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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환의 예술가 이야기] 예술과 여자를 동시에 탐하다, 피카소

기사입력 : 2017년12월15일 12:30

최종수정 : 2017년12월15일 12:30

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36)

현대 회화사에 있어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사진의 등장'일 것이다. 사진의 등장은 그 동안 자연이란 대상을 시각화해낼 수 있는 특권적 권리를 누려왔던 화가들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이때부터 회화와 사진은 경쟁자이자 동시에 동반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미술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일은 사진에 맡기고, 스스로 독자적인 존재 이유를 확인코자 시도하게 된다. 그래서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은 자신들의 인상, 시각과 시선을 그림에 개입시키며 사진과는 다른 회화만의 별도의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인상파시대를 지나면서 활동한 피카소는 이로부터 더 나아가 ‘큐비즘(Cubism, 입체파)’이라는 새로운 미술 사조를 열어나가게 된다. 큐비즘이란 평면의 화면에 입체감과 깊이를 부여하는 화풍을 말한다. 피카소는 동료 미술가인 브라크와 함께 3차원적인 형태를 2차원의 평면에 묘사하는 입체주의 양식의 독창적인 기법과 이론들을 정립시켰다.
그는 일상의 진부한 재료를 변용한 파피에 콜레(papier collé), 콜라주(collage), 아상블라주(assemblage)의 작업을 통해 예술과 산업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화면에 신문지· 우표· 벽지· 상표 등의 실물을 붙이는 기법이 파피에 콜레이며, 인쇄물· 천· 쇠붙이· 나무 조각· 모래· 나뭇잎 등을 붙이는 것은 콜라주이다. 이에 비해 아상블라주란 아예 화면을 사용하지 않고 일상품을 한데 모아 구성한 미술품을 뜻한다.
이처럼 피카소의 주요 관심사는 미술가의 창조적 사고, 변형능력, 그리고 미술이 아닌 것에서 미술을 창조해내는 능력 등이었다. 이런 그의 사고는 예술이란 자연이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원칙을 내세운 젊은 초현실주의자들과 비슷하다.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 1973)는 1881년 스페인 남부 말라가에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는 결코 어린아이처럼 데생한 적이 없다. 열두 살 때 이미 라파엘로처럼 그렸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천재성을 보였다. 그런 천재성의 일단은 여러 군데서 나타났다. 그는 나이 제한에도 불구하고 바르셀로나 미술학교 시험에 당당하게 합격했다. 또 스페인의 미술전통을 소화해 열다섯 살 때에는 풍속화, 초상화를 능란하게 그려냈다.
1900년 그가 19세 때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하였고, 다음해 재차 방문하여 몽마르트르에 정착하게 된다. 이후 죽을 때까지 프랑스에서 살았다. 파리에 둥지를 틀게 된 피카소는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등 인상파들의 작품을 접했으며 고갱의 원시주의, 고흐의 열정적 표현주의 등의 영향도 받았다. 당시 피카소는 파리의 구석진 다락방에서 추위와 가난을 인내하며 지냈다. 하지만 20세에 첫 전시회를 열어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상황은 나아지기 시작했다. 1904년에는 아방가르드 미술가들과 작가들의 모임에 핵심적인 인물이 되었다.

피카소의 작품세계는 흔히 ‘청색 시대(1901~1904)’, ‘장미 빛 시대(1905~1907)’, ‘원시 시대(1908~1909)’, ‘분석적 입체주의 시대(1908~1912)’, ‘종합적 입체주의 시대(1912~1913)’ 등으로 나뉜다. 청색 시대의 작품들은 우울한 분위기를 발산한다. 장미 빛 시대에는 핑크색과 오렌지색의 색조가 두드러진다. 원시 시대에는 고대 이베리아 조각과 아프리카 미술, 그리고 오세아니아 미술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선구적인 작품인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선보였다. 인물들을 각지게 묘사한 이 그림은 입체주의로의 전환을 알리는 작품이 되었다.
이와 함께 피카소의 화풍은 사람들과의 관계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피카소는 초기 파리생활이 어려울 때 주로 거지와 가난한 가족 등을 그렸다. 특히 당시 파리에서 동고동락하였던 절친한 친구 카를로스 카사헤마스의 비극적인 자살은 그에게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자연히 그의 화면은 청색 단색조의 차가운 색조가 주종을 이루었다. 그러던 중 그의 첫 여자인 페르낭드 올리비에와 만나게 되면서 점차 짙은 우울에서 벗어나 장미 빛 시대를 열어나간다. 이즈음 그는 파리에서 많은 친구들과 동료들을 만들게 된다. 시인 아폴리네르, 화가 마티스와 모딜리아니 등도 포함되어 있다.

피카소의 후기 작품들은 분류하기가 쉽지 않다. 스페인 내전 당시 나치 독일의 공군 원수 헤르만 괴링의 무차별 폭격으로 황폐화 된 게르니카 시가지의 참극을 듣고 분노해 그린 그림이 《게르니카(Guernica)》이다. 이 그림은 3.5m × 7.8m라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작품이다. 그래서 피카소는 붓이 아니라 롤러로 그림을 그렸다. 거대한 캔버스에는 회색과 흰색의 색조만이 칠해졌는데, 이는 참사의 슬픔을 나타내고 있다. 그림 속의 황소, 말, 백열전구, 믿기지 않는 공포에 괴로운 표정으로 허둥대며 달리는 사람들, 꽃을 든 팔, 부서진 검 등은 전쟁의 공포와 참혹상을 송두리째 담고 있다.
피카소는 이후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미움을 사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피카소는 “스페인이 민주화되기 전에는 《게르니카》를 스페인에 걸 수 없다”고 했으며, 프랑코가 죽고 1981년이 되어서야 이 걸작은 스페인으로 반환되었다. 지금은 마드리드의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 별도 전시실에 전시되어있다. 이런 일화도 있다. 나치의 파리 점령 직후 한 게슈타포 장교가 피카소에게 “당신이 《게르니카》를 그렸나?”라고 물었다. 이에 피카소는 “아니, 당신들이 그렸지”라고 답했다고 한다.

게르니카, 캔버스에 유화, 349x776cm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 소장 <사진=이철환>

피카소처럼 살아 있는 동안 인생을 다양하게 정열적으로 즐기고 풍요로움을 만끽하면서 또 영향력까지 가졌던 예술가가 또 있을까? 그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통하여 그림, 판화, 조각, 데생, 콜라주, 도자기 등 모두 4만 4천여 점의 방대한 양의 작품들을 남겼다. 그의 그림 중 1억 달러를 상회하는 것만 해도 《알제의 여인들》, 《누드, 녹색 잎과 상반신》, 《파이프를 든 소년》 등 3점이나 된다. 미술 경매사상 가장 비싸게 팔린 그림인 《알제의 여인들》이란 작품의 가격은 무려 1억 7,936만 달러였다. 그 어떤 화가들보다 압도적이다.
피카소의 천재성은 20세기 미술을 지배했다. 그 결과 20세기의 다른 모든 미술가들은 상대적으로 그의 그늘에 가려진 것처럼 보였다. 피카소는 마치 카멜레온처럼 양식과 매체를 변경해가며 많은 작품들을 제작했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독창적이었고 때로는 도발적이기까지 했다. 그는 조르주 브라크, 앙리 마티스, 페르낭 레제와 같은 동시대의 미술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아실 고르키 등 후대의 미술가들에게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그는 인간의 자유와 독창성을 사랑하고 또 표현해 내기를 갈망한 진정한 예술가이자 휴머니스트였다. 그러나 한 시대를 풍미했던 피카소도 세월의 무게를 어쩌지 못하고 1973년 93세의 나이로 프랑스의 액상 프로방스 근처 무쟁의 저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피카소는 작품의 수만큼이나 많은 여인들과의 염문으로도 유명하다. 23세 때 만난 첫 여인을 시작으로 72세에 만난 자클린 로크까지 수많은 여인들과 함께하였다. 7명의 여인들과 동거했고 2번 결혼했다. 후세의 평론가들은 피카소에게 있어 여인이란 존재는 예술 창조의 원천이었을 것으로 평가한다.
피카소의 나이 23세가 되던 1904년, 그는 파리에서 유부녀인 동갑내기 프랑스 여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게 된다. 모델이었던 그녀는 피카소가 처음 사랑한 여인이었다. 키가 크고 균형 잡힌 육감적인 몸매와 검붉은 머리칼을 지닌 그녀는 항상 쾌활한 성격으로 피카소를 기쁘게 했다.
가난한 시절 ‘청색 시대’ 그림을 그렸던 피카소는 그녀의 헌신적 도움으로 침울한 청색을 벗고 ‘장미 빛 시대’로 변신한다. 대표적인 작품이 1907년의 《아비뇽의 아가씨들》이다. 이 작품을 통해 피카소는 큐비즘을 개척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에 피카소는 페르낭드에게 등을 돌린다. 자유를 갈망하던 피카소는 그녀의 깔끔함과 상류사회 지향의 기질에 갑갑함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피카소는 1911년, 9년에 걸친 페르낭드와의 동거를 끝내고 친구 마르쿠스의 연인 에바와 깊은 사랑에 빠진다. 이 여인은 피카소가 차갑고 날카로운 분석적 큐비즘을 버리고 격정과 선율에 가득 찬 종합적 큐비즘으로 들어설 때 인도자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았던 에바는 1915년 30세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피카소의 세번째 여인인 올가는 러시아 출신의 발레리나로 귀족적 아름다움을 지닌 여성이었다. 장 콕토의 발레 《퍼레이드》에 무대미술을 맡은 피카소는 36살에 25살의 발레리나 올가와 처음으로 정식 결혼을 한다. 둘 사이에 첫아들 파울로를 낳는다. 그러나 올가가 피카소와 아이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바람에 오히려 피카소와의 사이가 소원해지고 결혼 4년 만에 부부관계는 파경을 맞는다.

1927년 피카소의 나이 45세가 되던 해, 그는 관능미 넘치는 17세 금발의 소녀 마리 테레즈를 6개월 동안 쫒아 다닌 끝에 걸작 《거울 앞에 선 처녀》의 모델로 세운다. 그녀는 22살 때 피카소의 두 번째 아이인 딸 마야를 낳는다. 피카소에게 가장 창조적인 영감을 준 여성이었다. 그러나 피카소는 그녀가 세련되지 못하고 무식하다며 버리고 떠난다. 피카소가 숨을 거둔 지 3년째, 피카소를 만난 지 50년이 되는 날, 그녀는 피카소를 저승에서도 보살펴야 한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순애보의 주인공으로 남은 불행한 여인이었다.
나이 54세가 되던 1936년 피카소는 29살의 사진작가이자 그의 다섯 번째 여인이 되는 도라 마르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피카소의 대작 《게르니카》의 제작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한다. 피카소 작품에서 ‘우는 여인’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피카소와의 이별로 정신착란증을 일으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 불행한 여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944년, 62세의 피카소는 20살의 젊고 아름다운 여류화가 프랑스와즈를 만나 함께 살며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를 낳는다. 피카소의 그림 속에서 그녀는 빛나는 태양이나 꽃으로 표현된다. 프랑스와즈는 피카소가 자신의 친구와 외도를 하는 것을 알고는 이를 용서하지 않고 그를 떠나게 된다. 자발적으로 피카소 곁을 떠난 유일한 여성이었다.
프랑스와즈는 피카소와 이별 후 《피카소와의 삶(Life with Picasso)》이란 책을 발표해 피카소와 함께한 10년간의 생활을 솔직히 고백했다. “저는 저희 아버지나 남자친구와는 대화가 잘 되지 않는다. 그런데 저보다 3곱절 연상인 당신과 말이 통하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요.”

나이 72세가 되던 1953년, 피카소는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내조를 해준 마지막 여인인 재클린이라는 이혼녀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8년간의 동거 이후 1961년 34살의 나이에 80세의 피카소와 결혼한다. 그리고 피카소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함께 한다. 그녀는 피카소에게 헌신적으로 절대적인 사랑을 바친다. 피카소가 죽은 후 재클린은 방에 걸린 검은 커튼을 한 번도 열지 않았다고 한다. 또 피카소의 망령을 위해 식탁에 피카소의 자리를 마련해 놓고 노래를 들려주거나 기이한 의식을 치르곤 했다고 전해진다.
피카소가 세상을 떠난 후 그와 함께 했던 수많은 여인들과 후손들은 대부분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피카소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리 테레즈는 목을 매 자살했고, 재클린은 1986년 10월 15일 피카소의 105번째 생일을 앞두고 피카소의 무덤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올가와 피카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파울로는 약물 중독으로 죽었다. 또 피카소의 손자 중 한사람인 파블리토는 피카소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왔다가 약을 먹고 자살했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문화와 경제의 행복한 만남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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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X는 주로 ATM(등가격) 부근 옵션의 프리미엄 시세를 바탕으로 산출되기 떄문에 이미 멀찍이 있던 외가격에서 경보음을 낸 스큐지수보다 한발 늦다. ATM 옵션은 현재 주가와 행사가격이 '거의 같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당장 옵션시장의 주가 상승과 하락에 대한 '양방향 베팅' 상황을 보여준다. 스큐지수가 건물의 '화재감지기'라면 VIX는 화재가 난 뒤에 내부 온도를 보여주는 '온도계'와 같은 셈이다. '스큐지수의 하락→S&P500의 급락+VIX 급등'의 순서는 2018년 8월의 급락장에서도 동일하게 실현됐다. 최근 스큐지수가 최고치를 찍고 하락한 것은 주식시장이 이 패턴을 따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VIX는 스큐지수가 최고치를 찍었던 지난달 24일 14를 기록했다가 현재 19.5로 올라선 상태다. 아직은 주식시장의 높은 변동성을 예고한다는 '20'을 넘어선 단계는 아니지만 방향성 자체가 위를 향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S&P500도 지난달 6일 사상 최고가에서 4% 떨어지는 등 상기의 연쇄 흐름에 동참한 모습이 역력하다. 물론 스큐지수가 과거의 폭락장이나 거친 시세 흐름을 항상 예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연준의 정책금리 인하 지연 우려와 시장금리의 급등, 위안화 약세, 주식시장의 높은 밸류에이션, 조만간 출범하게 될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의 관세 염려 등 주가 하락을 시사하는 퍼즐들이 짜맞춰지고 있다는 점에서 급격한 시세 변동 위험이 현실화될 개연성을 높인다. 특히 위안화 약세의 파급력은 2015년 갑작스러운 평가절하나 2018년 중반 급격한 약세, 2019년 '7위안 돌파' 등의 사례를 통해서 목도한 바 있다. 옵션시장의 우려가 단순한 기우가 아닐 수 있음을 뒷받침하는 재료들이다. 4. 실질금리의 중력장 1월 중순에 진입한 현재는 불안감이 들불처럼 번지기 쉬운 시기라는 점에서 스큐지수 경고에 담긴 의미를 배가시킨다. 과거 통계상 계절적으로 주식시장의 변동성이 확대되는 구간의 초입이다. 페퍼스톤에 따르면 2000년부터 2023년까지 VIX 추이를 월별로 평균해 연중 추이로 그려본 결과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까지 상승세가 두드러진다. 연초에는 기관투자자가 새로운 투자 전략을 실행하거나 기존 포지션을 조정하고, 또 관련 기간에는 기업의 결산 보고가 맞물려 있어 시세가 각종 재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많다. 모든 위험자산군의 시세를 주무르다시피하는 '실질금리'가 뜀박질을 재개한 점은 계절성의 현실화 가능성에 무게를 더한다. 미국 물가연동국채 10년물 금리로 본 실질금리는 지난달 초순 1.89%에서 중순 2.25%로 급히 올라섰다가 이달 초 숨고르기를 거친 뒤 최근 7일여만에 2.32%로 '레벨업'했다. 지난달 초순부터보자면 한 달 만에 43bp가 오른 셈이다. 통상 장기국채의 명목 금리가 오른다고 해도 대게 인플레 전망을 반영해 상승한 결과여서 실질금리 상승폭은 상쇄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실질금리 변동성이 작은 편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한 달 만에 43bp라는 상승폭은 상당하다고 할 수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의 마이클 하트넷 전략가의 표현을 빌려쓰자면 최근의 금융시장 상황은 '터너(전환점)' 임박을 시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앞서 하트넷 전략가는 실질금리 2.5%를 주시해야 할 지점으로 꼽은 적이 있는데 2.5%에 도달하면 금융시장의 위험자산 회피 성향이 더 강해질 것으로 봤다. 2.5%는 2023년 10월 하순에 기록한 최근 10년 기준 전 고점에 해당한다. 당시 실질금리는 같은 해 7월 1.48%에서 2.5%까지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같은 기간 S&P500의 시세를 10% 떨어뜨린 배경이 됐다. 하트넷 전략가에 따르면 현재 실질금리는 이미 지난달 중순부터 2%대로 올라섰음에도 불구하고 종전까지 주식시장의 시세가 어느 정도 방어가 됐던 것은 '강한 경제 펀더멘털이 실질금리 상승의 부정적 영향을 상쇄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종전의 고점을 넘어서는 새로운 영역으로 진입하면 내성 역할을 해왔던 투자자들의 믿음에 균열이 가해질 수 있다고 봤다. 스큐지수의 급등과 급락이라는 전조가 보여준 경고는 실질금리 2.5% 돌파와 함께 현실화될지도 모를 일이다. bernard0202@newspim.com 2025-01-13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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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샤오훙수 열풍에 고무된 중국매체 [베이징=뉴스핌] 조용성 특파원 = 이른바 미국의 '틱톡(TikTok) 난민'들이 대거 샤오훙수(小紅書)에 가입하는 현상이 지속되자 중국 매체들이 고무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제재로 인해 틱톡이 오는 19일부터 미국 내 서비스를 종료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면서, 미국 내 틱톡 유저들이 중국의 또 다른 SNS인 샤오훙수의 글로벌 버전 '레드노트(RedNote)' 앱을 다운로드해 신규회원으로 가입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데이터 조사기관인 센서타워의 조사에 따르면 1월 8일부터 14일까지 미국 내 사오훙수 앱 다운로드 건수는 전주에 비해 20배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중국 메이르징지신원(每日經濟新聞)이 17일 전했다. 전년 대비로는 30배 증가했다. 이달 들어 샤오훙수의 다운로드량 중 22%가 미국에서 이뤄졌다. 이 수치는 전년 동기에는 2%에 불과했다. 미국 내 틱톡 난민들이 샤오훙수로 대거 이동하면서 샤오훙수의 다운로드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중국은행보험보는 이날 샤오훙수 앱은 현재 미국, 캐나다, 호주, 영국, 이탈리아 등 87개 국가에서 다운로드 수 1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39개 국가에서도 10위 이내의 수위권에 분포하고 있다. 특히 14일과 15일 이틀 동안 신규 가입자가 70만 명을 넘어섰다. 이같은 소식에 중국 증시에서는 샤오훙수 관련주가 연일 급등하고 있다. 현재 샤오훙수는 글로벌 유저들을 위해 원클릭 번역 기능을 개선하고 있다. 샤오훙수 열풍이 이어지자 중국 매체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매체들은 미국이 2018년 이후 반중 정책 수위를 지속 높이고 있지만, 민간에서는 활발한 소통과 교류가 이뤄지고 있다며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17일 환구시보는 논평기사에서 "미국의 많은 유저가 자신들을 틱톡 난민이라고 자칭하며 샤오훙수로 몰려들고 있고, 이는 뜻하지 않게 미중 양국 국민의 새로운 소통의 장으로 부상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매체는 "미국 유저의 후기를 보면, 이들은 낯선 중국어 플랫폼에 접속하는 것에 대해 불안해했지만, 중국인의 친절한 응대에 놀라워했고, 중국인의 개방적인 태도에 경계를 풀게 됐다"며 "양국 네티즌의 교류 열기가 폭발적으로 높아졌고, 대화 주제는 다양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매체는 "미국의 정치인들은 지속적으로 중국을 비방해 오고 갖가지 부정적인 표현을 쏟아내고 있지만, 양국 국민 간에는 교류 협력을 심화하려는 의지가 강해지고 있다"고도 평가했다. 이어 "샤오훙수 현상이 미국의 대중국 정책을 수립할 때 좋은 참고가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중국의 SNS인 샤오훙수 자료사진 [사진=바이두 캡처] ys1744@newspim.com 2025-01-17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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