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방위비·핵잠수함 얽힌 고차방정식
청와대 "진의 파악 중" 신중 접근
[서울=뉴스핌] 김미경 박찬제 기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포함한 우방국들에 공개적으로 군함 파견을 요구하면서 정부의 외교·안보 역량이 시험대에 올랐다.
안보 동맹국으로서 파병 요청을 무시하기도 어렵지만, 관세와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 핵잠수함 도입 등 한미 간 핵심 현안이 복합적으로 맞물려 있어 쉽게 결정할 수 없는 고차방정식이 되고 있다.

◆ 압박 수위 높이는 美의 '군함 파견' 요구…신중론 강조한 5개국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을 포함한 5개 국가에 공개적으로 군함 파견을 요청했다. 미국·이스라엘 대 이란 전쟁으로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자 선박 운행 정상화를 위해 동맹국들에게 군함 파견을 요청한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압박 수위가 높아지고 있어 요청을 받은 국가들의 계산이 복잡해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4일(현지 시간)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여러 국가, 특히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시도로 영향을 받는 국가들은 미국과 함께, 해협을 개방하고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 군함을 보낼 것(will be sending War Ships)"이라고 썼다.
트럼프 대통령은 "바라건대(hopefully), 지도부가 완전히 제거된 국가에 의해 호르무즈 해협이 더는 위협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인위적인 제약(호르무즈 해협 봉쇄)의 영향을 받는 중국, 프랑스, 일본, 한국, 영국, 그리고 다른 국가들이 이곳으로 함정을 보낼 것"이라고 썼다.
'바라건대'라는 전제가 달린 것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의 요청은 공식 요청까지는 아닌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지만, 불과 하루 만에 압박 수위가 높아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15일(현지 시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호르무즈 해협의 혜택을 받는 국가들이 그곳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돕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호르무즈 해협 해방을 위한 군사작전에 동참하지 않는 동맹국에 대해서는 "매우 나쁜 미래"에 직면할 수 있다고 압박하기까지 했다.
같은 날 트럼프 대통령은 미 플로리다에서 워싱턴DC로 향하는 전용기 에어포스원에서 기자들과 만나 "호르무즈해협 안보를 위해 7개 나라와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초기 5개국에서 2개국이 늘어난 7개국을 언급한 것이다. 단, 추가 2개국을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이어 트럼프 미 행정부가 이번 주 중으로 여러 국가가 호르무즈 해협 통과 선박을 호위하는 연합 구성에 합의했다고 발표할 계획이라고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이 이날 보도했다.

한국을 비롯한 각국은 우선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본 외무성은 NHK 방송에서 즉각적인 해군 함정 파견 계획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만, 오는 19일 워싱턴 DC에서 열리는 트럼프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 간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기에, 이 자리에서 논의될 가능성이 있다.
중국 역시 파견 여부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진 않다. 다만 린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16일 정례브리핑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군함 파견 요구에 대해 "각국은 군사 행동을 중단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프랑스는 자국 함선들이 동부 지중해 일대에서 방어적 태세를 유지할 것이라는 입장 정도만 밝혔다. 영국도 아직은 호르무즈 해협 운송 정상화를 위해 미국 측과 다양한 방법을 논의하는 단계로 전해진다.
우리 정부도 신중론을 유지 중이다. 청와대는 지난 15일 "한국과 미국이 긴밀하게 소통하고 신중히 검토해 판단해 나갈 것"이라고 말을 아꼈다. 이규연 홍보소통수석도 16일 브리핑에서 "이번 사안은 아주 신중하게 대처를 하려고 한다"며 "한미 간에 충분한 시간을 갖고, 논의한 뒤 결정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확한 미국의 입장이 우리한테 전달돼야만 하지 않겠나"나 "정확한 진의 파악 중"이라고 덧붙였다.

◆ '트럼프 리스크' 전방위 압박…경제·안보 동시 타격 우려
트럼프 대통령이 지목한 5개국(한국, 중국, 일본, 영국, 프랑스) 중 한국은 가장 까다로운 처지에 놓였다. 미국무역대표부(USTR)가 앞서 11일(현지 시간) 한국을 포함한 16개 경제 주체의 '과잉 생산' 등의 불공정 무역 관행을 파악하고자 무역법 301조에 따른 조사절차를 개시했기 때문이다. 미 연방 대법원이 트럼프 행정부의 상호 관세가 위법이라고 최종 판단하자, 상호 관세를 대체할 방안을 찾은 것이다.
해당 조사는 제조업 분야에서 구조적 과잉 생산 능력과 관련된 특정 경제권의 정책과 관행을 조사하는 것이다. 미국 측은 과잉 생산과 연계해 미국에 불공정한 여러 가지 무역 관행이 드러날 것으로 예상된다는 입장이다. 불공정 무역 관행이 드러나면 이를 통해 관세를 추가로 올리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이에 청와대는 지난 12일 "기존 한·미 관세 합의에서 확보한 이익 균형이 훼손되지 않고 주요국 대비 불리하지 않은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미국 측과 적극 협의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우리 정부는 지난해 미국과의 관세 협상을 통해 총 3500억 달러의 대미 투자를 약속한 대신 미국이 예고한 25%의 상호 관세를 15%로 낮췄다. 향후 있을 추가 관세 협상에서도 상호 관세를 유지하는 것이 관건인데 트럼프 행정부가 군함 파견 요청을 빌미로 관세를 올리거나, 관세를 낮추는 대가로 군함 파견을 요청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청와대의 머리가 복잡해진 이유다.
관세 압박 외에도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이나 우리 정부가 추진 중인 핵추진 잠수함 기술협조, 연료 승인 문제까지 고려하면, 호르무즈 파병 요구는 사실상 '안보-경제 패키지 딜'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만약 파병 요구를 전면 거부할 경우, 당장 반도체와 철강 등 핵심 산업에 대한 관세 폭탄과 환율 압박이 현실화하면서 국내 증시와 실물 경제가 동시에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전문가들 "성급한 결정은 패착…정교한 실용주의 필요"
전문가들은 미국의 압박이 거세더라도 우리 정부가 '선제적 카드'를 던지기보다는 주변국 동향을 살피며 실익을 챙기는 '전략적 인내'가 필요하다고 제언한다.
최창렬 용인대 특임교수는 "미국의 요구를 무시하기엔 우리가 감당해야 할 압박카드가 너무 많지만, 정규군 파병은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고 진단했다. 최 교수는 "아덴만에 있는 청해부대를 이동시키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대안이 될 수 있지만, 이란 측에 이것이 적대 행위가 아닌 '교민과 선박 보호' 목적임을 명확히 설명해 자극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미국에도 위험한 전투 작전에는 불참한다는 조건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과 이란을 모두 자극하는 않는 범위에서 운신의 폭을 정하고, 중국과 프랑스, 영국, 일본 등 4개국의 대응을 주시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김성수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를 '경제와 군사의 동시 압박'으로 규정했다. 김 교수는 "301조 조사가 시작되면 코스피를 지탱하는 반도체·철강 분야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며 경제적 타격 가능성을 경고했다. 또 노무현 정부 당시 파병 사례를 언급하며 "직접적인 전투병력보다는 수송이나 군수 지원 등 비전투 영역의 협력을 첫 시도로 고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다만, 이란의 반발로 상황이 악화될 시 '어쩔 수 없는 개입'으로 이어질 시나리오에 대한 대비책도 주문했다.
신범철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미국의 요구가 '전쟁 수행'인지 '평화 유지'인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신 수석연구위원은 "전투 활동이라면 신중해야 하지만, 전쟁 종료 후 안정화를 돕는 평화유지활동(PKO) 차원이라면 참여 명분이 충분하다"며 "오는 19일로 예정된 일본의 결정과 미국 측의 구체적인 작전 기간을 확인한 뒤 대응해도 늦지 않다"고 속도조절을 중시했다.
일각에서는 안보를 통상 압박과 연결하는 미국의 전략에 휘말리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김양희 대구대 경제금융통상학과 교수는 "파병은 안보, 301조는 통상으로 분리해서 대응하는 것이 원칙"이라며 "미국이 원하는 대로 다 해준다고 해서 관세 문제가 해결된다는 보장이 없다"고 꼬집었다. 김 교수는 지목된 5개국 간의 공조를 통해 '다자적 대응'을 할 것을 제안했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 역시 "지금은 성급하게 움직여 선례를 남길 때가 아니다"라며 현재 정부의 신중한 기조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최 원장은 "한미동맹이라는 축은 유지하되, 경제적 실리를 위해서는 '밀고 당기기'가 필수적인 시점"이라며 "이재명 정부가 표방한 '국익 중심 실용외교'가 실제 성과로 이어질지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the13ook@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