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이 북미정상회담보다 중요한 이유
[서울=뉴스핌] 이영태 국제외교담당 부국장 = “역사는 강물처럼 멈추지 않죠. 당신은 이 강물을 막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젠가는 넘쳐 다른 길로 바다에 이르게 됩니다. 독일 통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독일 통일을 방해할 수 있으며, 그래서 우리 두 사람 모두 살아 생전 그것을 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라인강물이 분명히 바다에 이르듯 독일 통일도 언젠가는 틀림없이 옵니다. 그리고 유럽도 통일됩니다.(1989년 6월 14일 라인강을 바라보며 독일 헬무트 콜 총리가 소련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에게 했던 말이다. 출처: <나는 조국의 통일을 원했다> 헬무트 콜)
1989년 11월 9일 동서 냉전을 상징하던 베를린장벽이 무너질 때 동독 주민들이 “Wir sind das Volk(우리가 바로 게르만 민족이다)”라고 외치며 서베를린으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당시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 총리와의 정상회담 도중 이 소식을 들은 헬무트 콜 독일 총리는 “실례지만 지금 바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다”며 곧바로 귀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는 바르샤바를 떠나기에 앞서 독일을 갈라놓았던 2차 세계대전 전승국들을 향해 “독일인의 생존에 대한 어떠한 간섭도 거부한다”며 “통일이라는 열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베를린으로 날아온 그는 다스 폴크(das Volk)를 외치는 동독 주민들을 향해 “Wir sind ein Volk(우리는 한 민족)”라고 천명했다. 동독 민주화와 정치·경제개혁에 한정됐던 시위대의 구호가 독일 통일로 바뀌던 순간이었다.
1871년 프로이센 재상으로 나폴레옹 3세와의 ‘보불전쟁’에서 승리해 최초의 독일 통일을 이룬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는 “역사 속을 지나가는 신의 옷자락을 놓치지 않고 잡아채는 것이 정치가의 임무”라고 말했다. 19세기 이후 신이 독일에 두 차례 부여했던 통일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철혈재상’과 ‘독일통일 아버지’의 역사다.
◆ 헬무트 콜과 비스마르크, 그리고 문재인
독일 쾨르버재단이 지난해 7월4일 홈페이지를 통해 방독을 앞둔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정책 기조를 담은 '신독일선언(가칭)'을 소개하고 있다.<사진=쾨르버재단 홈페이지 갈무리> |
한반도 운명의 주인은 남과 북이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 식민통치와 분단을 경험한 남북이 해방 이후 한반도의 주권자로서 제 기능을 발휘했던 경험은 거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열흘 후인 오는 27일 판문점에서 열릴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간 남북정상회담은 한·미·일과 북·중·러로 고착되고 있는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신냉전구도를 평화체제로 전환시킬 절호의 기회다.
남북의 정상이 이번 회담에서 합의하고 국제사회에 제시할 비전은 북한 비핵화와 남북관계 개선이다.
북한 비핵화는 미국의 대북 체제 안전보장 및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이슈와 결합돼 있어 남북이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은 그리 높지 않다. 다만 남북 정상이 이번 회담을 통해 강력한 한반도 비핵화 의지와 목표를 천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과 평화체제 구축, 나아가 남북과 미·중·일·러가 참여하는 동북아 다자안보체제로 발전시켜나간다는 비전을 제시할 수 있다면 5월 말이나 6월 초 개최가 예상되는 북미정상회담으로의 가교 역할을 수행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관측된다.
북핵관련 국제사회 대북제재의 영향을 받는 남북협력 문제 또한 남북경제공동체 등 궁극적인 목표와 로드맵을 제시하되 당장은 대북제재 범주에서 자유로운 이산가족 상봉 등 인도주의적 협력 사업부터 시작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간 북미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관계 정상화 등에 대한 합의가 이뤄진다면 남북은 향후 정례화를 목표로 하고 있는 정상회담을 통해 비핵화 프로세스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포괄적·단계적 로드맵을 구체화시킬 수 있다.
물론 문 대통령이 북한과 주변국들을 설득하고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추진해나가는 과정에는 수많은 난관과 도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때 문 대통령은 ▲미국에는 북미수교 후 주한미군 주둔 등 안보 레버리지 ▲중국에는 북핵 6자회담 재개를 통한 중국의 국제사회 주도권 회복 ▲일본에는 납북자 문제 해결 등 북일 대화채널 재개 지원 ▲러시아에는 남북을 관통하는 가스관 건설과 시베리아철도(TSR) 연결 사업 등의 카드와 레버리지를 제시하며 주변국들을 설득하는 작업을 벌여야 한다.
1990년 독일 통일 과정에서도 미국과 소련, 영국, 프랑스 등 주변국 사이에서는 ‘1·2차 세계대전 경험에 비춰볼 때 인구 8000만의 통일 독일이 유럽대륙에 위협을 끼칠지 모른다’는 우려가 팽배했다. 마가렛 대처 영국 총리는 “(동·서독을 비롯한) 국경은 이제까지의 상태 그대로여야 한다”며 공개적인 적대감을 드러냈다.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도 “유럽이 1차 세계대전 이전인 1913년 상황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걱정했다.
그러나 ‘신의 옷자락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왔음을 인식한 콜 전 총리는 서독이 가진 경제력과 외교력을 총동원해 주변국 정상들을 설득하며 우려를 불식시켜 나갔다. 주요국 정상들과의 수시 양자회담은 물론, 유럽공동체(EC)·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등 다자외교 무대까지 폭넓게 활용했다. 이 과정에서 유로화 도입과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잔류 등 주변국들의 경제 및 안보우려를 적극 해소했다.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소련과는 1990년 7월16일 독소 코카서스 정상회담과 9월12일 2+4 모스크바 회담을 통해 독일의 완전한 주권회복과 자율적 의사결정에 따른 통일을 문서로 보장받는 대가로 총 550억마르크(현재 가치로 약 38.5조원)를 지불했다. 이 비용에는 동독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의 철수비용과 고향의 주택마련 기금 등도 포함됐다.
당시 2+4 회담은 동독과 서독,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6개국 외교장관들이 독일의 완전한 주권을 회복시키고 통일을 인정하는 마지막 절차였다. 콜 총리가 독일통일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다.
◆ 페리 “즉각적인 변화에 신경 쓰지 말고 프로세스를 창출하라”
윌리엄 페리 전 미국 국방장관이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열린 뉴스핌 창간 15주년 기념 제7회 서울이코노믹포럼에 참석해 특별대담을 마치고 기자간담회를 갖고 있다.[사진=김학선 기자] |
1999년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및 북미관계 정상화란 ‘페리프로세스’를 만든 윌리엄 페리 전 미국 국방장관은 지난 10일 뉴스핌이 주최한 제7회 서울이코노믹포럼에 참석해 “(북미정상회담은) 획기적 발전을 가져다줄 수도 있겠지만 극적인 실패로 이어질 수도 있다. 만일 실패하면 외교라는 것은 모두가 불신하는 수단이 될 것”이라며 “다가오는 정상회담을 주의 깊게 준비해야 한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북미 간 (관계)정상화도 중요하지만 남북 간 정상화가 우선시돼야 할 것”이라며 “남북정상회담이 이달 말 계획되어 있는데 어떻게 보면 북미회담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모든 것이 한꺼번에 변화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며 “절대로 즉각적인 변화에 신경 쓰지 말라. 대신 프로세스(경로) 창출에 더욱 신경 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남과 북은 이미 미중일러 6자가 모두 참여한 2005년 6자회담 9·19 공동성명 합의 과정에서 북한 비핵화와 북미수교 및 평화협정 체결을 통한 체제 안전 보장 방안이라는 북핵문제 해결의 이정표와 로드맵을 마련한 바 있다.
2018년 ‘문(재인)프로세스’가 약 20년 전 성공 문턱에서 좌절했던 ‘페리프로세스’를 극복하고 한반도 평화의 초석을 마련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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