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황수정 기자] 한 편의 아름다운 잔혹동화를 펼쳐놓은 듯하다. 미묘한 떨림과 씁쓸한 엔딩,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연극 '블라인드'가 공연 중이다.
연극 '블라인드'(연출 오세혁)는 동명의 네덜란드 영화를 원작으로 한 첫 정식 라이센스 작품. 원작은 국내 미개봉작이지만 제32회 토론토국제영화제, 제1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등 국내외 영화제를 통해 소개돼 높은 평점을 받으며 마니아들 사이에서 꾸준히 회자되고 있다.
작품은 시각을 잃고 스스로를 어둠 속에 가두어 버린 청년 '루벤'이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여자 '마리'를 통해 세상을 알게 되고, 진정한 교감을 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여기에 아들이 상처로 가득한 여자에게 마음을 주는 것을 원치 않는 엄마 '여인'을 통해 극에 갈등과 긴장감을 더한다. '루벤' 역은 박은석, 이재균, '마리' 역은 정운선, 김정민, '여인' 역은 김정영, 이영숙이 맡았다.
루벤과 마리는 상처를 입은 인물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루벤은 자신을 돕기 위해 고용된 사람들에게 난폭하게 굴며 모두를 떠나보낸다. 마리는 얼굴과 몸에 흉측한 상처가 가득하지만 목소리만은 예쁘다. 그는 루벤에게 책을 읽어주기 위해 고용됐다. 무엇보다 마리는 루벤의 난폭함을 단숨에 제압한다.
두 사람이 친해지는 과정은 순탄치 않다. 소리지르는 것은 기본에, 물건을 던져 부수기도 하고, 몸싸움까지 행한다. 그러나 이를 통해 루벤과 마리는 서로에게 마음을 연다. 마리가 루벤을 시각 장애인이라고 다르게 대하지 않은 점은 루벤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해줬고, 그가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마리를 안심시켜 줬으니까. 한없이 떨어지던 자존감이, 서로를 통해 회복되기 시작한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이기에 사랑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 그러나 루벤이 눈을 치료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면서 오히려 위기가 찾아온다. 마리를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생각하는 루벤과 그에게 아름다운 것만 보여주고 싶다는 엄마의 말은 비수가 되어 결국 마리를 떠나게 만든다. 세상과 단절된 두 사람의 사랑은 아름다웠지만, 현실로 돌아오니 비극을 맞이해 더욱 씁쓸하다.
공연은 루벤이 느끼는 것처럼 시각보다는 청각과 촉각 등 다른 감각을 더욱 강조한다. 미세한 손끝 떨림과 동공의 움직임 등 움직임 지도로 한층 사실적인 배우들의 연기는 물론, 피아노와 바이올린, 첼로로 구성된 라이브 연주는 그들의 감정을 표출한다. 대사가 많이 없는 정적인 작품임에도 극적인 감동과 몰입도를 전한다.
특히 "난 만져야 볼 수 있어"라는 루벤의 말처럼 공연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진 감각은 '촉각'이다. 서로를 처음 보게 된(만지는) 순간부터 눈을 가지고 노는 장면, 무엇보다 면도를 하는 장면은 숨소리 하나 낼 수 없을 정도로 관객 모두 그들의 손길에 집중하게 된다. 쉴 새 없이 쏟아내는 대사 대신, 한 번의 움직임이 더욱 많은 감정을 전한다.
다만 너무 어두운 조명에 배우들의 미세한 표정을 멀리서는 볼 수 없다는 점, 다소 복잡한 동선과 눈을 대신한 자갈의 소리가 극의 몰입도를 방해하는 점은 조금 아쉽다. 또 라이브 연주가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것은 맞지만, 간혹 배우들의 목소리보다 너무 크다는 점 역시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다.
극중 마리가 루벤에게 읽어주는 책인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은 진실한 사랑의 위대함을 이야기한다. 이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로,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을 때 비로소 알 수 있는 소중함과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연극 '블라인드'는 오는 2월 4일까지 수현재씨어터에서 공연된다.
[뉴스핌 Newspim] 황수정 기자(hsj1211@newspim.com)·사진 나인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