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28)
“화가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미리 머릿속에 그림을 담고 있어야만 한다.”
“색은 하루 종일 나를 집착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그리고 고통스럽게 만든다.”
“나는 자연의 법칙과 조화 속에 그림을 그리고 생활하는 것 이 외에 다른 운명을 갈망하지 않는다.”
“아무리 돌이라도 빛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
“형태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오로지 색상으로 보이는 것만을 그리십시오. 그러면 형태는 저절로 따라오게 될 것입니다.”
“나는 서서히 눈을 떴고, 자연을 이해하게 되는 한편 자연을 사랑하는 법을 깨달았다.”
이러한 그의 어록만 보더라도 모네가 빛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색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자연을 바라보고 캔버스에 담는 것을 얼마나 즐겨했는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모네는 인상파 양식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그의 작품 《인상, 해돋이》에서 ‘인상주의’라는 말이 생겨났다. ‘빛은 곧 색채’라는 인상주의 원칙을 끝까지 고수했으며, 연작을 통해 동일한 사물이 빛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탐색했다. 말년의 《수련》연작은 자연에 대한 우주적인 시선을 보여준 위대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는 1840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이 되던 해 가족과 함께 북부 해안의 작은 도시 르아브르로 이사했다. 여기서 보낸 유년 시절은 그가 후일 작품을 창작하는 데 있어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곳에서 노르망디 바닷가와 시골을 탐험하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급격히 변화하는 날씨가 바다와 육지에 미치는 영향을 관찰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곳에서 활동하는 화가 외젠 부댕(Eugène Boudin)을 만나 밖에서 오는 빛을 묘사하는 초보적인 회화기법을 배웠는데, 이는 모네에게 평생토록 영향을 주었다. 부댕은 모네에게 야외에서 직접 눈으로 관찰하며 그리는 '외광회화(外光繪畵, plein air painting)'의 개념을 소개해주었다. 또한 네덜란드의 풍경화가 요한 바르톨드 용킨트(Johan Barthold Jongkind)로부터는 대기 중의 빛을 포착해내는 기법을 익혔다. 훗날 모네는 용킨트를 가리켜 자신이 예술가의 눈을 키우도록 가르침을 베풀어준 진정한 거장이라 말하기도 했다.
스물두 살의 나이에 파리로 간 모네는 전통주의자인 샤를 글레르의 화실에 들어가 후일 인상주의 화가동료가 될 르누아르와 바지유를 만난다. 당시 모네는 다수의 풍경화와 초상화들이 연례 살롱전을 통과하여 일정부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대규모의 좀 더 도전적인 작품들은 퇴짜를 맞았다. 이에 실망감을 느낀 모네는 마네, 드가, 피사로, 르누아르 등과 함께 무명미술가협회를 창립한다.
이 협회는 1874년에 처음으로 독자적인 전시회를 개최했는데, 이것이 인상주의의 미술의 모태가 되었다. 모네는 이 전시회에 《인상, 해돋이》를 출품했다. 비평가 루이 르로이(Louis Leroy)는 이 작품을 이야기하면서 처음으로 ‘인상주의’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는 자연의 '본질'은 그리지 못하고 피상적인 '인상'만을 그렸다고 조롱하는 뜻을 담은 말이었다. 여하튼 이후부터 인상파란 이름이 모네를 중심으로 한 화가집단에 붙여졌다. 모네는 1886년까지 모두 8회 동안 이어진 인상파 전시회에 5회에 걸쳐 많은 작품을 출품하는 등 대표적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모네는 후일 이 《인상, 해돋이》란 그림의 제목을 선정하게 된 사연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풍경화는 단지 인상일 뿐이고, 순간적인 것일 뿐이다. 알다시피 인상주의라는 용어는 나 때문에 우리에게 붙게 된 꼬리표이기도 하다. 나는 르아브르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안개 속의 태양을, 배의 돛대들을 그려 넣은 그림을 보냈다. 그림의 제목을 알려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르아브르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똑같이 담을 수 없었기에 ‘인상이라고 적으시오’라고 말했다.”
자연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포착해내고 싶어 했던 모네는 서양 풍경화의 양식에서 벗어나 동양 미술, 그중에서도 특히 일본 목판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대상이 되는 사물들이 시간과 계절의 변화에 따라 다르게 변하는 모습에 매료되었던 모네는 《건초더미(1888~1894)》, 《포플러(1892)》, 《루앙 대성당(1892~1894)》과 같은 연작 그림들에서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다. 이 작품들은 똑같은 풍경이 시간의 변화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는 모습을 각기 다른 그림들로 그린 것이다. 명암이 마치 고체처럼 만질 수 있는 실체를 가진 것으로 보여, 회화 역사상 이정표가 되는 작품들이다.
모네는 같은 장소, 같은 대상을 다른 시간에 그리는 연작(series)을 통해 동일한 사물이 빛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 잘 표현해낼 수 있었다. 폴 세잔(Paul Cézanne)은 빛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네의 능력에 감탄하면서 ‘모네는 신의 눈을 가진 유일한 인간’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모네의 눈에는 매 시간, 매 분, 매 초마다 빛의 변화가 느껴졌다. 때문에 그는 태양이 뜨고 질 때까지 캔버스를 바꿔가며 하나의 대상을 그렸다. 하루 종일 빛을 직접 보면서 작업하느라 모네의 시력은 크게 손상되어 갔다.
모네가 만년에 살았던 지베르니의 수련이 있는 연못 <사진=이철환> |
모네의 후기 활동은 지베르니에 있는 수련 연못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모네는 86년의 비교적 긴 생애의 마지막 30년을 수련 연작에 바쳤다. 모네가 남긴 2천여 점의 유화 중 지베르니에서 그린 것이 320여 점이다. 그중 250여 점이 수련인 것을 볼 때 모네가 얼마나 수련에 몰두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모네는 1890년, 파리 근교 지베르니에 집을 얻었다. 그리고 1893년 나이 43세가 되면서는 완전히 그곳에 정착해 살게 되었다. 이후 정원을 넓힐 수 있는 대지를 더 구매하고, 그곳에 정원을 만들었다. 새로 판 연못에 수련과 수생 식물, 아이리스 등을 심었고, 또 연못을 가로지르는 일본식 다리를 세웠다. 그리고 정원 곳곳에는 벚나무와 버드나무, 각종 희귀한 꽃들을 심어 재배했다. 여섯 명의 정원사를 두고도 몸소 정원 일을 할 정도로 모네는 정원에 애착을 보였다. 이런 열정이 그가 《수련》 연작을 제작하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
수련은 그가 평생 추구한 빛과 색채의 철학을 집약한 마지막 정화이다. 그는 하늘과 주변 풍경이 잠긴 거울 같은 물 위에 무리지어 뜬 채 빛과 대기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수련에 매혹됐다고 한다. 모네는 자신이 만든 연못과 정원에서 영감을 얻어 그림 작업에 몰두했다. 오늘날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에 있는 《수련》 연작은 모네 생애 마지막 작품으로 자연에 대한 우주적인 시선을 보여준 위대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모네는 두 번 결혼하였다. 첫 번째 결혼은 그의 나이 30세가 되던 해인 1870년 파리에서 처음 생활을 시작하던 때였다. 1867년 그의 모델이며 애인이었던 카미유 동시외를 만나 그녀와의 사이에서 첫 아들 장을 낳았다. 3년 후에는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두 번째 결혼은 첫 번째 부인이 사망하자 동거하던 여인과 이루어졌다. 모네는 1876년 부유한 미술품 수집가인 에르네스 오슈드와 그의 아내 알리스를 만나 교우하게 된다. 이후 모네의 아내가 사망하자 알리스와 모네는 연인이 되었다. 그들은 노르망디 지방의 지베르니로 이사해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다. 그리고 1892년에는 결혼식도 올렸다.
모네는 유명한 화가 중 몇 안 되는 ‘죽기 전 유명세를 얻은 화가’다. 그도 젊었을 때는 지독한 가난과 외로움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판이 좋아지면서 생활도 점차 나아져 갔다. 말년에는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풍족한 삶을 보냈다. 그러나 말년에 백내장으로 거의 시력을 잃게 되었다. 그래도 그는 그림 그리기를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1926년 86세를 일기로 지베르니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문화와 경제의 행복한 만남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