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조선소 진수식에서 초유의 사태
'대양 해군' 운운하다 스타일 구겨
무리한 일정 재촉이 화 불렀다는 지적
"내달 원상복원" 지시했지만 불투명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지난 22일 오전 서울의 대북 관측통들과 북한 전문가, 언론 관계자들은 뭔가 심상치 않은 징후를 감지했다.
매일 아침 6시를 전후해 업데이트되는 북한 노동신문의 인터넷 기사가 업로드 되지 않은 때문이다. 의문은 오전 9시 가까운 시간이 돼서야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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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지난 21일 함북 청진조선소에서 진수식 행사 도중 사고가 발생해 전도된 북한 5000t급 신형 구축함의 모습. 북한 당국이 푸른색 위장막을 덮어놓았다. [사진=비욘드페럴렐]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2025.05.25 yjlee@newspim.com |
하루 전 김정은이 함북 청진조선소에서 열린 5000t급 신형 구축함의 진수식에 참석했는데 그 과정에서 '엄중한 사고'가 발생했다는 게 노동신문과 관영 조선중앙통신 등 북한 매체의 보도였다.
건조를 마친 선박을 물에 띄우는 진수 과정에서 바다로 미끄러지게 도와주는 받침대 역할을 하는 '진수썰매'가 이탈돼 사고가 났다는 게 북한 측 설명이다.
이번 사고는 김정은이 참관한 가운데 벌어졌다는 점에서 관련자들이 줄줄이 구속되는 등 북한 권력 내부와 주민들 사이에서도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분위기다.
또 지난 4월25일 첫 5000t급 구축함을 서해 남포조선소에서 선보이면서 김정은이 대양해군 운운하는 발언까지 한 마당에 동일한 급의 2번함이 대형 사고를 내면서 스타일을 구겼다는 평가가 나온다.
①감춰도 될 텐데 왜 공개했을까
이번 사태와 관련해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북한이 사고발생 사실과 김정은의 참관, 그리고 사고에 대한 그의 언급 내용까지 신속하고 비교적 상세하게 알리고 나섰다는 점이다.
북한 매체들은 관련 보도 내용을 '새로 건조한 구축함 진수식 진행'이란 제목으로 전해 마치 정상적인 함정 진수가 이뤄진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심지어 이 기사를 노동신문과 중앙통신 홈페이지 첫 머리에 자리한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의 혁명활동 소식'이란 코너에 올려 놓았다.
북한의 사고 사실 공개는 첫째로 불미스런 일이라도 감추지 않고 정면 돌파 하겠다는 김정은식 대처법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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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북한이 지난 4월25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진수식을 한 5000t급 신형 구축함 최현호의 모습. 21일 진수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한 구축함은 최현급 2호함으로 추정된다. [사진=조선중앙통신] 2025.05.22 yjlee@newspim.com |
앞서 김정은 위원장은 수차례 미사일과 군사정찰위성 발사 실패 때 즉각 그 사실을 관영매체로 전한 경우가 있다.
일시적인 난관이나 사고로 인한 실패를 극복하고 결국 해낸다는 점을 부각시켜 자신의 리더십 공고화에 활용하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김정은이 사고에 대해 "용납할 수 없는 심각한 중대사고이며 범죄적 행위"라며 격앙된 반응을 보이면서도 6월에 소집 예정인 노동당 전원회의 전까지 원상 복구하라고 지시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지난 1월 노동당 비서국 회의 때 당 간부들의 비리 혐의가 드러나 철저한 조사와 엄벌을 지시했고, 김정은이 측근인 조용원 당 조직담당 비서와 이일환 비서를 책벌하는 조치를 취했는데도 이번 사고가 벌어지자 간부 기강잡기 차원에서 사태를 주민에게까지 알리고 대처하고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둘째는 한미 정보 당국의 대북감시망이 북한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상황에서 5000t급 군함이 항구에 쓰러져 있는 모습을 감추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공개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공연히 사실을 감추는 데 급급하다가는 한국 군 당국이나 서방 언론 등에 의해 공개돼 더 큰 망신을 당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 북한의 발표 몇 시간 뒤 미국의 민간 위성들은 관련 사진을 공개했고, 한국 국방부도 청진항에서의 선박 건조 및 진수 관련 동향을 면밀히 추적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②무리한 진수 강행한 배경은
민간 상선이던 군함이던 이를 제작‧진수하는 조선업체나 항구는 나름대로의 건조 능력을 갖고 있다.
이번에 사고가 발생한 청진항은 북한의 대표적 항구 중 하나로 그동안 1만t급 수준의 상선도 만들어 진수해 온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런데 5000t급 구축함의 진수 과정에서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내고 말았다.
이를 두고 일반 상선과 군함의 특성을 고려하지 못한 진수가 원인일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구축함급 함정의 경우 엄청난 하중의 무기체계를 탑재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반 선박과 다른 구조를 갖고 있어 진수 때 이를 고려한 치밀하고 과학적인 부하 계산 등을 통해 균형을 잃지 않고 미끄러지듯 바다로 밀려들어가는 게 중요한데 이 부분에서 치명적인 실수가 발생했을 수 있다.
실제로 북한 매체들은 "미숙한 지휘와 조작 상 부주의로 인해 대차 이동의 평행성을 보장하지 못했다"며 진수 과정에서 결함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북한으로서는 상당한 규모인 신형 구축함을 건조‧진수하면서도 비교적 안전한 방식인 드라이 독(Dry Dock)이 아닌 상당한 위험이 따르는 횡(橫)진수 방식을 택한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드라이 독은 물을 빼낸 풀장 같은 거대한 독에서 선박을 건조한 뒤 물을 채워 넣는 방식으로 진수를 하기 때문에 안전성이 담보된다.
하지만 배를 옆으로 밀어 넣는 횡진수나 함미부터 넣는 종진수의 경우는 선체가 심하게 흔들리기 때문에 선박 구조에 무리가 갈 수 있고 심하면 균형을 잃고 침몰하는 경우도 벌어진다.
대북정보 관계자는 "청진항에는 드라이 독이 설치돼 있지 않은데다 횡진수의 경우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어 이를 선택한 게 패착이 된 듯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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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한국군 최초의 세종대왕급 이지스구축함인 세종대왕함(DDG-991)의 진수식이 지난 2007년 5월 25일 울산광역시 현대중공업 제6도크에서 열렸다. 사진은 드라이 독에 물을 채워 넣는 방식으로 진수가 이뤄지는 장면. [사진=HD현대조선] 2025.05.28 yjlee@newspim.com |
③1번함과 2번함을 동시에 건조한 건 무리수
신형 무기체계의 개발이나 도입, 작전배치 등의 과정은 면밀한 실전 테스트와 결함 보완 등의 과정을 거쳐 통상 수 년 간에 걸쳐 완성된다.
군함의 경우는 1번함을 먼저 개발해 시험 운용을 한 뒤 이런저런 구조상의 문제점이나 보완이 필요한 대목을 고쳐가며 2번함을 건조하고 그 이후에는 양산을 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런데 북한은 지난 4월 말 최현급 1번함을 남포조선소에서 선보인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2번함을 띄우려다 낭패를 봤다.
함정 사업에 종사한 경험이 있는 군 관계자는 "이 정도면 북한이 1, 2번함을 동시에 건조했다는 얘기가 된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연초부터 육해공군 부대와 군수공장 등을 연일 돌아다니면서 탱크‧함정‧자폭드론 등을 살펴본 김정은이 새로운 무기체계의 개발을 재촉하고 생산량 증대 등을 강요한데 따라 노동당 군수공업부 등 유관부서에서 무리수를 두다 사고를 자초한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1번함을 서해안 남포조선소에서 건조하면서 2번함은 동해 청진조선소에서 건조한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란 지적이 제기된다.
동시건조일 경우 한 조선소에 나란히 건조하면 효율성을 극대화 할 수 있는데도 굳이 동서해로 나눠 같은 급의 구축함을 만들어 진수하다 화를 당했다는 점에서다.
이 때문에 북한의 조선소가 신형 군함을 동시에 건조할 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때문이란 지적이 나온다.
북한의 보도를 보면 청진조선소도 독자 능력이 아니라 인근 나진조선소의 도움을 받아 진수에 실패한 함정을 건조한 것을 알 수 있다.
④진수탯줄을 남자가 자른 게 화근?
북한은 지난달 25일 신형 구축함 최현호를 선보일 때 진수 밧줄을 노광철 국방상이 자르는 파격을 연출했다.
당시 북한TV와 조선중앙통신이 전한 영상에는 국무위원장 김정은과 그의 딸 주애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군 정복 차림의 노광철이 금색도끼로 밧줄을 찍어 절단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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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노광철 국방상이 지난 4월25일 남포조선소에서 열린 신형 구축함 진수식에서 도끼로 진수 밧줄을 자르고 있는 모습을 국무위원장 김정은과 그의 딸 주애가 지켜보고 있다. [사진=조선중앙통신] 2025.05.28 yjlee@newspim.com |
이는 배의 첫 출항을 알리는 행사에서 여성이 주인공격인 진수자(sponsor)를 맡아 '탯줄'을 끊어주는 관례를 깬 것으로 북한이 이런 선택을 한 주목받았다.
선박의 첫 출항을 알리는 진수식에서는 일부 중동국가를 제외하고 동서양 모두 관례적으로 여성을 대모(代母)로 정해 도끼로 밧줄을 자르는 액싱(axing) 의식과 함께 샴페인 브레이킹(champagne breaking) 행사로 안전운항을 기원한다.
이는 중세 북유럽의 바이킹족이 선박의 안전한 항해와 풍요를 기원하면서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에게 처녀를 제물로 바친 데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져 온다.
우리의 경우 대통령 부인이나 조선소 사장 또는 현장 책임자의 배우자, 노조위원장의 부인 등이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앞서 북한은 2023년 9월 동해함대사령부에서 최초의 전술핵공격잠수함으로 주장하는 이른바 '김군옥영웅함''의 진수식을 하면서 최선희 외무상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바 있다.
그런데 이번에 2번함이 진수과정에서 사고로 전도되는 상황을 맞자 선박 관련 종사자들과 일부 호사가들은 노광철을 '소환'하고 있다.
김정은이 군부를 내세워주려다가 선박 진수의 오랜 관행을 깨트리는 '불경죄'를 저지른 것이란 얘기다.
⑤ "6월까지 수습" 공언한 김정은...또 다른 무리수?
김정은은 사고 직후 "구축함을 시급히 복원하는 건 단순한 실무적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권위와 직결된 정치적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노동당 전원회의가 열릴 6월까지 무조건 완결할 것을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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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월27일 노동당 본부청사에서 열린 당 제8기 30차 비서국 확대회의에서 간부들이 앉아있는 좌석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뭔가 지시하고 있다. [사진=조선중앙TV 화면 캡처] 2025.02.13 |
북한 노동당은 일 년에 두 차례 전원회의를 열어 사업결산을 하는 데 통상 6월 말쯤 열리는 전원회의에서 이번 사태를 다루겠다는 얘기다.
하지만 한 달 남짓한 기간에 항구와 바다에 걸쳐 완전히 누워버린 5000t 급 구축함을 수습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는 게 군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무엇보다 북한이 대형선박을 견인할 크레인 등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는데다 그동안 보유하지 못했던 급의 군함을 인양‧구조하는 노하우가 없을 것이란 점에서다.
현재 문제의 함정에는 북한이 파란색 방수포를 덮어놓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고, 일각에서는 대형 풍선을 매달아 견인하는 방법을 동원하려 하고 있다는 관측을 제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김정은이 격노하고 조기 수습을 지시한터라 북한 당국은 해군 특수요원 등을 총동원해 선박의 인양작업을 서두를 것으로 보이지만 만만치 않은 난관이 따를 것이란 견해가 지배적이다.
배 바닥 부분에 파공(구멍)이 발생했고 함의 균형이 파괴됐다는 북한 매체의 보도를 토대로 보면 김정은이 언급한 "시급한 원상복원"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깊은 항구에 선박 상당 부분이 빠진 상태라 주요 기관 등에 침수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고 진수사고 과정에서 선체의 비틀림이나 충격 등으로 이를 그대로 복원해 사용한다는 건 쉽지 않다는 점에서다.
대북정보 관계자는 "위성 영상 등을 토대로 볼 때 심각한 손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높아 절단 및 해체 방식을 통한 수습 작업에 나설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말했다.
yjlee@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