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김용석 기자 = '영원한 국수' 김인 9단이 4일 지병으로 향년 78세로 별세했다. .
한국바둑계의 거목 김인 9단은 1966년 10기 국수전에서 우승한 후 71년 15기까지 6연패를 달성해 바둑계에서는 '김국수'라는 별호로 통했다.
김인 9단이 향년 78세로 타계했다. [사진= 한국기원] |
1943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난 고인(故人)은 1958년 입단했고, 1962년 도일해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문하생으로 유학했다. 1963년 귀국해 통산 30회 우승, 22회 준우승의 기록을 남겼으며 1983년 9단으로 승단했다.
15세의 나이에 프로에 입단해 63년간 한국기원 전문기사로 활약, 1568전 860승 5무 703패의 통산전적을 남겼다. 1968년 작성한 40연승은 현재까지 한국기원 최다연승 1위 기록이며, 67년 승률 88.1%(37승 1무 5패)와 68년 승률 87.72%(50승 7패)는 연간 최고승률 3위와 4위 기록으로 남아있다.
올드팬들은 김인 9단을 '한국 현대바둑의 개척자' 조남철 9단의 아성을 무너뜨린 기린아로 기억하고 있다.
1966년 10기 국수전에서 23세의 김인은 당시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조남철에게 3대1로 승리하며 국수 타이틀을 쟁취했다. 현대바둑 사상 첫 세대교체였다. 1966년 2월 11일자 동아일보 1면은 '새 國手에 김인 5단, 조남철 棋聖 10년 만에 붕괴'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1943년 전남 강진 바닷가에서 태어난 김인은 13세 때 바둑판을 안고 야간열차로 혼자 상경했다. 원로 김봉선과 아마 고수 이학진을 사사한 김인은 15세인 58년 프로가 됐다. 19세 되던 62년 제6기 국수전에서 조남철에게 도전한 김인은 1승 1무 3패로 패했다. 국수전이 끝나고 나흘 뒤인 3월 9일 김인은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조남철의 소개 편지로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문하생이 된 김인은 기타니 도장 사범 시절 조치훈을 지도하기도 했다.
김인이 같은 또래 유망주들을 상대로 80% 전후의 승률을 기록하자 당시 일본에서는 '머지않아 김죽림(金竹林) 시대가 올 것'을 점치기도 했다. 한국, 일본, 대만 출신 유망주들인 김인, 오타케 히데오(大竹英雄), 린하이펑(林海峰)이 조만간 바둑계를 지배한다는 얘기였다.
김인은 1963년 11월 스승 기타니 9단의 만류를 뿌리치고 일본 생활 20개월 만에 귀국했다. 엄격하고 규율이 강한 기타니 도장 생활이 자유분방한 성격의 김인에게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국한 김인은 이후 국수 6연패, 왕위 7연패, 패왕 7연패 등 국내 전 기전을 휩쓸었다.
1978년 김인은 13기 패왕전과 4기 기왕전에서 각각 조훈현, 김희중에게 패하며 마지막 타이틀을 잃었다. 이후 김인은 타이틀 획득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이목이 수려하고 기품 있는 김인의 대국 태도는 팬들을 매료시켰다. 중후한 기풍을 지닌 김인은 상금과 대국료로 가난한 동료들에게 밥과 술을 많이 산 것으로도 유명하다.
백남(白南)배라는 타이틀전은 김인이 타이틀을 잃자마자 사라졌다. 대회 스폰서였던 모대학 이사장이 오직 김인 만을 위해 만들었던 대회였기 때문이다.
바둑이 지닌 도(道)의 가치를 고수했고 결과보다 과정을 더 중시한 김인 9단은 TV바둑이 바둑의 본질에 어긋난다고 고집스레 참가하지 않았다. 후배들은 영원한 국수 김인 9단을 변치 않는 청산(靑山)이라고도 부른다.
김인 9단은 2007년부터 고향 강진(군수·이승옥)에서 개최된 '김인 국수배'에 참가하며 아마추어들과 만나는 것을 즐거워했다.
2007년 전국어린이 바둑대회로 출범한 김인국수배는 2008년 국제시니어바둑대회로 업그레이드 됐고 매년 해외에서 대회장인 전남 강진까지 출전한 선수들로 국제대회의 위상을 갖춘 바 있다.
고인은 지난해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대회가 열리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2019년 10월 열린 제13회 김인국수배 국제시니어바둑대회를 마지막으로 김인 9단은 하늘에서 대회를 지켜보게 됐다.
유족으로는 부인 임옥규 씨와 1남이 있으며 발인은 6일, 장지는 경기도 광주 시안추모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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