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도쿄 올림픽이 개최되었을 때, 일본은 더 이상 패전 직후의 폐허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고도경제성장은 이미 사회 전반의 풍경을 바꾸어 놓았고, 도쿄와 오사카를 시속 200km가 넘는 속도로 잇는 세계 최초의 고속철도 도카이도 신칸센 개통, 수도고속도로망 건설, 대규모 도시 재개발은 일본의 경제적 재건을 세계 만방에 가시적으로 증명했다.
이미 1956년 경제기획청 경제백서의 주역인 경제학자 고토 요시카즈(後藤誉之助)와 우치노 센사부로(内野せん三郎) 등이 선언했듯 '이제 전후는 끝났다(もはや戦後ではない)'라는 규정은 단순한 수사가 아닌, 복구 수요를 넘어 기술 혁신과 민간 설비투자가 주도하는 새로운 성장 궤도로의 진입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60년 이케다 하야토 내각의 국민소득배증계획으로 더욱 가속화된 일본 경제는 일본은행의 공식 집계대로 1956년부터 1964년까지 연평균 9%를 웃도는 경이적인 고성장을 질주했다. 아시아 최초로 열린 도쿄 올림픽은 단순한 스포츠 제전을 넘어, 전범국이자 패전국이라는 오명을 벗고 평화롭고 번영하는 첨단 산업국가로서 국제무대에 화려하게 복귀했음을 대내외에 각인시킨 결정적 분수령이었다.
이러한 폭발적인 성장 모멘텀은 올림픽 이후에도 지속되어, 1968년 일본은 마침내 라인강의 기적을 주도하며 유럽 최강으로 군림하던 서독의 국민총생산(GNP)마저 추월했다. 이는 자본주의 진영에서 미국에 이어 명실상부한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올라섰음을 의미했으며, 비서구권 국가가 근대 서구 선진국을 앞지른 전후 세계사적 대사건이었다.
미국의 정치경제학자 찰머스 존슨(Chalmers Johnson)이 1982년 저서 《통산성과 일본의 기적(MITI and the Japanese Miracle)》에서 분석했듯, 이는 통상산업성(MITI)을 중심으로 한 정교한 산업정책과 관민 협력이 빚어낸 계획지향적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 모델의 승리였다. 패전으로 군사제국을 상실했던 국가가 불과 20여 년 만에 제조업과 수출 경쟁력을 무기로 한 '경제대국'이라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강대국으로 부활한 것이다.
철강, 조선, 가전,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세계 최고 수준의 품질과 생산성을 확보한 일본의 산업 생태계는 훗날 사회학자 에즈라 보겔(Ezra Vogel)이 1979년 저작 《일등국가 일본(Japan as Number One)》에서 극찬하게 될 '팍스 자포니카(Pax Japonica)'의 단단한 초석이 되었으며, 군사력이 아닌 막강한 경제력과 기술력으로 국제 질서의 핵심 축을 담당하는 유례없는 황금기의 서막을 열었다.

일본이 일궈낸 눈부신 경제성장의 과실은 1955년 보수합당 이래 수십 년간 이어진 자유민주당(자민당)의 장기집권이라는 온상 속에서 영글었다. 경제가 팽창할수록 그 성장의 파이를 어디에,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자민당 정부의 권한은 막강해졌다.
비교정치학자 T. J. 펨펠이 1990년 편저 《일당지배체제의 비범성(Uncommon Democracies: The One-Party Dominant Regimes)》과 1998년 명저 《체제 이행 체제: 일본의 정치경제 재편(Regime Shift: Comparative Dynamics of the Japanese Political Economy)》에서 날카롭게 분석했듯, 전후 일본의 본질은 단순한 자민당의 장기집권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보수정치와 고위 관료, 그리고 금융·대기업을 아우르는 재계가 견고하게 결합한 거대한 '역사적 제도 연합'이었다. 이 연합은 정책의 일관성과 고도성장을 견인하는 강력한 추진체였지만, 노동과 야당을 의사결정의 핵심 통로에서 배제한 채 정·관·재가 유착하는 폐쇄적 카르텔을 낳았다.
이 카르텔을 완성한 결정적 고리가 바로 '아마쿠다리(天下り)'였다. 본래 '신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강림한다'는 일본 신화 속 천손강림(天孫降臨) 설화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고위 관료가 관직이라는 '하늘'에서 민간 대기업이나 유관 단체라는 '지상'으로 낙하산처럼 내려앉아 막대한 보수와 권세를 누리는 구조적 결탁을 비꼬는 표현으로 굳어졌다.
관료는 퇴임 후 안락한 자리를 보장받기 위해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고, 기업은 전직 관료의 인맥을 활용해 규제를 피하며 이권을 챙겼다. 결국 장기집권의 안정과 경제성장의 화려한 그늘 아래서 '자금과 이권, 낙하산 인사'가 맞물린 구조적 부패의 고리가 완성된 것이다.
이제 이 글에서는 일본 중의원(衆議院) 회의록이라는 사료를 통해 의회 속기록에 각인된 시대적 언어의 변질과 부패의 흔적들을 짚어보고, 왜 눈부신 경제성장의 이면에서 일본 정치민주주의의 질적 발전은 그토록 지체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경제대국의 총리, 사토 에이사쿠와 부딪힌 의회
1964년 도쿄 올림픽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그해 11월 총리 자리에 오른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의 7년 8개월은 일본 고도성장의 화려한 정점이었다. 경제가 연일 신기록을 갈아치우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라는 찬사가 쏟아지던 시절, 중의원 본회의장의 공기는 번영의 환호 대신 날 선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굳어 있었다.
한일 국교정상화, 비핵 3원칙, 그리고 패전의 마지막 상처였던 오키나와 반환 협상이 도마 위에 오른 국회 회의록을 펼치면, 갓 솟아오른 경제대국의 오만한 자신감과 미국의 거대한 안보 그늘 아래서 "우리의 주권은 과연 온전한가"를 처절하게 캐묻는 의원들의 격렬한 육성이 생생하게 메아리친다.
이 시기 의회 속기록에 박힌 언어들은 군부의 서슬에 질려 입을 닫아야 했던 전전(戰前) 제국의회와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제국의회에서 외교와 군사는 성역이었다. 사이토 다카오(斎藤隆夫)처럼 감히 군부의 독주를 물고 늘어진 의원은 '비국민(非国民)'의 낙인이 찍혀 단상에서 끌려 내려왔고, 외교는 '국체의 생존'이라는 신비주의적 언어 뒤로 숨어버렸다.
그러나 전후 중의원 본회의장의 풍경은 완전히 달랐다. 1967년 12월 11일, 사토 총리가 훗날 노벨평화상의 알리바이가 된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고, 만들지 않으며, 들여오지 않는다'는 '비핵 3원칙'을 처음으로 천명하던 날, 단상 아래 야당 의석에서는 박수 대신 의혹에 찬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야당 의원석: "총리, 말장난은 그만두시오! 오키나와에 이미 배치된 미군의 핵은 어쩔 셈인가! " (장내 소란, 박수와 야유 교차)
사토 에이사쿠 총리: "정부는 핵무기를 일절 들여오지 않는다는 방침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오키나와 역시 본토와 동일한 조건으로 반환받을 것입니다." (여당 의석에서 "옳소!", 야당 의석에서 "거짓말 마라!", 의장 종을 울려 장내 정리) – (설명: 일본 국회 본회의장에는 한국 의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의사봉이 없다. 대신 의장석에는 소란을 진정시키고 회의 질서를 잡기 위한 손종, 즉 '진령(振鈴)'이 놓여 있다. 속기록에 적힌 '의장 종을 울림'이라는 지문은 의사봉의 건조한 타격음 대신, 찢어질 듯 울려 퍼지는 종소리로도 쉽게 가라앉지 않던 1960년대 의회 공방의 소용돌이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외교와 군사, 핵 안보라는 국가 최고 기밀의 영역이 백주대낮에 국민의 대표인 의원들의 집요한 심문대로 끌려나온 것이다. 전전의 군부가 "국가 안보에 입을 떼는 것 자체가 반역"이라며 의회를 협박했다면, 전후의 사토 총리는 단상에 서서 땀을 닦으며 야당 의원들의 송곳 같은 질문에 헌법적 원칙과 주권의 한계를 해명해야 했다.
그러나 '의원이 질문할 수 있다'는 민주주의의 형식적 회복이 곧 진실의 투명성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1969년 11월 26일, 워싱턴에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핵무기 없이, 본토와 동일하게(核抜き・本土並み)' 오키나와를 반환받기로 합의하고 돌아온 사토 총리가 중의원 단상에 섰을 때의 회의록은 전후 일본 민주주의의 깊은 모순을 적나라하게 포착하고 있다.
사회당 의원: "총리! 닉슨과의 공동성명 뒤편에 미국의 비상시 핵 재반입을 묵인한 밀약이 있다는 의혹이 파다합니다! 국민 앞에 한 점 부끄럼 없이 모든 문서를 공개할 수 있습니까!" (장내 고함, 야당 의석 일제히 기립하여 항의)
사토 에이사쿠 총리: "어떠한 비밀 합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본토와 완전히 같은 조건으로, 핵 없이 오키나와가 돌아옵니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여당 의석 우레와 같은 박수, 야당 의석 "위증이다! 사퇴하라!" 외치며 의장석으로 쇄도)
속기록의 괄호 안에 박힌 '장내 소란'과 '고함'이 증명하듯, 의원들은 본능적으로 권력의 숨겨진 은폐를 직감하고 있었다. 훗날 비밀문서가 해제되면서 만천하에 드러났듯, 사토 총리는 이미 닉슨과 비상시 오키나와에 핵무기를 다시 들여올 수 있도록 허용하는 '비밀 합의 의정서(밀약)'에 서명한 상태였다. 단상 위에서 사토가 쏟아낸 엄숙한 평화의 언어는 실상 의회를 기만하고 국민의 눈을 가리기 위해 치밀하게 기획된 '침묵과 거짓의 언어'였던 셈이다.
이 극적인 장면은 일본 민주주의가 직면한 질문의 차원이 근본적으로 진화했음을 웅변한다. 전전 제국의회의 절박한 질문이 "의원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가"라는 '발언권의 유무'였다면, 고도성장기 전후 국회의 질문은 훨씬 더 높고 준엄한 곳을 겨누고 있었다.
"정부는 국민의 대표 앞에서 무엇을 숨기고 있는가", "국가의 성취라는 화려한 수사 뒤편에 가려진 진실은 무엇인가. " 의회에 출석해 질문에 답하는 시늉을 하는 것만으로는 민주주의가 완성될 수 없었다. 국민에게 정직하고 검증 가능한 진실을 내놓지 않는 권력, 번영의 성과로 은폐의 면죄부를 사려 했던 집권당의 기만 앞에서 일본 의회 민주주의는 또 다른 시험대에 오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그렇게 궁금해하는 한일수교에 관해서 당시 일본 중의원의 속기록은 과연 그 역사적 장면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자. 1965년 조약 비준을 앞두고 열린 중의원 본회의장과 특별위원회의 공기는 한일 양국의 과거사 청산과 청구권 자금, 그리고 한반도 안보 지형을 둘러싼 여야의 격렬한 언어로 가득 차 있었다.

*필자 최연혁 교수는 = 스웨덴 예테보리대의 정부의 질 연구소에서 부패 해소를 위한 정부의 역할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스톡홀름 싱크탱크인 스칸디나비아 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매년 알메달렌 정치박람회에서 스톡홀름 포럼을 개최해 선진정치의 조건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그 결과를 널리 설파해 왔다. 한국외대 스웨덴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스웨덴으로 건너가 예테보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런던정경대에서 박사후과정을 거쳤다. 이후 스웨덴 쇠데르턴대에서 18년간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버클리대 사회조사연구소 객원연구원, 하와이 동서연구소 초빙연구원, 남아공 스텔렌보쉬대와 에스토니아 타르투대, 폴란드 아담미키에비취대에서 객원교수로 일했다. 현재 스웨덴 린네대학 정치학 교수로 강의와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좋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민주주의의가 왜 좋을까' '알메달렌, 축제의 정치를 만나다' '스웨덴 패러독스' 등이 있다.
kimsh@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