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벽두 어수선하게 만든 간첩단 사건
'남조선 혁명' 에 빠진 안타까운 사람들
국가안보 내팽개친 文정부 책임 없을까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남북한에서 각기 교육받은 사람을 식별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ㅌ⋅ㄷ'다. 이를 '티읕, 디귿'이라고 발음한다면 그는 남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 북한 체제에서 공부한 사람이라면 '트드'라고 읽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곧이어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라고 장광설이 이어져야 한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북한에서 ㅌ⋅ㄷ는 '타도제국주의동맹'을 의미한다. 김일성이 14살 나던 때인 1926년 결성했다는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조직이다. ('제국'인데 왜 'ㄷ' 이냐고 궁금해 한다면 당시 표기방식이 '뎨국'이었음을 떠올리면 된다. 한말의 대표적 민족주의 성향 일간지는 '뎨국신문'이었다.)
ㅌ⋅ㄷ를 토대로 세를 불려 결국 북한 정규군인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발전했고, 노선노동당의 전신인 조선공산당 창당 작업까지 이어졌다는 주장이니 북한 입장에서는 나름 그 의미가 각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북한은 1926년을 현대사의 기점으로까지 내세우고 있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허구에 찬 김일성 우상화와 북한 체제 정통성 조작을 위한 역사 날조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자랑찬' 역사를 1968년 출판된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에 와서야 처음 등장시켰다는 점에서도 짜깁기식 왜곡 선전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새해 벽두부터 간첩단 사건으로 정국이 어수선하다. 국가정보원과 경찰 당국이 지난해 말부터 제주와 창원⋅진주⋅전주 등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혐의자와 관련 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압수수색과 수사를 벌여왔는데 전국 규모의 간첩 조직으로 파악되면서 충격을 던지고 있다.
핵심인 제주 조직은 총책인 강 모(여)가 2017년 7월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서 북한 대남 공작부서인 문화교류국 공작원 김명성으로부터 지령을 받고 귀국해 지하조직을 결성함으로써 활동이 본격화 했다는 게 공안당국이 밝혀낸 내용이다.
그런데 이 조직의 명칭이 'ㅎㄱㅎ'으로 드러났다. 5년 뒤인 2022년 9월 노동 부문 지하조직인 '한길회'가 결성되는 데 이를 토대로 ㅎㄱㅎ이 한길회의 약칭일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2022년 10월 대북보고에 '조국통일의 한길을 가겠다'는 대목이 나오는 것으로 미뤄 어느 정도 사실일 가능성이 있지만 더 정확한 의미는 수사가 진행돼야 할 것이란 게 관계자의 귀띔이다. ㅎㄱㅎ의 하부조직 이름이 이미 한길회란 점에서 좀 더 은밀한 다른 뜻이 담겨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ㅎㄱㅎ을 접하면서 무려 100년 가까이 흐른 시절의 ㅌ⋅ㄷ를 소환하게 된 건 '남조선 혁명'이란 미몽에 사로잡힌 일부 좌파 진영과 노동⋅학원 등 각계 친북 성향 인사들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다.
이들은 김정은을 '총회장님'이라 칭하고 북한 대남공작의 행동대장격인 문화교류국을 '연구원'이라 불렀다. 조직인 ㅎㄱㅎ을 '대학원'으로, 조직원은 '대학원생'으로 각각 이름 붙였다. 제주를 'ㅈㅈ'으로 부르기도 했다는 게 수사 관계자의 설명이다.
북한 체제와 주체사상, 김정은식 통치방식에 매료된 듯한 국내 인사들은 노동당의 지시에 수족처럼 움직였다. 우리 내부의 동향이나 정보를 들고 나가 가방 채 전달하는가 하면 암호프로그램이나 클라우드 등을 활용한 방식으로 통신⋅회합을 하기도 했다. 수만 달러의 공작금을 전달받아 국내에서 환전한 뒤 써버린 정황도 드러난다. 법원도 압수수색 영장을 발급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구체적 증거가 쌓여있다고 한다.
국정원과 경찰의 수사 내용을 보면 이들은 이미 대한민국의 구성원이 아니었다. 대한민국과 5000만 국민을 핵으로 겁박하고 나선 북한 김정은을 향해 "총회장님에 대한 흠모심" 운운한 건 이미 정상적 사고를 벗어났다는 걸 의미한다. 하루하루 가족·친지들과 어울리면서 한국 사회의 번영과 안락함을 누렸지만 마음 속으로는 체제전복을 꿈꾸고 북한식 대남혁명의 조력자가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노동당의 행동대원에 불과했던 셈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공안 탄압" 운운하면서 국정원과 경찰이 과거 공안사건에서 강압적인 모습을 보였거나 수사과정에서 불미스런 일이 발생했던 일부 사례를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압수 수색 과정에서 국정원 요원들이 '국가정보원'이라고 쓰여진 유니폼을 착용했던 점까지 문제 삼고 나섰다. 미 연방수사국이 사건 현장에서 'FBI' 차림을 하는 선진형 모델을 적용한 것인데도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으며 의혹 아닌 의혹을 부풀리려 하고 있다.
정치적 성향이나 사회⋅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정권이나 정당⋅대통령에 대한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다. 또 그 의사표시를 집회나 시위를 통해 드러낼 수 있는 길도 자유민주 체제인 대한민국에서는 한껏 열려있고 보장돼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체제를 무너트리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북한 정권에게 기밀을 넘기고 그 수괴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언사를 일삼는다면 그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 '민주'를 내세우면서도 3대 세습의 북한 독재자와 노동당 통치를 찬양·추종하고 주민의 인권을 탄압하고 짓밟는 정권을 위해 암약했다니 말이다.
이들의 행태 못지않게 안타까운 건 북한의 평화공세에 현혹돼 국가안보를 내팽개치다시피 한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와 국정원, 그리고 그 책임자들이다. 이번에 드러난 간첩단 조직과 그 핵심들이 본격적으로 북한과의 연계에 나서고 국내망을 구축한 게 문 정권이 들어선 시기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한 김정은이 평창 동계올림픽에 동생인 김여정을 특사로 보내고 선수단과 예술단을 파견하는 유화 공세를 펼칠 때 문재인 대통령과 그 참모들은 안보의 방벽에 빈틈이 없나 더 꼼꼼히 챙겼어야 한다. 판문점 정상회담에 이어 평양과 백두산에서 김정은의 미소와 악수를 마주할 때 국정원장과 안보실장이 서 있어야 할 곳은 대공과 안보전선이었다.
하지만 회담 테이블에서의 감언이설과 공산주의식 용어혼란 전술이 휘감긴 비핵화 '약속'에 현혹된 대통령과 참모들은 안보를 지켜내지 못했다. 전국 규모의 간첩조직이 전염병처럼 창궐하고 탈북 청년은 강제북송 당하고, 우리 공무원이 북한군에 의해 총격을 받고 무참히 숨져가는 아수라장을 이제 국민들은 녹화영상을 통해 현실로 목도하고 있다.
그리고 책임을 준엄하게 따져 묻고 있다. 혹한의 겨울에 영어의 몸이 된 국정원의 전직 수장과 핵심 관계자, 그리고 여전히 침묵하며 아닌 보살하는 전직 대통령을 향해서다. 오래전 박제됐어야 할 ㅌ⋅ㄷ를 ㅎㄱㅎ으로 되살리려 한 세력에게 자양분이 되고 온실 역할을 한 사람들이 과연 누구였는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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