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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력과 해학이 빛나는 작가, 조지 버나드 쇼

기사입력 : 2017년08월31일 10:44

최종수정 : 2017년08월31일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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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보다 사랑, 사랑보다 예술(8)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이 영문을 번역하면, 오래 살다보면 언젠가는 죽어서 이렇게 묻히게 될 것을 생전의 자신은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 문장은 조지 버나드 쇼의 무덤에 적혀 있는 묘비명이다. 이것이 조금 익살스럽게 번역되어 우리에게는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글귀로 잘 알려져 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란 묘비명이 적힌 버나드 쇼의 묘 <사진=이철환>

조지 버나드 쇼는 70여 년간 작가로 활동하면서 보수적 가치관과 우상 파괴를 시도했다.
“훌륭한 예술은 교훈적이어야 하며, 사회 진보에 기여해야 한다.”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글은 단 한 줄도 쓸 수 없다”
이것은 극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버나드 쇼의 신조였다. 그는 이러한 신조 아래 신랄한 비판과 풍자로 사회개혁과 의식개혁을 위한 집필 활동을 펼쳤다. 그의 작품의 기조는 '지성'과 '반란'이다. 그는 감상적이거나 낭만적인 것은 뭐든지 '그릇된 것'으로 배격하고, 이성의 명령에 배치되면 어떠한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누구도 넘보기 어려운 작가로서의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투시는 결코 중도에서 그만두는 일이 없고 언제나 끝까지 파고들었으며 두려움 같은 것은 전혀 몰랐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 큰 구성적 요소는 바로 사물의 뿌리까지 파고들어 쇠망과 붕괴의 원인을 캐내는 투시력이다. 다시 말해 그는 사회의 뒷면을 그리면서 언제나 그 속에 깃든 우화나 교훈을 드러내 보여 주었다.

쇼는 또 신랄한 비판과 기지, 풍자와 위트 넘치는 독설로 유명했는데, 오늘날까지도 명언으로 남아 있다.

- 자유는 책임을 의미한다. 바로 그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유를 꺼리는 이유이다.
(Liberty means responsibility. That’s why most men dread it.)
- 인생이란 당신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다. 당신 스스로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다.
(Life isn’t about finding yourself. Life is about creating yourself)
- 2%의 사람들은 생각한다. 3%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생각한다고 생각한다. 나머지 95%의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한다.
( Two percent of the people think, Three percent of the people think they think, And ninety- five percent of the people would rather die than think.)
- 실수를 하며 보낸 인생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인생보다는 훨씬 더 존경받을 만하며 또한 더 유용한 삶이다.
(A life spent making mistakes is not only more honorable, but more useful than a life spent doing nothing.)
- 희망을 품지 않은 자는 절망도 할 수 없다.
(He who has never hoped can never despair.)
- 자신들의 생각조차 바꿀 수 없는 사람들은 그 어떤 것도 바꿀 능력이 없다.
(Those who can’t change their minds can’t change anything. )
- 잘못된 지식을 경계하라. 그것은 무지보다 더 위험하기 때문이다.
(Beware of false knowledge: It is more dangerous than ignorance)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는 1856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무원을 하다가 곡물도매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실패하면서 알코올 중독에 빠져들었다. 이런 아버지를 보고 자라면서 쇼는 어린 시절부터 허위의식과 사회모순에 대해 냉소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어머니는 교양을 갖춘 과단성 있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문학과 음악, 미술 등을 가르쳤기에 쇼는 자연스레 문학적 소양을 지닐 수 있었다. 또 이런 어머니의 모습은 쇼로 하여금 여성의 인권신장에도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쇼는 어린 시절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않았다. 성직자인 삼촌에게 라틴어와 고전 등을 배웠고, 더블린에서 몇 차례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다녔으나 곧 그만두었다. 후일 그는 “학교는 감옥이라는 것 외에 배운 게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학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15세 때는 부동산 회사에서 서기로 일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문학과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미술, 연극, 오페라 등에 몰두했다. 결국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고 런던으로 갔다.

20대에 들어 쇼는 미술, 음악 비평 기자로 일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다윈의 《진화론》에 큰 영향을 받으며 사회주의 단체에 가담하고 사회주의 저널리스트로도 활동했다. 당시 《미성숙》, 《캐셜 바이런의 직업》 등 다섯 편의 소설을 집필했으나, 런던의 모든 출판업자에게 거절당했다. 그는 이후로도 극작가로서의 길을 모색하며 노력했지만 커다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쇼의 나이 36세가 되던 1892년, 그의 첫 번째 희곡작품 《홀아비의 집》이 상연되면서 그는 비평가들로부터 신예 극작가로서 인정받았다. 연이어 《워렌 부인의 직업》, 《무기와 인간》, 《캔디다》, 《악마의 직업》 등을 발표하며 극작가로 명성을 얻었다.

지주 계급의 노동자 착취 구조를 다룬 《홀아비의 집》, 여성 매춘부를 통해 여성을 차별하고 경제적 불평등 상태에 놓이게 하는 영국의 사회 구조를 비판한 《워렌 부인의 직업》 등은 대부분 사회고발의 성격을 띤다. 쇼는 1898년 《유쾌한 극과 유쾌하지 않은 극》이라는 저작을 통해 유쾌한 극과 유쾌하지 않은 극을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유쾌하지 않은 극'이란 관객들로 하여금 직면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직면하게 만드는 것이며, '유쾌한 극'이란 전통 희극 기법을 통해 도덕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극을 말한다는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부터 쇼는 '생의 힘'과 '초인'에 대한 개념을 극으로 형상화하기 시작했으며,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인간과 초인(Man and Superman)》, 《피그말리온》 등 대표작들을 줄줄이 발표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특히 당시 신분 제도의 허위와 영국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 《피그말리온》은 조지 버나드 쇼의 작품 중 대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작품이다. 그리스 신화의 피그말리온 이야기에서 모티프를 얻어 창작한 이 작품은 1938년 영화화되어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쇼의 사후인 1956년 《마이 페어 레이디》라는 제목으로 뮤지컬과 영화로도 만들어져 커다란 성공을 거두게 된다.

1905년 상연된 《인간과 초인》도 그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철학과 희극'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니체의 초인 사상을 중심으로 한 철학을 강조한 작품이다. 니체의 초인 사상에 큰 영향을 받은 쇼의 인생관과 예술론이 흥미로운 희극적 요소와 함께 펼쳐진다. 스페인의 전설적 바람둥이 돈 후안을 다룬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의 내용을 반대로 번안하여, 남성과 여성의 본분에 대한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인생과 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철학적 질문들을 던진다. '영어로 쓰인 철학과 종교에 대한 가장 탐구적인 대화'라고 평가될 만큼 '사상'을 극 형태로 이루어낸 것으로, 쇼의 대표적인 '사상 희극'으로 일컬어진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격렬하게 반전론을 주장하면서 《전쟁에 관한 상식》, 《상심의 집》 등을 펴냈다. 그런 한편 잔 다르크를 모티프로 하여 교회와 법률이라는 힘 가운데서 파멸한 비극적 여주인공을 그린 《성녀 조앤(Saint Joan)》을 발표했다. 마침내 192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쇼는 최고의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사상가이자 사회개혁가로서 사회 활동을 하는 한편 희곡 작업도 계속했다.

버나드 쇼는 기인에 가까운 생활을 해왔지만 여자관계는 깨끗했다. 이는 아마 그의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과 좋은 추억, 그리고 그의 작품세계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여자의 인권신장 문제에 대한 인식이 매우 컸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언젠가 당대를 주름잡던 무용수 이사도라 던컨이 버나드 쇼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유혹을 하였다. “우리 두 사람이 결혼하면 선생님의 명석한 두뇌와 제 미모를 합한 2세가 태어 날 터인데 좋은 일이 아닌가요?” 이에 버나드 쇼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요. 다만 한 가지가 걱정되네요. 내 이 못생긴 얼굴에 당신의 그 머리가 합해서 애가 태어나면 가관일 것이요.” 그다운 신랄한 기지와 해학이 담긴 반응이었다. 그 답변을 들은 이사도라 던컨은 얼굴이 벌게진 채 말 없이 물러갔다.

그는 1898년 결혼한 이래 금욕주의적 관계를 맺어 온 부인 샬럿 페인 타운센트가 1943년 사망하면서 큰 상실감을 겪었다. 이후 1950년 자택의 정원에서 가지치기를 하다 넘어져 11월 2일 사망했다.

버나드 쇼는 오늘날 셰익스피어 이래 가장 위대한 극작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극작가로 꼽힌다. 또 정치, 경제, 사회학적 사상 형성에도 영향을 가장 크게 끼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한 비판 또한 만만치 않게 나오고 있다. 그의 작품은 작가의 사상을 진술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든지, 혹은 그는 단순한 오락을 즐기는 감상적인 작가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그러나 쇼의 작품성을 인정하는 이들은 작품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그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와 그의 작품을 반쪽만 알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반박한다.
버나드 쇼 자신도 이렇게 말했다. “나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나의 전 작품을 적어도 2회 이상은 읽고 그것을 10년 동안 계속해 달라!”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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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이시바' 누구?...고이즈미·다카이치 선두 [서울=뉴스핌] 오영상 기자 =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자민당 총재직 사임을 공식화하면서, 일본 정국의 관심은 차기 자민당 총재 선거로 쏠리고 있다. 집권당 총재가 곧 총리직을 맡는 일본 정치 구조상 이번 총재 선거는 사실상 다음 총리를 뽑는 절차다. 자민당은 조만간 새로운 총재 선거 일정을 확정할 예정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지난 2024년 9월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 총리와 경합했던 주요 인사들이 다시 출마할 가능성이 높다. 고이즈미 신지로 농림수산상,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보담당상,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 모테기 도시미쓰 전 간사장, 고바야시 다카유키 전 경제안보담당상 등이 후보군으로 거론된다. 정국 운영이 소수 여당이라는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차기 총재가 야당과 어떻게 연대할지, 어떤 연립 구도를 짤지가 최대 쟁점으로 꼽힌다. '포스트 이시바' 후보로 꼽히고 있는 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농림수산상 [사진=로이터 뉴스핌] ◆ 고이즈미·다카이치 선두권 현재 여론조사에서는 고이즈미 농림수산상과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상이 선두권을 형성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 지난달 29~31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차기 총리에 적합한 인물로 다카이치가 23%, 고이즈미가 22%를 기록했다. 나란히 1, 2위다. 자민당 지지층으로 한정하면 고이즈미가 32%로, 다카이치(17%)를 크게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카이치는 2024년 총재 선거에서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으나 결선에서 이시바에게 역전패했다. 고이즈미 역시 의원 표에서 선두에 올랐지만 당원 표에서 밀리며 결선에 오르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당내 기반과 대중적 인지도를 겸비해 차기 선거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주자들이다. 고이즈미 농림수산상은 1981년생(44세)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차남이다. 2009년 중의원 첫 당선 이후 줄곧 '포스트 아베', '차세대 리더'로 주목받았다. 환경상, 농림수산상을 거쳤으며 개혁 성향과 젊은 이미지로 지지층을 넓혔다. 2024년 총선에서 당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으나 참패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후 농림수산상으로 복귀해 쌀 유통 개혁 등 농정 개혁에 매진했다. 대중적 인지도와 '고이즈미 브랜드'라는 정치 자산이 최대 강점으로 꼽힌다.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상은 1961년생(64세)으로 보수 강경파로 분류되는 여성 정치인이다. 2021년 총재 선거에 첫 도전해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며 3위를 기록했다. 2024년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최다 득표(의원 72표, 당원 109표)를 얻었으나 결선에서 이시바 총리에게 역전 당했다. 유일한 여성 후보로서 '보수의 아이콘' 이미지를 갖고 있으며, 아베 전 총리와 가까웠던 의원 그룹이 주된 지지 기반이다. 이시바 정권에서 당직 제안을 거절하며 독자 노선을 유지해 왔다. '포스트 이시바' 후보로 꼽히는 다카이치 사나에 전 일본 경제안보담당상 [사진=로이터 뉴스핌] ◆ 하야시·모테기 등 잠룡도 주목 고이즈미와 다카이치 두 선두 주자 외에 잠룡들의 행보도 주목된다.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옛 기시다파 일부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이시바 정권의 2인자로서 존재감을 키워왔다. 모테기 도시미쓰 전 간사장은 당내 경험과 풍부한 인맥을 강점으로 삼고, 아소 다로 전 부총리와 교류를 통해 지지 기반을 다지고 있다. 고바야시 다카유키 전 경제안보담당상은 5선 의원으로, 동기 의원들과 옛 니카이파의 지원을 받으며 출마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 총재 선거 이후에도 정국 '안갯속' 자민당 총재 선거는 국회의원 표와 당원·당우 표를 합산하는 방식이 원칙이지만, 긴급 시에는 국회의원과 지방 지부 대표만 투표하는 '양원 의원 총회' 방식으로 대체될 수 있다. 이 경우 의원 표의 비중이 커져 파벌 역학이 중요해진다. 차기 총재가 선출되더라도 곧바로 정권 안정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일본 헌법상 총리는 국회에서 지명되는데, 자민·공명 양당은 현재 중의원과 참의원 모두에서 과반을 잃은 상태다. 따라서 야당이 단일 후보를 세워 결집할 경우, 자민당 총재가 총리로 지명되지 못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자민당 총재가 총리에 오르더라도, 예산안·세제 개혁 법안 등 국정 운영은 야당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차기 총재는 곧바로 '연립 확대'나 '정책 연대'를 추진할 수밖에 없고, 총재 선거 과정에서도 어떤 야당과 손을 잡을지가 핵심 화두가 된다. 결국 이번 자민당 총재 선거는 단순히 차기 지도자를 뽑는 절차를 넘어, 일본 정치가 다당제 속에서 어떤 연립 구도를 구축할지 시험대가 되는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goldendog@newspim.com 2025-09-08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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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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