입은 수색대대장을 호이스트에 결속하고 있다. 장병들은 폭발 직후 지혈 조치를 한 뒤 수색대대장을 2인 1조로 안고 옮기다가 들것으로 교대해 가며 약 200m 떨어진 호이스트 지점까지 후송했다. [사진=합동참모본부] 2026.09.29 gomsi@newspim.com GOP 대대는 오전 10시 59분 의무사령부 의료종합상황센터에 지원을 요청했다. 메디온 의무후송헬기 3대가 차례로 출동했다. 합참의 요청에 유엔사는 11시 38분 DMZ 진입을 승인했고, 헬기는 11시 40분쯤 진입했다. 장병들은 대대장을 2인 1조로 안고 옮기다가 들것으로 교대해 가며 약 200m 떨어진 호이스트 지점까지 후송했다. 대대장과 공병 중사는 호이스트로 각각 헬기에 올라 국군수도병원으로 옮겨졌고, 나머지 인원도 모두 헬기 2대로 후송돼 정밀검진을 받았다. 18명 중 15명은 퇴원했고 중상자 2명과 경상자 1명은 입원 중이다. 대대장의 지뢰 덧신 착용 여부에 대해 합참 관계자는 "일부는 착용하고 있었다고 진술했다"면서도 "조사 중인 사안이라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대대장은 중환자실에 있어 아직 면담하지 못했다. 지난 21일 육군 25사단 지역 DMZ 지뢰 폭발 사고로 중상을 입은 수색대대장이 호이스트에 결속된 채 메디온 의무후송헬기로 끌어올려지고 있다(흰색 원). 수색대대장은 첫 번째 헬기에, 부상한 공병 중사는 두 번째 헬기에 태워져 국군수도병원으로 옮겨졌다. 현장에 하강한 응급구조사는 "수색 요원들의 신속한 응급처치가 출혈을 최소화해 더 큰 피해를 막았다"고 진술했다. [사진=합동참모본부] 2026.09.29 gomsi@newspim.com ◆"고의 지연 없었다"…매설 시점·고의성 판단은 유보 = 현장조사 지연 논란에 대해 합참 관계자는 "축소·은폐, 북한 눈치 보기, 상부 지시 같은 의혹은 일절 사실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현장 안내를 맡을 작전 병력이 모두 입원해 있었고, 1군단장이 직무배제된 상황이었다는 설명이다. 22일 합참의장 주관 상황평가에서 군단장 직무대리가 29일 투입을 건의했고, 의장은 이를 승인하면서 앞당길 방안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25일 의장이 25사단을 방문했을 때 직무대리가 "제한 사항이 해소돼 더 일찍 들어갈 수 있다"고 건의해 일정이 27일로 당겨졌다고 합참은 밝혔다. 안내를 맡은 수색중대장, 공병중대장, 공병 중사 3명은 23일 퇴원했다. MDL에서 10여m까지 접근한 경위도 논란이다. 합참 관계자는 "최초 계획 경로의 개척이 어려워 대대장이 더 양호한 지역으로 판단한 곳으로 갔다는 중대장 진술이 있지만, 대대장에게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고 했다. 사고 초기 '수십m 떨어진 곳'이라고 알린 데 대해서는 "통신 난청 지역이라 위치를 찍은 지점과 차이가 있었고 GPS 오차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다족보행로봇 등 무인장비는 시험해 봤지만 덩굴과 급경사 때문에 기동이 어려워 투입하지 않았다. 북한군의 지형 변화는 지난해 9월 위성영상으로 처음 식별됐다. 작업 시기는 지난해 8~11월로 추정되지만, 북한군 병력의 활동이 직접 포착되지는 않았다. 매설 시점에 대해 합참 관계자는 "당시 표시한 흔적보다 바깥에 있어 과거에 매설한 지뢰일 가능성도 있다"며 "양면성이 있다"고 했다. 고의성 판단도 유보했다. 합참 관계자는 "2015년 목함지뢰 도발은 우리 장병이 매일 드나드는 통문 앞뒤에 심은 것이어서 의도가 명확했다"며 "이번 지역은 50여 년간 사실상 가지 않은 곳이라 아군 병력을 노렸다고 보기에는 제한이 있다"고 말했다. 2015년 8월 10일 북한군 목함지뢰 도발 현장인 경기 파주 서부전선 GP 추진철책 통문에서 국방부 출입기자들이 취재하고 있다. 당시 한·유엔사 합동조사단은 현장에서 철제 용수철·공이 등 잔해물 43점을 수거해 북한군 목함지뢰 3발이 의도적으로 매설된 것으로 결론 냈다. 폭발 지점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는 경사지라 떠내려온 지뢰일 가능성도 배제됐다. [사진= 국방일보] 2026.09.29 gomsi@newspim.com MDL에 대해서도 "1292개 표지판이 촘촘히 있는 것이 아니어서 남북 간, 유엔사와도 인식 차이가 있다"며 "북한이 자기 땅으로 여겨 매설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군은 유엔사와 MDL 기준선을 일치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군은 사고 이후 DMZ 2단계 수색로 개척 작전을 잠정 중단하고 원점에서 재평가하고 있다. 대응 수위에 대해 양 작전부장은 "최종조사 결과가 나오는 대로 합참은 군사적으로, 국방부는 정책적으로 모든 옵션을 올려놓고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gomsi@newspim.com 2026-09-29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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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공개] 靑 신규 참모 6명 재산공개 [서울=뉴스핌] 김미경 기자 = 올해 6월 21일 임명된 청와대 신규 참모 가운데 박지영 사법제도비서관이 92억여 원을 신고해 재산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본인·배우자 명의로 주택 2채 이상을 보유한 다주택자는 김경자 사회수석비서관 1명이었다.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가 29일 관보에 게재한 9월 수시 재산등록사항을 살펴보면 대통령비서실과 국가안보실 신규 재산공개 대상자 6명 중 박 비서관이 92억1772만 원으로 재산이 가장 많았다. 이어 성기홍 홍보소통수석비서관이 86억6347만 원, 한찬식 민정수석비서관이 58억6067만 원으로 뒤를 이었다. 강건작 국가안보실 제1차장은 10억4150만 원, 김태근 자치발전비서관은 5억5398만 원, 김경자 수석은 5억748만 원을 신고했다. 청와대 전경 [사진=뉴스핌 DB] ◆ 김경자 수석, 성남 태평동에 아파트·다가구주택 보유 본인과 배우자가 소유권을 가진 주택을 기준으로 다주택 여부를 판단하면 신규 참모 중 다주택자는 김 수석뿐이다. 김 수석은 경기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 선경태평아파트(35.51㎡·1억6700만 원)와 같은 지역의 다가구주택(59.91㎡·2억2200만 원)을 본인 명의로 신고했다. 두 주택에는 임대보증금 채무가 각각 1000만 원, 1466만 원 잡혀 있다. 김 수석은 예금 8474만원을 신고했다. 임대보증금과 은행 대출을 합친 채무는 1억7502만원이었다. ◆ 박지영 비서관, 반포자이 부부 공동명의…임대보증금 29억5000만원 박 비서관은 서울 서초구 반포동 반포자이 아파트(165.45㎡)를 본인(132.39㎡)과 배우자(33.06㎡) 지분으로 나눠 신고했다. 신고가액은 본인 지분 36억6400만 원, 배우자 지분 9억1600만 원으로 모두 45억8000만 원이다. 이 아파트에 걸린 임대보증금 29억5000만 원은 채무로 올렸다. 박 비서관은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 센트럴파크 아파트 전세권(114.50㎡·21억3000만 원)도 신고했다. 배우자는 전북 군산·김제·완주 일대 밭과 임야 지분 1억2779만 원어치를 보유했다. 금융자산 규모도 컸다. 박 비서관 일가의 예금은 28억5785만 원, 증권은 24억440만 원이었다. 박 비서관 본인은 한국전력 3853주, 한화오션 1371주, 삼성전자 422주 등 상장주식 8억9937만 원어치를 신고했다. 배우자는 LS 일렉트릭 1321주, 이수페타시스 1750주, 한국전력 5030주 등 13억1834만 원어치를 보유했다. ◆ 성기홍 수석, 대치우성 부부 공동 39억 성 수석은 서울 강남구 대치동 대치우성 아파트(125.17㎡)를 배우자와 절반씩 나눠 보유했다. 지분별 신고가액은 각 19억5000만 원으로, 모두 39억 원이다. 본인·배우자 기준으로는 1주택자다. 성 수석 일가의 예금은 14억1605만 원, 증권은 13억6567만 원으로 집계됐다. 성 수석 본인은 삼성전자 2194주와 SK하이닉스 6주, 달바글로벌 192주 등 상장주식 8억3159만 원어치를 신고했다. 연합인포맥스 비상장주식 248주(4162만 원)도 갖고 있다. 배우자는 미국 국채 등 채권과 마이크로소프트·엔비디아·브로드컴 등 해외 주식을 보유했다. 성 수석은 비트코인 0.74개(7187만 원)도 신고했다.  ◆ 한찬식 수석, 서초 아파트분양권·강남 아파트 전세권 보유…채무 10억 한찬식 수석은 소유권을 가진 주택 없이 서울 서초구 신반포로 '디에이치 클래스트' 아파트 분양권(130.96㎡·25억5665만 원)을 신고했다. 서울 강남구 개포동 현대2차아파트 전세권(165.08㎡·12억 원)도 함께 올렸다. 한 수석의 배우자는 경기 부천시 소사구 괴안동 근린생활시설 지분(14억6559만 원)과 경남 산청군 임야(1억4410만 원)를 보유했다. 장남·장녀·차녀는 경기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임야 지분을 각각 1307만 원어치씩 신고했다. 한 수석은 농협은행 9억 원을 포함해 금융채무 9억5178만 원을 신고했다. 가족 전체 채무는 10억350만 원이었다. 한 수석 본인은 반얀트리클럽 앤 스파 서울 회원권(1억5000만 원)을, 배우자는 서울클럽 회원권(5000만 원)을 보유했다. ◆ 강건작 1차장·김태근 비서관, 1주택 강 1차장은 서울 은평구 불광동 메트로타워 아파트(104.49㎡)를 배우자와 공동명의로 보유했다. 지분 가액을 합치면 8억9000만 원이다. 강 1차장은 예금 2억340만 원, 채무 7155만 원을 신고했다. 김 비서관은 울산 중구 태화동 일신아파트(59.84㎡·1억1300만 원) 1채를 본인 명의로 신고했다. 김 비서관 일가는 예금 2억2180만 원, 증권 2억1887만 원을 보유했다. 배우자는 로킷헬스케어 1260주와 삼성전자 200주, 삼양식품 26주 등을 신고했다. 박 비서관은 모친, 김 비서관과 강 1차장은 장남에 대해 독립생계유지 등을 이유로 재산 고지를 거부했다. the13ook@newspim.com 2026-09-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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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이 내용에 포함된 데이터와 의견은 뉴스핌 AI가 분석한 결과입니다. 정보 제공 목적으로만 작성되었으며, 특정 종목 매매를 권유하지 않습니다. 투자 판단 및 결과에 대한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주식 투자는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으므로, 투자 전 충분한 조사와 전문가 상담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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