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장주연 기자] “그 객실 안에서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우린 둘 다 자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중략) 나는 사랑을 고백했고 심장이 타버리는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 그때야 비로소 우리의 사랑을 방해한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불필요한 것이고 사소한 것이고 기만적이었는지 깨닫게 됐습니다. (중략) 더 고상한 것, 더 중요한 것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습니다.”
사랑이라 주장하는 두 사람, 홍상수 감독과 배우 김민희의 신작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베일을 벗었다. 알려졌다시피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유부남 영화감독 상원(문성근)과 사랑에 빠진 여배우 영희(김민희)의 이야기로 크게 둘로 나뉘어 전개된다. 1부에서 독일 함부르크로 떠난 영희가, 2부는 한국 강릉에서 고향 선배들을 만나는 영희가 화자다. 홍상수 감독의 그간의 작품들처럼 사랑, 술, 예술로 얼개를 짰다.
사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홍상수 감독과 김민희의 관계를 떼어놓고 보기 힘든 작품이다. 두 사람의 상황과 꽤 많은 부분 맞닿아 있기 때문. 실제 영화 곳곳에는 이들은 연상하게 하는 상황과 대사가 가득하다. 홍상수 감독은 “제 삶을 재현하려 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영화는 지극히 자전적이다. 마치 홍상수 감독의 일기장 또는 그의 연인 김민희를 위한 헌사 같다.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로 호흡을 맞춘 홍상수 감독(왼쪽)과 배우 김민희 <사진=뉴스핌DB> |
영화 속 김민희의 한 남자를 사랑한다. 그 남자는 영화감독이고 자식이 있는 유부남이다. “잘생긴 남자 많이 만나봤다”는 그는 지영(서영화)에게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거 다 해봐. 난 할 건 다 했어. 언제든 죽어도 돼”라고 말한다. 메가폰을 잡은 홍상수 감독은 그런 영희(혹은 김민희)를 완벽하게 두둔한다. “(불륜설로) 썩기엔 아까운 배우”라고 칭하고, 그의 지인은 불륜설 이후 그가 얼마나 여성스러워졌고 성숙해졌는지 재차 강조한다. 해변에 쓰러져 누워있는 김민희를 향해 “일어나라”고 하는 장면들의 반복 역시 의미심장하다.
자신들의 향한 비난에는 가감 없이 쓴소리를 날렸다. 김민희는 “사랑하지 못하니까 사는 것에 집착하는 거죠. 사랑할 자격이 없으니까. 아니 사랑받을 자격이 없으니까. 사랑받을 자격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나요?”라고 영희의 입을 빌려 외친다. 홍상수 감독은 권해효를 통해 “할 일이 없어서 지들은 그렇게 잔인한 짓 하면서 지들끼리 좋아하는 걸 불륜이래”라고 푸념한다. 자신들의 사랑에 돌을 던지는 언론과 대중을 향한 일침이다.
그러니까 홍상수 감독은 스크린 속에서도 당당하고 뻔뻔했다. 솔직해서 좋았던 홍상수 감독의 작품은 너무 솔직해서 불쾌했다. 중년 남자의 민낯을 전시한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지만, 배우의 탈을 쓴 그의 민낯을 보고 싶진 않았다. 집착, 질투, 미련, 지배, 욕망 같은 지지한 감정을 보여줬던 홍상수 감독은 이제 그걸 방패막으로 (본인이 하는) 사랑의 위대함을 말했다. 군더더기 없고 깔끔하던 스토리는 변명처럼 읽혀 궁상맞았다. 여전히 쓸쓸하고 유쾌했으나 묘한 울림은 이제 느낄 수 없었다.
극 말미 영희와 상원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너무 힘들어서 영화만 하려고” “무슨 영화 만드실 건데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그 경험에 따라가는 영화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영화 만들어서 어쩌시려고요? 무슨 한풀이 하시려고요?” “한풀이? 그럴 수도 있겠네. 지금 내가 정상이 아니야. 그때부터 영화는 만들지만 정상은 아니야. 괴물이 되는 거 같아. 계속 후회해. 매일 같이 지긋지긋하게 후회해” “후회하지 마세요. 후회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자꾸 하다 보면 달콤해져 그래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계속 후회하면서 죽고 싶어.”
간통법이 폐지돼도 세상에는 도의라는 것이 존재한다. 홍상수 감독의 세 번째 베를린 경쟁부문 진출작을 온전히 영화로, 예술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다. 같은 맥락에서 제67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품에 넣은 김민희는 훌륭한 배우지만, 외면할 필요가 있는 여자라고 단언한다. 영화를 보고 진심으로 그들의 불행을 빌었다. 오는 23일 국내 개봉.
[뉴스핌 Newspim] 장주연 기자 (jjy333jjy@newspim.com) <사진=㈜영화제작전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