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핵심 요약
beta- 1952년 7월 4일 이승만 정권은 계엄령과 폭력으로 발췌개헌을 강행했다
- 1954년 11월 29일 자유당은 사사오입 논리로 개헌안 부결을 번복했다
- 1958년 12월 24일 무술경위가 야당을 격리한 채 보안법을 통과시켰다
!AI가 자동 생성한 요약으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요.
1편: 제1공화국 속기록으로 본 절차적 규범의 해체와 공론장의 붕괴
2) 1952년 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
그러나 1950년 6·25 전쟁의 포화는 갓 싹튼 의회민주주의의 숨통을 조였다. 피난수도 부산의 임시의사당에서 치러진 1952년 7월 4일 제2대 국회 제13회 본회의는 헌법이 보장한 의원의 불체포특권과 면책특권이 계엄령과 백골단 등 관변 폭력배의 위협 앞에 처참히 유린된 현장이었다.
재선이 불투명했던 이승만 대통령과 여당 자유당은 직선제 개헌을 관철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야당 의원들을 공산당 프락치 혐의로 강제 연행했다. 무장 군경이 동대신동 가건물 의사당을 겹겹이 포위한 심야, 내각제 개헌안을 주도했던 곽상훈 의원은 총검 앞에서 피를 토하듯 발언했다.

1952년 7월 4일 (제2대 국회 제13회 임시회의 제8차 본회의) | 발언자: 郭尙勳 (곽상훈, 民主國民黨)
발언 원문: "…지금 이 議事堂 周邊을 둘러싸고 있는 警察과 戒嚴軍의 銃劍 아래에서, 우리가 과연 國民의 自由로운 意思를 代辯하는 憲法 改正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러한 非常한 恐怖 雰圍氣 속에서 이루어지는 改憲이 어찌 憲政의 正道라 하겠습니까!" (…지금 이 의사당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경찰과 계엄군의 총검 아래에서, 우리가 과연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를 대변하는 헌법 개정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러한 비상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헌이 어찌 헌정의 정도라 하겠습니까!)
장내 반응: [傍聽席에서 騷亂, "빨갱이 國會議員 놈들 處斷하라!", 議席 一部에서 "院外 騷亂을 막으시오!", "議長, 秩序를 維持하시오!" 呼喊 / 방청석에서 소란, "빨갱이 국회의원 놈들 처단하라!", 의석 일부에서 "원외 소란을 막으시오!", "의장, 질서를 유지하시오!" 호함]
의장의 질서유지 반응: 議長 申翼熙: "傍聽席은 靜肅히 하시오! 警衛들은 傍聽席의 騷亂者를 團束하시오. 議員 여러분께서는 자리를 지키시고 議事進行에 協助해 주시기 바랍니다." (군경과 폭력배의 위세 앞에 의장권 완전 마비)
이날 방청석을 점거한 관변 폭력배들이 야당 의원들을 향해 내뱉은 "빨갱이 국회의원 처단하라"는 절멸의 수사는 대한민국 헌정사의 가장 불길한 분수령이었다. 정당한 헌법적 반대자를 체제 전복 세력으로 낙인찍어 물리적으로 박멸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는 색깔론의 원형이 최고 대의기관의 속기록에 공식 등재된 순간이었다.
신익희 의장이 경위들에게 단속을 명했으나 군경의 총검과 원외 폭력 앞에서 의장의 질서유지권은 완전히 무력화되었고, 불체포특권은 종잇조각으로 전락했다. 의회 공론장이 질식당하며 축적된 침묵과 분노는 의회민주주의의 중대한 균열을 낳았다.

3) 1954년 사사오입 개헌과 본회의장 물리력 충돌
1954년 11월 27일과 29일의 제3대 국회 본회의는 헌법의 수학적 공리마저 최고 권력자의 종신 집권을 위해 왜곡되고, 헌정사 최초로 멱살잡이와 의사봉 탈취라는 물리적 충돌이 속기록에 활자로 등재된 비극의 무대였다. 초대 대통령 중임 제한을 철폐하려는 개헌안의 가결 정족수는 재적 203명의 3분의 2인 135.333…명, 즉 자연수로 136명이었다.
11월 27일 표결 결과 찬성은 134표로 정족수에 1표가 미달했다. 최순주 부의장은 합법적으로 부결을 선포하고 의사봉을 3타 두드렸다. 그러나 이틀 뒤인 11월 29일 제28차 본회의, 자유당은 서울대 수학과 교수 최윤식의 자문을 끌어들여 사사오입의 궤변으로 부결 번복 가결을 선포했다.
1954년 11월 29일 (제3대 국회 제28차 본회의) | 대립 당사자: 崔淳周 副議長 (自由黨) vs 趙炳玉 議員 (民主國民黨)
발언 원문: 副議長 崔淳周: "…사사오입의 數學的 原則에 依하여 135人으로 족한 것이므로, 지난 토요일의 부결 선포는 착오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본 헌법개정안은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趙炳玉 議員: (壇下에서 崔副議長을 向하여 手指質하며) "崔淳周! 네놈이 學問의 탈을 쓰고 崔允植의 이름을 팔아 良心을 팔아먹고 憲法을 埋葬하느냐! 逆賊 놈아, 歷史의 審判이 두렵지도 않으냐!"
장내 반응: [蘇秉卨 議員 壇上으로 突進하여 崔副議長의 멱살을 잡고 議事棒을 奪取함. 場內 修羅場, 呼喊과 罵倒 亂舞 / 소병설 의원 단상으로 돌진하여 최부의장의 멱살을 잡고 의사봉을 탈취함. 장내 수라장, 호함과 매도 난무]
의장의 질서유지 반응: 副議長 崔淳周: (警衛들에게 救助를 請하며) "警衛! 壇上을 整理하시오! 可決되었습니다!" (의장권이 불법 날치기 통과의 사적 흉기로 전락)
소병설 의원이 단상으로 돌진해 의사봉을 빼앗고 조병옥 의원이 삿대질을 하며 "헌법을 매장한 역적"이라 성토하는 수라장은 속기록에 영구히 기록되었다. 국회법상 의장의 질서유지권은 다수당의 불법적 헌법 파괴를 비호하는 도구로 전락했고, 합법적 절차가 붕괴된 의사당에서 야당에게 남겨진 것은 육탄 저지와 멱살잡이라는 물리력 충돌뿐이었다. 말이 산술의 궤변으로 타락했을 때 의회주의의 기본 전제인 타협은 사망선고를 받았다.

4) 1958년 2·4 보안법 파동과 무술경위의 난입
제1공화국 의회 언어의 최종적 파탄은 1958년 12월 24일 벌어진 이른바 2·4 보안법 파동(12·24 파동)으로 귀결되었다. 여기서 2·4란 2월 4일이 아니라 12월 24일의 표기에서 유래한 당대 정치사의 공인 명칭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60년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과 언론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신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키려던 자유당 정권은, 국회법이 규정한 원내 질서유지 수단인 의장의 경호권을 반대파 격리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국회사무처의 공식 역사 기록인 《대한민국 국회사》(1971)와 《동아일보》·《조선일보》(1958년 12월 25일 자 1면)에 따르면, 당시 이기붕 민의원의장은 경호권을 발동한 뒤 치안국에서 급조 차출한 유도·검도 유단자 출신 무술경위 300여 명을 본회의장 안으로 투입했다.
무술경위들은 법안 강행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엿새째 본회의장 단상에서 철야 농성 중이던 야당(민주당) 의원 80여 명의 팔다리를 꺾고 사지를 붙잡아 의사당 지하 식당과 귀빈 휴게실로 강제로 끌어내려 감금했다. 의원들의 옷이 찢기고 피를 흘리는 유혈 사태 속에 지하 출입문은 경위들에 의해 완전히 걸어 잠겼다.
야당 의원들이 물리적으로 완벽히 격리된 텅 빈 의사당에서 이기붕 의장과 자유당 의원 128명만이 입장해 진행한 《제4대 민의원 제30회 제31차 본회의 회의록》(1958년 12월 24일)은 정치폭력으로 얼룩진 헌정사의 1차 사료로 영구히 보존되어 있다.
1958년 12월 24일 (제4대 민의원 제30회 제31차 본회의) | 주재자: 議長 李起鵬 (自由黨)
발언 원문: 議長 李起鵬: "國家保安法 一部改正法律案을 上程합니다. 質疑와 討論은 省略하고 곧 票決에 들어가겠습니다. 本案에 對하여 異議 없으십니까?"
議長 李起鵬: "異議가 없으므로 可決되었음을 宣布합니다." (議事棒 3打)
장내 반응: [野黨 議員 缺席. 自由黨 議員 一齊히 起立하며 "異議 없습니다!", 萬場一致 拍手 / 야당 의원 결석. 자유당 의원 일제히 기립하며 이의 없습니다!, 만장일치 박수]
의장의 질서유지 반응: 이기붕 의장이 무술경위를 지휘해 야당 의원 80여 명을 지하실에 감금한 뒤 단독 진행 (질서유지권이 반대파를 감금하는 폭력으로 전도됨)
이날의 속기록에는 야당의 발언권, 반대 토론, 표결권이 단 한 줄도 적혀 있지 않다. 속기록의 야당 의원 결석이라는 문구는 자발적 불참이 아니라 물리적 폭력에 의한 강제 격리였다. 의회 공론장이 질식당하자 억압된 민주주의의 대의는 마침내 의사당 담장을 넘어 거리로 터져 나왔고, 1960년 3·15 부정선거와 마산 앞바다 김주열 열사의 비극을 거쳐 4·19 혁명이라는 피의 저항으로 폭발하며 제1공화국은 비참한 종말을 고했다.

*필자 최연혁 교수는 = 스웨덴 예테보리대의 정부의 질 연구소에서 부패 해소를 위한 정부의 역할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스톡홀름 싱크탱크인 스칸디나비아 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매년 알메달렌 정치박람회에서 스톡홀름 포럼을 개최해 선진정치의 조건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그 결과를 널리 설파해 왔다. 한국외대 스웨덴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스웨덴으로 건너가 예테보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런던정경대에서 박사후과정을 거쳤다. 이후 스웨덴 쇠데르턴대에서 18년간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버클리대 사회조사연구소 객원연구원, 하와이 동서연구소 초빙연구원, 남아공 스텔렌보쉬대와 에스토니아 타르투대, 폴란드 아담미키에비취대에서 객원교수로 일했다. 현재 스웨덴 린네대학 정치학 교수로 강의와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좋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민주주의의가 왜 좋을까' '알메달렌, 축제의 정치를 만나다' '스웨덴 패러독스' 등이 있다.
kimsh@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