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러 관계 빛과 그림자...한국, 러에 14억7천만달러 차관 제공
러, 모라토리엄 위기 채무이행 어렵다며 2026년까지 상환연기
현금차관 10억달러 행방 묘연..고르비, 연해주 일부 임대 제안
[서울=뉴스핌] 김흥식 객원논설위원 = 소련해체 후 국제조약, 협정, 채권채무 등 대외관련 사항을 그대로 승계한 러시아는 정치, 경제, 사회적인 모순을 극복하기는 커녕, 회복 불가능한 총체적 난국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러시아에 투자했던 외국기업들이 서둘러 발을 빼기 시작했다. 차관 공여국들 역시 상환받기는 커녕 상환기간 연장 내지 탕감규모를 어느 정도로 하느냐로 골머리를 앓았다.
러시아 루블[사진=로이터 뉴스핌] |
◆한국, 러시아에 1991년 현금 10억 달러, 상품 4억7천만 달러 차관 제공
그런데도 우리 대사관은 북방외교의 상징인 한·소 수교 허니문에 푹 빠져들었는지, 급박하게 돌아가는 러시아 경제의 어두운 전망에 대해 별로 관심없다는 태도를 보이는 듯 했다. 필자가 만나본 러시아 측 관리들의 어두운 전망과 일본 등 타국 특파원 얘기들을 종합해보면 채무상환 능력이 완전히 고갈됐고 조만간 국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할 가능성이 높다는 데도 말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노태우 정부는 수교 대가로 소련에 30억 달러의 차관을 공여키로 하고 91년 5월 현금차관 10억 달러, 상품차관 4억7천만 달러를 먼저 제공한 바 있다. 특히 현금차관은 국제금리가 적용되는 은행차관으로,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 조건이 붙어 있었다. 소련의 붕괴로 나머지 액수는 제공하지 않기로 했지만 그 이면 협상과정도 복잡했다.
차관 공여, 경제협력 등으로 밀접해진 관련업무 처리를 위해 당시 대사관에는 안기부말고도 경제기획원 출신의 경제공사를 위시해 ,재무부, 상공부, 과학기술부, 수산청 등 경제관련 주재관들이 파견 나와 있었다. 그 외에 문화공보부, 교육부 등 파견관이 근무했다.
당시 대사관은 하나의 작은 정부와 같았다. 차관 상환 문제에 대한 대사관 특히 경제분야 주재관들의 입장은 대체로 비슷했다. 러시아는 대국이고 자원부국이라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에 상환에 문제가 전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모스크바 로이터=뉴스핌] 김민정 기자 = 10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의 환율 전광판에서 나타난 달러와 유로화 대비 러시아 루블 환율. |
◆러시아, 약정이행 어렵다며 상환일정 연기...최종 상환시기 2026년 합의
우리 정부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차원에서 러시아의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어 상환능력이 불투명해졌으며 따라서 상환은 상당기간 어려울 전망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국내 언론들이 연합기사를 받아 대서특필했음은 물론이다. 서울의 관련부처와 모스크바 대사관측은 즉각 근거 없는 추측보도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대사관의 입장은 시간이 갈수록 군색해졌다. 막상 상환협상이 시작되자 러시아 측은 오히려 당초 제공키로 약속한 나머지 15억 달러도 집행해야 한다는 엉뚱한 주장을 펴기도 했다. 모라토리엄 직전의 국가에게 추가제공은 할 수 없다는 우리 측 주장에 러시아 측도 수긍했다. 문제는 이미 집행된 차관의 상환이 러시아 측 사정으로 언제 해결될 지 모른다는 점이다.
결국 1999년까지 상환 완료하기로 된 당초의 약정은 러시아 측이 이행하기 어렵다고 통보함에 따라 상환문제는 양국 간 현안으로 대두되기 시작한다. 상환연기로 해마다 이자가 누적되면서 채무규모는 한때 30억 달러로까지 늘어났다.
우여곡절의 협상을 통해 방산물자 및 천연자원 등으로 일부 상환하면서 줄어들고 있기는 하지만 최종 상환시기를 2026년으로 합의한 것 자체만 보아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임을 말해 준다. 최근 러시아는 에너지 가격 상승 등으로 외환보유고가 4천억달러 내외에 달해 세계5위를 기록하는 등 외환사정이 호전됐음에도 상환시기를 앞당기겠다는 얘기가 없으니 그들의 속내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상환협상 진행 중에 이미 제공한 현금차관 10억 달러의 행방을 놓고 확인하기 어려운 소문이 나돌았다. 상품차관은 현물이니까 보관창고에서 확인이 가능하지만 현금차관의 경우 문서상으로는 분명히 주고받은 기록이 있는데 국고에는 들어온 흔적이 없다는 얘기였다. 나라 전체에서 말기적 부정부패가 판을 치던 시절이여서 누구랄 것도 없이 누군가가 국고로 들어가기 전에 중간에서 가로챈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연금법 개정안에 항의하는 시위대 [사진=로이터 뉴스핌] |
◆현금차관 10억달러 행방 미스터리...고르비, 연해주 지역 무기한 임대 제안도
시기적으로도 차관제공 시점이 소련 붕괴 불과 1년 전이었다. 더욱이 미국 달러화의 가치가 천정부지로 올랐던 때라 사람들은 달러 있는 곳이면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던 시절이었다.(당시 필자는 자가용 승용차로 영업행위를 하던 현역 육군 대령을 만난 일이 있는데 그의 월급이 미화 50달러에 불과해 부업을 해야한다고 말했다. 모스크바 대학 교수의 월급도 비슷했다.)
확인되지 않은 일부 소문에 의하면 러시아, 우크라아나, 벨라루시 등 핵심 3개 공화국의 권력자들이 빼돌렸다고 한다. 10억달러의 행방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대사관 관계자가 필자에게 상환협상에 참여한 러시아 관리의 탄식을 전해주었다. “두 눈으로 본 적도 없고 누구 호주머니로 들어갔는지도 모르는 10억 달러를 갚아야 하는 현실에 기가 막힐 뿐이다”
차관상환과 관련해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기상천외한 제의를 했다고 전해져 관심을 끈 적이 있다. 차관상환이 양국 간 현안으로 대두되자 고르바초프는 퇴임 직전인 91년 말 14억7천만달러의 차관상쇄를 위해 연해주 내 ‘달레내골스키’ 지역을 내줄 수 있다는 제의를 노태우 정부에 해왔다고 한다. 무기한 임대라는데 사실상 ‘할양’이라는 것이다. 경상북도 크기의 이 지역에 대해 정부 실사팀이 현지조사한 결과 산악지대여서 고려인의 벼농사 정착지로 적합하지 않다며 부정적인 의견을 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역은 연해주 내에서도 우라늄, 다이아몬드, 금을 비롯한 귀금속이 많이 나는 지역으로 판명됐다고 한다. 고르바초프는 한국정부의 거절소식을 듣고 안타까워했다는 후문이다. 당시 현지를 실사한 우리 정부의 관계자들이 이 땅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우리 정부의 단견에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모스크바 크렘린 궁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사진은 소규모 회담 모습. <사진=청와대> |
▲김흥식 뉴스핌 객원논설위원
한국외대 러시아어과를 졸업하고 1977년 동양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뎠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해직되는 아픔을 겪고 쌍용그룹에 몸담고 있다가 1988년 연합뉴스 기자로 복귀했다. 1991년 한국의 첫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파견돼 맹활약했다. 이후 연합뉴스 북한부장, 남북관계 부장, 문화부장, 논설위원실 간사, 경영기획실장을 거쳐 편집담당 상무이사를 지냈다. 퇴임후 연합뉴스 부설 동북아센터 상임이사, 중소기업진흥공단 비상임이사, 도로교통공단 비상임이사, 방송통신심의위원회 특별위원 등을 지낸뒤 현재 뉴스핌 객원논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khs@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