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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 문학의 대가이자 개혁가, 톨스토이

기사입력 : 2017년08월24일 11:10

최종수정 : 2017년08월24일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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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보다 사랑, 사랑보다 예술(6)

러시아 야스나야 폴랴나에 위치한 '톨스토이 생가' 전경 <사진=이철환>

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이라는 작품에서 소년 니콜라이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세 가지 질문의 답을 알아내기 위해 현자를 찾아 나선다.
첫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둘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셋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현자의 입을 통해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현재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그 사람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일이다.”

톨스토이는 삶에 대한 사랑을 기조로 한 예술에서 출발하여 종교에 몰입한 작가이다. 그래서 그는 대문호임과 동시에 위대한 사상가이자 구도자적(求道者的)인 삶을 산 기독교 신앙인이었다. 그는 항상 인생에 대하여 절박하게 고민하고 자신의 사상을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그는 문학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교육· 난민구제에도 힘을 기울였다. 러시아의 부조리, 지배층이 저지른 가난하고 힘없는 농민에 대한 폭압과 착취에 대한 속죄를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실천해 나갔던 것이다.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i, 1828~1910)는 1828년 남러시아 툴라 근처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부유한 백작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어려서 부모를 모두 잃고 친척집에서 자랐다. 카잔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3년 만에 중퇴한다. 인간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생각을 억압하는 교육 방식에 실망을 느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학문에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 고향을 떠나 페테르부르크의 사교계에서 방탕한 생활에 빠지기도 했으나, 이후 군에 입대해서 전투에 직접 참가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자전적 소설인 《유년시절》을 발표하면서 저작 활동을 시작한다.

톨스토이는 문학을 통해 당시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러시아의 사회상을 고발하고 혁신하고자 하였다. 그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귀족 지주들에게 침탈당하는 농민의 비참한 삶을 목격하고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번민했다. 그는 특권과 혜택을 누리는 귀족 지주는 불우한 일반 대중에게 그 대가를 지불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영지에 농민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고 교과서까지 직접 만들어 교육에 진력했다. 농민들이 현재의 질곡에서 벗어나 권익을 찾으려면 무엇보다도 그들이 무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에 대한 정신과 자세는 그의 작품에도 잘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는 평소 인생이란 ‘선(善)에 대한 희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거의 모든 작품 속에 녹여내고 있다. 그는 인생의 의의는 선을 이루려는 노력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선을 행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며 사람은 모두 이 목적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 ‘사랑’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톨스토이 작품에 있어 또 하나의 커다란 특징은 자전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철저한 사실주의자였던 톨스토이는 주로 자기 자신의 삶에서 일어났던 실제의 사건을 작품에 담았다. 예를 들어 '전쟁과 평화'에서는 자기 자신을 삐에르에, 그리고 마지막 작품인 '부활'에서는 네플류도프에 투영하고 있다. 이점에서 또 다른 러시아의 문학가인 도스토예프스키가 주로 현실과 공상을 결합시킨 타인들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표현한 것과 차별화되고 있다.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이다. 그러나 둘은 태어난 배경뿐만 아니라 문학정신까지도 판이하게 다르다. 톨스토이는 귀족 출신이고 부유했다. 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당시 러시아에서 중인 계급 신분이었던 가난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가난과 배고픔 그리고 병마에 시달렸다. 그래서 그의 문학세계도 어둡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인간의 삶이란 논리로는 도저히 풀지 못할 수수께끼로 가득 찬 암울한 여행이었다.

이에 비해 톨스토이는 자신의 삶은 물론 자신의 예술 위에 논리 정연한 건축물을 지으려 한 현실주의자였다. 인간심리에 대한 분석과 개인과 역사 사이의 모순을 분석함으로써 최상의 리얼리즘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톨스토이에게 있어 삶이란 그가 논리로 풀어내고자 했던 하나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톨스토이의 주요 작품으로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의 장편 소설과 '이반 일리치의 죽음', '바보 이반' 등의 중편 소설이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인간에게 많은 땅이 필요한가', '촛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세가지 질문' 등 단편도 발표하였다.

이처럼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특히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1812년에 있었던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을 소재로 한 '전쟁과 평화'는 원래 데카브리스트 사건을 소재로 구상했던 3부작의 첫 번째 권이었다. '데카브리스트(Dekabrist)의 난'이란 1825년 12월 나폴레옹 전쟁 때 서유럽에 원정하여 자유주의 사상을 경험한 일부 청년장교들이 모체가 되어 일으킨 러시아 최초의 근대적 혁명을 말한다. 비록 혁명은 실패했지만 이후 러시아 사회에 많은 영향을 준 사건이었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사실주의적 묘사는 톨스토이 문학의 압권으로 평가된다.

'안나 카레니나'는 동명의 여주인공이 자신의 열정을 추구하다가 사회의 편견 속에서 질식해 가는 과정을 고발한 소설로, 특히 그 비극적 결말이 유명하다. 특히 안나의 이야기와 병행되는 이상주의자 지주 콘스탄틴 레빈의 이야기는 이 작품 집필 당시에 중년의 위기를 겪은 톨스토이의 자화상으로 여겨진다. 작품의 서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가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자의 이유로 불행하다.”

대표작인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명성을 얻은 톨스토이는 40대 후반에 중년의 위기를 겪으며 삶과 죽음, 그리고 종교의 문제를 깊이 숙고했다. 1879년에 발표한 '고백록'은 톨스토이의 생애를 사실주의 문학 중심의 전반기와 종교 사상 중심의 후반기로 나누는 분기점으로 여겨진다. 한동안 문학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고 신학과 성서 연구에 전념한 톨스토이는 기존의 기독교에 실망한 나머지 자비, 비폭력, 금욕을 강조하는 새로운 기독교를 제창하기도 했다.

1880년대에 톨스토이가 거둔 문학적 성과 중에서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크로이처 소나타'가 수작으로 손꼽힌다. 특히 여성과 결혼에 대한 불신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중편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는 점차 위태로워지던 그의 결혼생활을 반영한 작품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톨스토이는 말년까지도 '예술이란 무엇인가'와 '부활'을 발표하며 필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그 당시 톨스토이의 사생활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톨스토이는 나이 33세 때 18세의 소피아 안드레예브나 베르스(Sophia Andreevna Behrs)와 결혼했다. 신혼시절 톨스토이는 부인인 소피아와 영혼의 교감을 느꼈고 매우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다.

소피아는 작가의 아내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는데,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속의 인물과 작품내용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악필이었던 톨스토이의 원고를 손보고 필사하는 일도 열심히 도왔다. 특히 '전쟁과 평화'를 쓸 당시 톨스토이가 쓴 글씨가 아무도 읽을 수가 없을 정도로 난삽하여 소피아가 여섯 번이나 고쳐 썼다고 전해진다. 또 남편을 대신해서 영지와 재산을 관리하는 일도 그녀의 몫이었다.

그런데 흔히 소피아는 세계 3대 악처(惡妻)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호사가들은 소피아와 함께 모차르트의 부인 콘스탄체, 소크라테스의 부인 크산티페를 세계 3대 악처로 꼽는다. 내조를 열심히 하며 살아온 소피아가 이런 불명예를 안게 된 것은 아마도 톨스토이가 말년에 파경을 맞아 집을 나가고 결국 객사하도록 했기 때문일 것이다.

톨스토이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문학보다 오히려 종교에 대한 관심과 활동 비중을 높여갔다. 그러자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부인 및 자녀와의 갈등 또한 점점 커져만 갔다. 그나마 톨스토이가 종교적인 평론을 쓰거나 복음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동안은 가족들이 참고 지냈다. 그러나 그가 귀족 지주의 생활양식을 버리고 농민과 같은 생활을 시작하자 완전히 등을 돌리고 말았다. 더욱이 모든 저서의 판권을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자신 편이었던 딸 알렉산드라에게 상속한다는 내용의 유언장이 발견되자 부인 소피아는 남편의 행적을 일거수일투족 감시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부활'에 묘사된 감옥 내의 예배당 장면을 문제 삼은 러시아 정교회는 톨스토이에게 정식으로 파문(破門)을 선고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게 된다. 가정 안에서 고립되고 정부로부터도 위험인물로 백안시당하게 된 톨스토이는, 모든 것을 버리고 혼자가 되는 데서 최후의 해결책을 구하였다. 그는 1910년 10월 29일 아침, “생애의 마지막 며칠 동안을 고독과 정적 속에서 지내고 싶다”는 글이 쓰인 쪽지를 남기고 몰래 집을 나와 방랑길에 올랐다. 이를 알고 있던 사람은 가족 중 유일하게 그를 이해하고 있던 장녀 알렉산드라와 주치의이자 친구인 마코비츠키뿐이었다.

며칠 후, 톨스토이는 기차 여행 중에 감기에 걸렸고, 이는 곧이어 폐렴으로 악화되었다. 작은 간이역 아스타포브의 역장 집을 빌려 몸져누운 톨스토이는 집을 나온 지 열흘 만인 1910년 11월 7일 새벽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82년의 생애 대부분을 보낸 회상의 땅인 야스나야 폴랴나의 조용한 숲 속에 장방형으로 마련된, 묘비도 없는 무덤 속에 조용히 잠들어 있다. 2009년 마이클 호프먼 감독이 만든 영화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The Last Station)'은 그의 이러한 마지막 삶을 조명하고 있다.

톨스토이만큼 온 세계의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작가는 아마 찾아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는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신화적인 존재여서 모든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오랜 동안 광활한 대륙에서 살아가는 러시아인들의 정신적 지주였고, 지금까지도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확실히 그는 지금도 우리 가슴 속에 살아 있다. 그는 이렇게 우리를 위로한다. “여러분은 왜 나를 스승이라 부르는가? 나는 스승이 아니다. 죄(罪)에 있어서나 부활(復活)에 있어서나 나는 여러분의 형제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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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이시바' 누구?...고이즈미·다카이치 선두 [서울=뉴스핌] 오영상 기자 =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자민당 총재직 사임을 공식화하면서, 일본 정국의 관심은 차기 자민당 총재 선거로 쏠리고 있다. 집권당 총재가 곧 총리직을 맡는 일본 정치 구조상 이번 총재 선거는 사실상 다음 총리를 뽑는 절차다. 자민당은 조만간 새로운 총재 선거 일정을 확정할 예정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지난 2024년 9월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 총리와 경합했던 주요 인사들이 다시 출마할 가능성이 높다. 고이즈미 신지로 농림수산상,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보담당상,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 모테기 도시미쓰 전 간사장, 고바야시 다카유키 전 경제안보담당상 등이 후보군으로 거론된다. 정국 운영이 소수 여당이라는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차기 총재가 야당과 어떻게 연대할지, 어떤 연립 구도를 짤지가 최대 쟁점으로 꼽힌다. '포스트 이시바' 후보로 꼽히고 있는 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농림수산상 [사진=로이터 뉴스핌] ◆ 고이즈미·다카이치 선두권 현재 여론조사에서는 고이즈미 농림수산상과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상이 선두권을 형성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 지난달 29~31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차기 총리에 적합한 인물로 다카이치가 23%, 고이즈미가 22%를 기록했다. 나란히 1, 2위다. 자민당 지지층으로 한정하면 고이즈미가 32%로, 다카이치(17%)를 크게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카이치는 2024년 총재 선거에서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으나 결선에서 이시바에게 역전패했다. 고이즈미 역시 의원 표에서 선두에 올랐지만 당원 표에서 밀리며 결선에 오르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당내 기반과 대중적 인지도를 겸비해 차기 선거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주자들이다. 고이즈미 농림수산상은 1981년생(44세)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차남이다. 2009년 중의원 첫 당선 이후 줄곧 '포스트 아베', '차세대 리더'로 주목받았다. 환경상, 농림수산상을 거쳤으며 개혁 성향과 젊은 이미지로 지지층을 넓혔다. 2024년 총선에서 당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으나 참패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후 농림수산상으로 복귀해 쌀 유통 개혁 등 농정 개혁에 매진했다. 대중적 인지도와 '고이즈미 브랜드'라는 정치 자산이 최대 강점으로 꼽힌다.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상은 1961년생(64세)으로 보수 강경파로 분류되는 여성 정치인이다. 2021년 총재 선거에 첫 도전해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며 3위를 기록했다. 2024년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최다 득표(의원 72표, 당원 109표)를 얻었으나 결선에서 이시바 총리에게 역전 당했다. 유일한 여성 후보로서 '보수의 아이콘' 이미지를 갖고 있으며, 아베 전 총리와 가까웠던 의원 그룹이 주된 지지 기반이다. 이시바 정권에서 당직 제안을 거절하며 독자 노선을 유지해 왔다. '포스트 이시바' 후보로 꼽히는 다카이치 사나에 전 일본 경제안보담당상 [사진=로이터 뉴스핌] ◆ 하야시·모테기 등 잠룡도 주목 고이즈미와 다카이치 두 선두 주자 외에 잠룡들의 행보도 주목된다.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옛 기시다파 일부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이시바 정권의 2인자로서 존재감을 키워왔다. 모테기 도시미쓰 전 간사장은 당내 경험과 풍부한 인맥을 강점으로 삼고, 아소 다로 전 부총리와 교류를 통해 지지 기반을 다지고 있다. 고바야시 다카유키 전 경제안보담당상은 5선 의원으로, 동기 의원들과 옛 니카이파의 지원을 받으며 출마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 총재 선거 이후에도 정국 '안갯속' 자민당 총재 선거는 국회의원 표와 당원·당우 표를 합산하는 방식이 원칙이지만, 긴급 시에는 국회의원과 지방 지부 대표만 투표하는 '양원 의원 총회' 방식으로 대체될 수 있다. 이 경우 의원 표의 비중이 커져 파벌 역학이 중요해진다. 차기 총재가 선출되더라도 곧바로 정권 안정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일본 헌법상 총리는 국회에서 지명되는데, 자민·공명 양당은 현재 중의원과 참의원 모두에서 과반을 잃은 상태다. 따라서 야당이 단일 후보를 세워 결집할 경우, 자민당 총재가 총리로 지명되지 못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자민당 총재가 총리에 오르더라도, 예산안·세제 개혁 법안 등 국정 운영은 야당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차기 총재는 곧바로 '연립 확대'나 '정책 연대'를 추진할 수밖에 없고, 총재 선거 과정에서도 어떤 야당과 손을 잡을지가 핵심 화두가 된다. 결국 이번 자민당 총재 선거는 단순히 차기 지도자를 뽑는 절차를 넘어, 일본 정치가 다당제 속에서 어떤 연립 구도를 구축할지 시험대가 되는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goldendog@newspim.com 2025-09-08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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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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