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분 5% 이상 기업 230곳, 반대 급증 추세
[뉴스핌=이강혁 기자] #. 삼성물산, 호텔신라, 제일모직, 신한금융, 하나금융…. 이들 산업·금융권 주요 회사들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국민연금이 최대주주라는 점이다. 새 정부의 공적 연기금 의결권 행사 강화가 본격화되면 어떤 행태든 경제민주화 원칙의 영향력 안에서 이들은 시장의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지난 21일 큰 틀의 공적 연기금 의결권 행사 강화를 새 정부의 국정과제에 포함시켜 발표했다. 세부안을 내놓지는 않았지만 산업·금융권에서는 '관심'과 '근심'이 교차한다.
시장경제가 투명해지면서 질서가 제대로 잡힐 것이라는 관심부터 민간의 경제활동에 나라가 개입하는 성격으로 정치적 의도나 특정이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근심도 나오고 있다.
때문에 인수위는 '독립성 강화'를 전제로 내세웠다. 하지만 국민연금이 보유한 주식의 수만큼 기업들에게는 새 정부의 입김이 무게감 있게 다가온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의결권 행사의 남용을 막기위한 세부지침과 제도적 장치가 새 정부의 입장만을 강조하기 보다는 기업논리의 경영적 판단에서도 제시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22일 인수위와 관련업계, 금융감독원 전자공시 등에 따르면 국민연금이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기업은 230곳에 달한다. 이중 10대그룹 계열의 상장사는 53곳 정도다. 이런 맥락에서 연기금의 의결권 행사가 강화되면 적잖은 현안에서 기업들은 경영적 결정사항을 두고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도 지난해부터 의결권 행사를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공시한 의결권 행사내역을 보면 이런 분위기는 어렵지 않게 엿보인다.
국민연금은 지난 한해 동안 총 2565건의 의결권을 행사했다. 이 가운데 찬성은 82.8%, 반대는 17.0%, 중립은 0.2%이다. 이는 예년에 비해 찬성표는 줄고 반대표는 크게 늘어난 것이다.
단적으로 2011년에는 2175건(찬성 93.0%, 반대 7.0%), 2010년 2153건(찬성 91.9%, 반대 8.1%), 2009년 2003건(찬성 93.1%, 반대 6.6%, 중립 0.3%), 2008년 2010건(찬성 94.5%, 반대 5.4%, 중립 0.1%) 등이다.
사실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강화는 박근혜 당선인의 공약이라는 점에서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여진다. 경제민주화의 연장선에서 공적 연기금의 주주권 역할모델은 예견된 부분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오너십 경영이 자리잡은 상황에서 전횡으로부터 주주의 권익을 보호하겠다는 것에 대놓고 반발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의결권 행사 강화의 실천 원칙은 국민경제에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효과를 극대화하고 기업의 장점은 살리되 잘못된 점을 바로잡겠다는 경제민주화의 방향성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이와 관련, 인수위 측은 "국민연금 기금운용체계를 개선하고, 독립성 강화를 전제로 국민연금 등 공적 연기금의 의결권 행사를 강화하겠다"며 "대표소송제기권 등 주주권은 일정 기준에 해당하는 기업에 한해 적법한 절차에 따라 행사하도록 한다"고 공표했다.
이는 의결권 행사에서 정치적 의도가 개입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일종의 약속이자, 적법한 절차에 따라서 혹여 발생할지 모를 논란을 철저히 배제하겠다는 뜻이다. 기업의 경영에는 능동적으로 참여하면서도 정부의 이해관계에 따라 경영 자체를 흔들지는 않겠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여야 하는 기업들의 온도차는 분명하다. 새 정부가 연기금의 의결권 남용 문제점을 어떻게 해소할지 지켜보겠다며 아직은 숨죽이고 있지만 세부안이 구체화되면 집단적인 저항도 배제할 수 없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국민연금의 투자는 기업들에게 호재로 인식됐다. 국민연금이 투자를 했다고 하면 기업의 성장성과 미래가치가 인정된 것으로 받아들여져 투자자들이 몰리는 현상도 종종 벌어졌다.
국민연금의 심의·의결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가 2005년부터 사외이사의 시차임기제 등 적대적 경영권 인수 시도에 대항하기 위한 제도에 '원칙적 반대'를 지침으로 정해놓고, 주주가치 훼손을 이유로 인수합병에도 관대하지 않는 방향성을 설정했지만 제대로 행사된 사례는 많지 않다.
기업들의 걱정은 그만큼 덜했다. 단적으로 지난해 하이닉스의 최태원 SK그룹 회장 이사 선임은 이같은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경제민주화 열풍 속에서도 의결권 강화 분위기가 흘렀지만 국민연금은 최 회장이 횡령과 배임 혐의로 기소된 상태였음에도 중립 의견을 내놨다.
경제개혁연대 등 주주로 활동하는 시민사회는 최 회장의 이사 선임은 지배구조리스크 심화와 주주가치 훼손 가능성이 높다며 반대의견을 분명히 했던 사안이다.
그러나 올해 초 분위기는 완전히 반전됐다. 의결권을 보다 적극적으로 행사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드러나고 있는 것. 동아제약 건은 대표적이다. 기업들은 의결권 행사가 강화되면 경영활동 위축이 불가피하다며 우려감을 크게 나타내고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주주가치 훼손이라는 것이 국민연금의 심의와 의결을 맡은 외부 전문가의 판단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럴 경우 의결권 행사 남용을 제대로 견제하기는 어렵다지 않겠냐"며 "투자를 해놓고 경영에 너무 깊숙히 관여하며 목소리를 내면 결과적으로 주가에도, 국민연금의 수익성에도 무엇이 도움될지 모르겠다"고 푸념했다.
이와 관련, 익명의 한 연기금 관계자는 "기금운용의 위원회 전문성이나 독립성, 행사와 관련된 지침 등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현재로서는 말하기 어렵다"며 "다만 운용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부분에서는 운용체계 개선의 방향성을 제대로 가져가지 못하면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견해를 나타냈다.
[뉴스핌 Newspim] 이강혁 기자 (ikh@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