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오영상 국제부장 = 얼마 전 한 일본 일간지에 실린 '망향의 유골 우키시마마루와 일한(望郷の遺骨 浮島丸と日韓)'이란 기사를 접했다.
태평양전쟁 직후인 1945년 8월 24일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 수천 명을 태우고 부산으로 향하던 수송선 우키시마호(우키시마마루)가 해상에서 갑자기 폭발해 수천 명이 사망한 사건에 대한 얘기다.
이때 목숨을 잃은 강제동원 피해자 중 275명의 유해가 도쿄 메구로(目黒)구 유텐지(祐天寺)에 남아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77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의 유해는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올해로 78세가 됐다는 한 유족은 부친이 1944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아오모리(靑森)현 오오미나토(大湊)항으로 강제 동원됐다고 한다. 이후 1971년 정부로부터 부친이 우키시마(浮島)호 사건으로 사망했다는 통지를 받았다.
그러나 도쿄 유텐지에 있는 275명 유골함에는 그의 부친 이름이 없다. 당시 아버지보다 훨씬 나이를 먹은 노구의 아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고 유해도 찾을 수 없다. 그 괴로움은 가히 헤아리기조차 죄스러울 정도다.
그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 좋은 소식이 들려왔으면 좋겠다"며 정부 당국에 계속적으로 유해 반환에 대해 문의를 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담당자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은 "지금은 일본과 교섭이 없기 때문에"라는 냉담한 말뿐이란다.
과거 한일 양국 정부는 유해 반환을 위해 대화와 교섭을 거듭했었다. 한국에서는 2004년 노무현 정부가 설치한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피해자와 유족과의 연락 역할을 했고, 2006년에는 양국 정부가 유해문제협의 조직을 출범시켰다.
2008년에서 2010년에 걸쳐 유텐지에 있던 423구의 유해가 반환됐을 때 한 유족은 일본 정부 직원의 손을 잡고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라고 고마움을 표시했다고 신문은 적었다. 눈물을 흘리는 유족들의 모습을 보고 일본 외교 관계자도 "왜 지금까지 미뤘는지 후회된다"고 심경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2012년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면서 한일 관계는 급격히 냉각됐고 일본 측은 유해 반환을 위한 대화를 중단했다. 한국에서는 2015년 위원회가 해산돼 유해 문제 해결은 추진력을 잃게 됐다.
이후 한일 관계는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 2018년 11월 한국 대법원이 일본 기업에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 판결을 내리면서 갈등은 극에 달했다. 2019년 7월 일본 정부는 반도체 핵심 소재 3개 품목의 한국 수출을 규제하고 한국을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했다.
한국에서는 이에 반발해 시민들이 일본 제품 불매 운동에 나섰고, 정부는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을 '종료 유예'한 상태다. 현재 한일 양국 간에는 정상회담은 말할 것도 없고 실무급에서도 제대로 된 소통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유해 반환은 다른 시각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다. 서로 대척하고 공격하며 날을 세울 사안이 아니라 인도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다. 한일이 함께 공동으로 풀어나가야 할 숙제인 것이다.
이를 계기로 양측이 인도적인 접근을 통해 그동안 닫혔던 대화의 문을 열 수 있고, 관계 개선을 위한 서로의 의지도 보여줄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그동안 켜켜이 쌓인 갈등 해결의 돌파구를 찾을 수도 있다.
국민을 보호하고 보살피는 것은 국가의 마땅한 의무이며 존재 이유다. 어떤 사정에서든 무슨 연유에서든 눈물 흘리는 국민이 있다면 그 눈물을 닦아주어야 한다. 한일 사이가 나빠도 정부는 유해 반환 문제에 대해 인도적 차원에서 적극 대응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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