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최신뉴스 GAM
KYD 디데이
문화

속보

더보기

[스타톡] 김강우 "유기적·순간적인 집중력, 한국드라마의 힘"

기사입력 :

최종수정 :

※ 본문 글자 크기 조정

  • 더 작게
  • 작게
  • 보통
  • 크게
  • 더 크게

※ 번역할 언어 선택

[뉴스핌=장윤원 기자] “채널 돌리다 쉽게 집중해서 볼 수 있는 드라마는 아니었죠. 세월호 사건에 KBS 파업, 선거까지. 세상이 어지럽고 어두운데 드라마까지 어두운 거 보고 싶으셨겠어요?”(웃음) 
 
지난 6월19일 마지막회를 끝으로 종영한 KBS 2TV 수목드라마 ‘골든크로스’는 대한민국 상위 0.001%의 권력 집단 골든크로스와 이에 맞서는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을 다룬 복수극이다. 이 사회 어두운 단면의 데자뷰를 느끼게 하며 씁쓸한 여운과 함께 막 내렸다. 
 
‘골든크로스’는 막 내리기 직전까지도 분위기의 반전을 거듭하며 시청자들의 허를 찔렀다. 이에 대해 김강우는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면 선전했다”는 다소 겸손한 자평을 남기며 웃었다. 


사실 ‘골든크로스’는 김강우에 직접 제의가 들어온 작품은 아니었다. 어느 날 소속사 사무실에 놓여 있던 대본을 우연찮게 읽은 뒤, 그의 적극적인 바람으로 출연이 결정됐다.
 
“전 주로 영화를 하기 때문에 드라마는 제가 먼저 나서지 않는 이상 러브콜이 들어오진 않아요. 근데 대본이 우선 재미있었고, 드라마에선 잘 나오지 않을 캐릭터라는 점도 끌렸어요. 유현미 작가를 전부터 좋아했는데, 그분의 장기를 최대치로 보여줄 수 있는 드라마라고 딱 느꼈죠.” 
 
‘골든크로스’를 통해 김강우의 안에서 가장 크게 바뀐 점은 “드라마도 영화 못지 않게 재미있다”는 생각의 변화다. 예전에는 드라마라는 매체가 영화보다 질이 떨어진다 내심 생각했었다는 김강우는 자신의 과거 편견이 완전히 틀렸음을 담담히 털어놨다.
 
“저도 배우지만, 객관적인 시선으로 좀 떨어져서 현장을 봤어요. 스태프들도 배우들도 잠을 못 자면 대충할 수 있을텐데, 절대 그렇지 않아요. 조명 잡은 분이 ‘이 쪽에서 한번 더 가야 된다’, 카메라 잡은 분이 ‘이쪽 앵글 감정 좋으니까 한번 더 가고 싶다’고 말씀하시는데, 며칠 밤을 못 잔 상태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죠. 근데 그들은 그걸 해내요. 예술을 하는 거예요. 하나에 집중해서 만들어가잖아요.” 
 
김강우는 드라마 현장의 모두가 열악한 드라마 제작환경 때문에 혹사당하는 존재처럼 평가절하 되는 것에 대해 아쉬워했다. 그는 “물론 드라마 제작 시스템을 바꿀 수 있다면 바꾸는 게 좋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안 된다면 이런 방식도 인정 해줘야 할 것”이라면서 “유기적이고 순간적인 집중력을 발휘한다는 게 한국드라마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골든크로스’ 마지막회 말미에는 복수를 끝마친 강도윤(김강우)이 어머니와 단 둘이 식사를 하면서 죽은 아버지와 여동생을 떠올리고 울면서 웃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는 교도소에서 출소해 재기를 꿈꾸는 서동하(정보석)와 대조되며 안타까움과 분노를 더했다. 일부 시청자들은 완벽한 해피엔딩이 아니란 점에 아쉬움을 토로했지만, 김강우는 극 중 도윤의 마지막 장면에 큰 만족감을 드러냈다. 
 
“강도윤도 물론 권력에 쉽게 물들 수 있어요. 한번 맛을 보면 명예와 권력만큼 무서운 게 없잖아요. 근데 이미 도윤은 사치와 쾌락을 다 경험해 봤고, 처음엔 부정했던 아버지의 삶이 자신에게 잘 맞는 옷이었단 걸 알게 된 거예요. 또, 도윤은 권력에 취할 뻔 하더라도 아버지가 떠오르면서 도저히 그렇게는 살 수 없겠죠. 마지막 장면은 그런 도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 것 같습니다. ‘골든크로스’는 강도윤의 성장드라마가 아니었을까요?” 


드라마가 끝난 뒤 김강우는 ‘골든크로스’에 대해 생각했다. 그도 어릴 적 부모님과 옹기종기 모여 앉아 즐겁게 본 드라마들이 있었고, 재미있는 드라마, 혹은 한번쯤 생각하게 만드는 드라마 등 많은 작품이 기억에 남아 있다. 그 가운데 김강우는 “부모님과 얘기를 할 수 있는 드라마, 예컨데 ‘모래시계’처럼 그 시대를 대변해주는 드라마”를 언급하며 ‘골든크로스’에 의미를 뒀다. 
 
“요즘 드라마 트렌드는 소수의 행복을 추구하는 드라마이고, 그게 사회의 가치를 말하고 있는 듯해요. 다수의 사회문제를 다루고 고민하게 만드는 드라마는 잘 없었는데, ‘골든크로스’가 그랬던 것 같아요. 남녀노소 모두 즐겁게 보기엔 낮은 점수의 드라마죠. 하지만, 이런 드라마를 지지해 주지 않는다면 시청자들이 보는 폭은 점점 줄어들 거예요. 영화도 한 장르만 나오면 안 되는 것처럼.” 
 
한 작품의 주인공으로서 다양한 능력이 요구되는데, 김강우는 “다만 열심히 하는 것”으로 중심을 지켰다. 마지막 서동하가 암매장을 당할 위기의 장면에선 방전난 체력을 긁어 모아 마지막 분노를 터뜨렸다는 김강우.
 
“제가 딱히 친화력이 뛰어난 게 아니라 현장을 잘 아우르거나 하진 못했어요. 다만, ‘쟤는 열심히 하는 구나’,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내가 조금 나와도 열심히 해주고 가야겠다’고 생각하게끔 잡아줄 수 있었죠. 형님들이 ‘괜찮냐’며 엉덩이 쳐주고 가시고, ‘끝나고 몸보신 시켜줄게’란 말 들었으면, 그 나름의 역할을 한 게 아닐까요? 제가 주인공으로서 할 수 있었던 건 그거였던 것 같아요.”  

 

“‘멀티’ 안되는 남편…와이프에게 참 고마워요.”
 
드라마 강행군이 이어지고 끼니를 제때 못 챙겨 먹으면서, 인터뷰 당시 김강우는 위염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촬영 중에는 일에만 집중하는 스타일이라 술 한잔도 안 했건만 병을 얻었다고 하니, 그간의 고생이 짐작된다. 
 
“제가 원래 멀티가 안 돼요. 운전 하면서 전화도 못하는 체질이라, 작품 들어가면 전 집에서 정말 아무것도 안 해요. 모든 대인관계 다 끊고, 티비도 잘 안 봐요. 애들이랑 놀아주긴커녕 얼굴만 잠깐 보고….” 
 
지난해 초 ‘힐링캠프’에서 다져진 듬직한 ‘국민형부’의 이미지에 대해서도 김강우는 “실제 제 모습이 아니다”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오히려 “어떤 연예인 가족보다 대화 적을 것”이라는 농담 섞인 폭탄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국민형부’야 말로 제게 맞지 않은 타이틀이에요. 처제나 장모님께도 살갑지 않고…. 작품 들어가면 집에서 말도 잘 안하는데, 그걸 와이프가 이해심이 많아서 이해해 줄수도 있지만 포기해서 그런 걸수도 있어요(웃음). 그런데 참 고마운 건, 제가 듣지도 않을 뿐더러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데도 와이프가 하루 있었던 일을 다 이야기 해요. 대신 일 끝나면 평범한 30대 제 나이의 평범한 아버지로 돌아가죠. 일 없을 땐 저도 집에서 머슴같이 일합니다.” 



사진=나무액터스 제공
 
[뉴스핌 Newspim] 장윤원 기자 (yunwon@newspim.com)

[관련키워드]

[뉴스핌 베스트 기사]

사진
또 다른 제6사 사장 김일성의 출현 변상문의 '화랑담배'는 6·25전쟁 이야기이다. 6·25전쟁 때 희생된 모든 분에게 감사드리고, 그 위대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제목을 '화랑담배'로 정했다.  동북항일연군 제6사 사장 김일성(金日成)이 1937년 11월 13일 사살된 이후부터 한동안 이 부대에 대한 동향이 파악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38년 봄부터 갑자기 새로운 김일성(金日成)의 움직임이 일본 경찰 정보망에 잡혔다. 신임 제6사 사장 역시 소련으로부터 파견돼 온 자였다. 그는 소련 지령으로 전임자 김일성(金日成)의 이름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후임 제6사 사장 김일성(金日成)은 1939년 봄에 사(師)를 묶어서 방면군(方面軍)으로 편제를 변경하는 동북항일연군 제3차 개편 때 제1로군 제2방면군장(方面軍長)이 되었다. 소련은 중일전쟁 발발 후, 일본이 소련을 공격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동북항일연군에 적극적인 군사 지원을 하였다. 그중에서도 소련군 내 한국·중국인 군관들에게 유격 전술을 교육하여 파견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신임 제6사(제6사는 동북항일연군 제3차 개편 때 제2방면군이 된 부대) 사장으로 취임한 김일성(金日成)은 본명이 김일성(金一星)이다. 김성주 별호와 같다. 그는 1930년 5월 30일 간도 폭동 사건 때 용정에 있었던 한인이 다니는 대성중학교 학생이었다. 이날 밤(1930년 5월 30일) 김일성(金一星)은 용정역 기관차에 불을 지르는 등의 행위로 일본 경찰에 붙잡혔으나, 서울로 압송되기 전 탈출에 성공했다. 그 후 소련으로 건너가 적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련 공산당 지령에 따라 1938년 동북항일연군으로 파견돼 온 것이었다. [사진= AI 생성 이미지]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은 1938년 4월 26일 밤 제2방면군은 평안북도 후창(厚昌) 경찰서 부흥(富興) 주재소 대안 임강현(臨江縣) 제3구(三區) 6도구(六道溝)를 습격하였다. 병력은 약 500명이었다. 모두 개인화기를 소지하고 있었고, 경기관총 6정도 출동하였다. 총 5개 대(隊)로 나누어 나팔을 불며 공격했다. 일본인 세무서원 2명, 중국인 세무서원 1명을 현장에서 사살했다. 지역 주민 50여 명을 납치해 갔다. 현금 2천 원, 식량 1만 원 상당을 탈취하였다. 이에 일본군과 만주군은 중일전쟁 후방지역 안정화 차원에서 동북항일연군 토벌 작전을 강도 높게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군에 의한 토벌뿐만 아니라, 심리전, 교통 차단 등 다양한 봉쇄 작전을 펼쳤다. 그 결과 1939년 봄이 되면 동북항일연군 제2·3로군의 전투력은 거의 소진돼 버렸다. 제2·3로군 중 전투력을 일부 보전한 부대는 소련으로 도주하거나, 소만 국경 지대로 은거했다. 전투력을 유지한 부대는 제1로군 뿐이었다. 이때 제1로군 사령관은 중국인 양정우(楊靖宇)였고, 부사령관은 중국인 위극민(魏極民), 사령관 비서처장 겸 군수처장은 앞서 설명한 한인 오성륜(吳成崙)이었다. 총병력은 3000여 명이었다. 제1로군은 동변도(東邊道)라 부르는 길림, 통화 간도 일대의 험준한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부대 정비에 들어갔다. 이때 제3차 부대 개편을 단행하였다.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다고는 했지만, 병력 손실이 큰 데다, 추가 병력 보충이 어려웠다. 그래서 기존의 로군 아래 군(軍)을 없애고 군(軍) 예하 모든 사(師)를 통합하여 제1·2·3방면군으로 바꾼 것이다. 제1방면군장은 조아범(曺亞範), 제2방면군장은 김일성(金日成), 제3방면군장은 진한장(陳翰章)이었다. 일본군과 만주군은 1939년 10월부터 1941년 3월까지 1년 6개월간 더욱 강하게 동북항일연군 토벌 작전을 전개했다. 이때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양정우가 1940년 2월 23일 몽강현(濛江縣) 남쪽 490고지에서 사살되었다. 그는 부하 몇 명만을 거느린 채 끝까지 항전하다 죽었다. 양정우가 죽자, 부사령관 위극민, 비서실장 겸 군수처장 오성륜,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 등 11명의 동북항일연군 수뇌부는 1940년 3월 사령관 양정우 사후 문제를 논의했다. 첫째 군은 대중 속으로 들어가 병력 획득 공작을 벌인다. 둘째 소부대로 분산하여 가능하면 북상하여 제2·3로군과 합류한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이때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은 부대를 10명 이하의 여러 개의 소부대로 나누어 북상하도록 하면서 모두 '김일성 부대'라는 명칭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에 김성주가 속한 소부대도 '김일성 부대' 명칭을 사용하면서 소련 방향으로 이동하였다. 이 무렵 일본군과 만주군은 머리를 빗는 식의 섬멸 작전을 뜻하는 빗질 작전, 쇠파리처럼 끝까지 따라붙는다는 쇠파리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제1로군 제1방면군장 조아범이 1940년 4월 8일 부대 내 한중간 민족 대립으로 한인 부하로부터 암살당했다. 제3방면군장 진한장은 1940년 12월 8일 일본군에게 사살되었다. 제1로군 사령관 비서실장 오성륜은 1941년 1월 30일 일본군에게 투항했다. 군 수뇌부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자, 동북항일연군은 급속하게 무너졌다. 1941년 3월 말 기준 유기 시체 1282구, 투항 1040명, 체포 890명의 손실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은 부대를 여러 개의 소조직으로 재편하여 각자도생식(各自圖生式: 제각기 살길을 도모함)으로 도주하여 소련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하였다. 이때 소련으로 도주한 동북항일연군은 대략 300명이었다. 주요 인물을 살펴보면, 제2로군 총사령 주보중(周保中), 제3로군 총사령 장수전(張壽錢), 제2로군 참모장 최용건(崔庸健), 그리고 문제의 김성주와 그의 처 김정숙(金靜淑)도 이들 무리에 끼어있었다. 1940년 11월이었다.  /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 2026-03-09 06:00
사진
배우 이재룡, 강남서 사고 뒤 도주 [서울=뉴스핌] 김가희 기자 = 서울 강남에서 교통사고를 낸 뒤 현장을 떠난 배우 이재룡이 경찰 조사에서 음주운전이 아니었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8일 경찰에 따르면 서울 강남경찰서는 도로교통법 위반(사고 후 미조치) 혐의로 이씨를 조사하고 있다. 이씨는 지난 6일 오후 11시께 서울 강남구 청담역 인근 도로에서 차량을 운전하던 중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은 뒤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현장을 떠난 혐의를 받는다. 이재룡. [사진=CJ E&M] 사고 이후 이씨는 차량을 자택에 주차한 뒤 지인의 집으로 이동했다가 경찰에 의해 발견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이 실시한 음주 측정 결과 이씨의 혈중알코올농도는 면허 정지에 해당하는 수준으로 나타났다. 다만 약물 간이 검사에서는 음성 반응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경찰 조사에서 "운전 당시 음주 상태가 아니었다"는 취지로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차량 블랙박스 영상 등을 토대로 사고 당시 상황과 음주 여부 등을 확인하고 있다. 한편 이씨는 과거에도 음주와 관련한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2003년 강남에서 음주운전 사고를 낸 뒤 음주 측정을 거부해 면허가 취소됐고, 2019년에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강남의 한 볼링장 입간판을 파손해 재물손괴 혐의로 검찰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rkgml925@newspim.com 2026-03-08 15:03
기사 번역
결과물 출력을 준비하고 있어요.
종목 추적기

S&P 500 기업 중 기사 내용이 영향을 줄 종목 추적

결과물 출력을 준비하고 있어요.

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이 내용에 포함된 데이터와 의견은 뉴스핌 AI가 분석한 결과입니다. 정보 제공 목적으로만 작성되었으며, 특정 종목 매매를 권유하지 않습니다. 투자 판단 및 결과에 대한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주식 투자는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으므로, 투자 전 충분한 조사와 전문가 상담을 권장합니다.
안다쇼핑
Top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