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원칙보다 '여론과 재량'으로 판단하겠다는 정부 재벌개혁
[서울=뉴스핌] 이석중 에디터 = 정부와 여권이 본격적인 재벌개혁에 나섰다. 물론 삼성이 주 타깃이다.
문재인 정부 재벌개혁의 쌍두마차는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과 윤석헌 금융감독원장이다.
김 위원장은 10일 “삼성그룹 지배구조는 지속가능하지 않다”며 “결정은 이재용 부회장이 직접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또 “결정이 늦을 수록 삼성과 한국경제 전체에 초래하는 비용은 더 커질 것이고, 결정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장 나쁜 결정”이라며 이 부회장의 결단이 없을 경우 정부가 직접 나설 것임을 경고했다.
지난 8일 취임한 윤 원장은 아직 재벌개혁에 대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동안의 행보에 비춰 김 위원장 보다 오히려 더 강한 톤일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 재벌개혁 이미 시작됐다.
세계정책연구소 대표인 미셸 부커는 저서 ‘회색 코뿔소가 온다’(The Gray Rhino)에서 “당연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중요한 정보 임에도 원치 않는 소식이라 머릿속에서 밀어냄으로써 위험을 겪는다”고 했다. 이 위험이 ‘회색 코뿔소’다.
한국 재벌들의 현재 상황이 그렇다. 문재인 정부는 누차 재벌개혁을 외쳐왔지만 재벌들은 과거의 경험칙대로 생각하고 행동했다가 정부의 몰아치기에 당황한 빛이 역력하다.
당장 한진과 LG그룹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한진 조양호 회장의 둘째딸 조현민 씨의 물컵 폭행으로 시작된 파문이 조 회장 부인인 이명희 씨와 큰딸 조현아 씨의 밀수 의혹으로 확대됐다. 조 회장 일가의 경영퇴진 시위도 확산되고 있다.
조 회장을 비롯한 4형제가 부친인 고(故) 조중훈 전 회장의 해외 재산 상속과정에서 500억원 이상의 상속세를 신고하지 않았다는 상속세 탈루 혐의도 불거졌다. 조 회장은 진에어 대표이사 직에서 물러났지만, 그것으로 끝날 지는 의문이다.
몇차례 정권 교체기에도 무탈했던 LG그룹도 이번에는 도마 위에 올랐다. LG 오너 일가 소유의 LG 계열사 주식을 양도하는 과정에서 100억원 대의 양도세를 탈루한 혐의를 잡은 국세청이 검찰에 고발했고 검찰이 수사에 착수한 것이다.
양도세 탈루에서 시작했지만 일감 몰아주기와 하청업체에 대한 갑질 등 다른 불공정 행위나 오너 일가의 감춰졌던 다른 불법행위가 드러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LG그룹 4세 경영 후계자인 구광모 상무가 LG 지분을 꾸준히 늘려온 터여서 이번 조사 과정에서 문제가 드러난다면 그룹 경영 전체로 수사가 확대될 수도 있다. 이 정부가 지난 1년간 해온 방식이다.
삼성, 현대차동차, 롯데는 이미 검찰 수사를 받고 있어 다른 재벌그룹들도 좌불안석이긴 마찬가지다.
◆ 기(起) 승(承) 전(轉) 삼성, 재벌 개혁의 완성?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은 문재인 정부 재벌개혁의 상징이다. 김상조 위원장은 이재용 부회장이 알아서 하라고 한다. 판단은 국민 여론과 정권의 재량으로 하겠다는 뜻이다.
이런 정책철학이다 보니 과거 정당하다고 인정받았던 사안들 조차 과거의 판단이나 결정이 잘못됐다고 뒤집히는 사례들이 줄줄이 나오고 있다.
‘이건희 차명계좌’에 대한 과징금 부과가 대표적이다. 금융위는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이건희 차명계좌’는 현행법상 과징금 부과가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윤석헌 당시 금융행정혁신위원장이 과징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최종 혁신안을 발표했다. 금융위는 법제처에 법령해석을 요청했고, 이건희 차명계좌에 대해 약 34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공정위도 3년 전 내렸던 유권 해석을 스스로 뒤집으며 삼성SDI가 갖고 있는 삼성물산 지분을 전량 매각하도록 명령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처리 문제는 진행형이다. 지난 2015년 결산 당시 회계법인 2곳이 ‘적정’ 의견을 냈고 공인회계사회 감리에서도 ‘문제없음’으로 판정났던 터다. 금감원도 1년여 전엔 “기준 위반이 없었다”고 했다가 정권이 바뀌자 참여연대 주장대로 ‘분식 회계’라며 제재하겠다는 것이다.
삼성증권은 매를 자초했다. 금감원은 삼성증권이 우리사주 배당에서 ‘1000원’ 대신 ‘1000주’로 잘못 입력해 빚어진 사태에 대해 유령주식 매도 직원 21명에 대해 배임. 횡령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기로 했다. 회사 및 임직원에 대해 엄정 제재하겠다는 의지와 함께 전산시스템 계약이 삼성SDS에 치우쳤다며 공정거래위원회로 넘겼다.
보험업법 개정안도 치명적이다. 이종걸 민주당 의원은 지난 2016년 6월 발의한 보험업법 개정안은 보험사가 보유한 주식의 가치를 취득원가가 아닌 공정가치(시세)로 평가하겠다는 것이다. 이 법이 통과되면 삼성전자 지분 8.23%를 갖고 있는 삼성생명은 3%의 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다 팔아야 한다.
이건희 회장의 삼성전자 지분은 3.84%(2017년 3분기 기준)에 불과해 삼성생명을 통해 우회적으로 삼성전자를 지배해 왔으나 삼성생명의 지분이 낮아지면 삼성전자의 경영권 유지가 위태로울 수 있다.
김용태 의원이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주식을 던져야 하는 상황이 오면, 이 회장 일가는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권을 잃게 된다”며 “결국 삼성전자는 연기금 소유가 될 것”이라고 우려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밖에도 검찰은 ‘노조 와해’ 혐의로 삼성전자서비스 임원들을 압박하고 있고, 국토부는 에버랜드의 공시지가가 적정하지 않다는 한 방송사의 문제 제기에 대해 조사를 벌이고 있다. 상법 개정안의 집중투표제, 공익재단 의결권 제한, 금융그룹 통합감독 시스템 등도 삼성을 겨냥한 법안이다.
삼성그룹 창립 이후 최대 위기다.
◆ 재벌개혁도 기준과 원칙이 지켜져야
목적에 집착하다 보니 여기저기서 무리수도 나온다.
고용노동부가 영업 기밀로 간주되는 삼성의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장 정보를 공개키로 해 산업계를 경악하게 했다. 국익에 반한다는 산업부의 제동으로 일단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복지부는 법원 최종 판결이 나기도 전에 국민연금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찬성을 ‘적폐’라고 규정한 것도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이 한국 정부가 합병을 용인함으로써 투자손실을 봤다며 법무부에 투자자국가소송(ISD) 중재의향서를 제출한 것이다. 중재의향서는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 제소하기 전 상대 정부와 마지막 조정을 거치는 단계로 조정이 안되면 소송을 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이에 검찰이 엘리엇이 삼성물산 지분 매입 과정에서 공시 의무를 위반한 혐의가 있다며 조사에 나섰다. 결론이 어떻게 날지 두고 볼 일이지만, 괜한 불씨를 남긴 것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의 경우 섣부른 정보 유출로 시장의 혼란이 확산되자 정부 내에서 지적이 나왔다. 김동연 경제부총리와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금감원의 삼성 측 분식 회계 여부가 확정되기 전 사전 통지 내용을 외부에 알린 여론몰이에 대한 절차적 문제점을 짚었다.
삼성을 비롯한 재벌들의 잘못된 관행은 바로잡아야 하고 제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법과 원칙에 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정부가 바뀌었다고 해서 과거의 결정을 뒤엎는다면 기업의 미래는 보장하기 어렵다.
개혁은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한 수단이다.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해치면서까지 재벌개혁이라는 가치에 함몰돼 한국의 대표기업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다면 개혁의 당위성은 힘을 잃는다. 개혁을 위한 개혁이어서는 안되는 이유다. 특히 방향을 정해놓고 여론몰이를 통해 목적을 이루려는 방식은 글로벌경제 체제 하에서 국가와 기업 신인도면에서 지극히 위험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로워야 한다”는 말로 국민들의 큰 공감을 이끌어 냈다.
민주주의가 결과 만큼 과정이 중요하듯이 재벌개혁도 마찬가지다. 지킬 수 있는 원칙과 기준이 있어야 정책의 신뢰성과 당위성이 생긴다. “알아서 하라”는 김상조 위원장의 말은 그런 점에서 무책임하고 실망스럽다.
julyn11@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