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핵심 요약
beta- 오익경 소령이 1950년 6월 24일 양원·강령 방어를 맡았다.
- 25일 북한군 포격과 전차 돌파로 제3대대 진지가 무너졌다.
- 오익경은 치마산·석계리로 철수했으나 결국 바다로 빠졌다.
!AI가 자동 생성한 요약으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요.
양원·강령 지구 전투
양원과 강령 일대는 옹진반도의 남쪽을 붙들고 있는 요충지였다. 이곳이 무너지면 옹진 지구의 부대들은 퇴로를 잃을 수 있었다.
1950년 6월 24일 저녁, 제17연대 제3대대장 오익경 소령은 새로 배속된 제7야전포병대대 제1중대를 양원 북쪽 3km 지점에 배치했다. 연대 57mm 대전차포중대 제2소대도 포병 진지로부터 멀지 않은 소재 일대에 진지를 잡았다.
북한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포병의 대응은 자유롭지 못했다. 미군 고문관이 포탄 사격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6월 25일 04:00. 북한군 제14연대가 포격을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포탄이 날아와 능선과 진지를 뒤흔들었다. 아군 포병은 즉시 응사하지 못했다. 북한군의 공격이 시작된 지 한 시간이 지난 05:00가 되어서야 포문을 열 수 있었다.
그 한 시간은 길었다.

05:30이 조금 지났을 무렵, 북한군의 포격이 대대 관측소에 집중되었다. 관측소가 무너지고 통신장비가 파괴되었다.
대대장 오익경 소령은 제9중대 관측소로 자리를 옮겼다. 제9중대 무선망을 이용해 전투를 지휘했지만, 대대의 지휘체계는 이미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포격은 갈수록 거세졌다. 오익경 대대장은 연대장에게 연대 예비대의 증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 시각, 북한군 제14연대는 이미 38도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북한군의 주력은 50번 도로를 따라 움직였다. 일부 병력은 돌산과 132고지를 향했다. 돌산은 제10중대 제3소대가, 132고지는 제9중대 제1소대가 방어하고 있었다. 소재 일대에는 제11중대 제3소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돌산과 132고지를 향해 접근하던 북한군은 국군 포병의 제압사격을 받았다. 포탄이 포열 주변에서 터졌지만, 두 고지는 은파산에 가려져 있었다. 국군 포병이 북한군의 움직임을 정확히 관측하기 어려웠다.
반면 국군의 전선은 적에게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북한군은 국군 포병진지를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제10중대 제3소대장과 제9중대 제1소대장이 적의 집중사격을 받았다. 두 소대의 방어진지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돌산과 132고지의 소대 거점은 힘겹게 북한군과 맞서고 있었다. 은파산의 그늘에 들어간 북한군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국군의 포격은 적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잠시 뒤, 북한군의 T-34 전차 8대와 장갑차가 나타났다. 전차와 장갑차 뒤에는 보병이 따랐다. 45mm 대전차포도 가까이 붙어 지원했다.
북한군은 50번 도로와 무명도로를 따라 제3대대의 주저항선으로 접근했다. 소재 일대에 배치된 57mm 대전차포소대가 선두 전차를 향해 사격했다. 포탄이 전차의 장갑을 때렸다. 몇 대의 전차가 멈췄다.
그러나 대전차포탄은 많지 않았다. 사격을 계속할수록 남은 포탄은 줄어들었다. 북한군 보병은 양옆으로 퍼져 대전차포 진지를 포위하려 했다. 대전차포소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양원과 강령 방향으로 철수했다.
대전차 방어선이 사라지자 제9중대와 제11중대의 진지는 북한군 전차 앞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08:00경, 두 중대의 방어선이 무너졌다. 병력은 소대 단위로 흩어져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늑달산의 제10중대는 여전히 진지를 지키고 있었다.
제3대대장 오익경 소령은 연대의 지시를 기다렸다. 아무런 명령도 오지 않았다. 연대 예비대의 증원도 없었다. 통신선은 끊기고, 무전기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잡음만 흘렀다.
그때 취야와 강령을 연결하는 도로에서 1/4톤 차 한 대가 달려왔다. 연대 연락장교였다. 그는 대대장에게 연대장의 명령을 전달했다. "제3대대장은 현진지를 고수하면서 가능한 모든 통신을 소통시키도록 하라."
현진지를 고수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오익경 대대장이 바라본 전선은 이미 명령서 속의 전선이 아니었다. 방어선은 여러 곳에서 끊어졌고, 전차를 막을 포탄도 부족했다. 북한군은 도로와 능선을 따라 계속 남하하고 있었다.
대대장 오 소령은 연대 연락장교에게 말했다. "전차로 증강된 북한군 1개 연대 규모의 병력이 이미 대대 주저항선을 돌파했다. 방어지역을 더는 고수할 수 없다." 그는 대안을 제시했다. "대대는 치마산과 석계리에서 북한군을 저지하겠다. 연대 예비대를 그 지역에 투입해 달라."
연락장교가 돌아간 뒤 대대장 오익경 소령은 각 중대에 철수명령을 내렸다. 제10중대는 치마산으로, 제9중대는 석계리로 철수했다. 우전방의 초동을 지키던 제11중대는 석계리 동쪽 관선으로 물러났다.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제3대대의 새로운 방어선이 치마산과 석계리에서 형성되고 있었다.
치마산-석계리 대전차전
제10중대장 양재정 대위는 처음 철수명령을 받았을 때 진지를 떠나지 않으려 했다. 중대는 아직 싸울 수 있었고, 방어진지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대대장으로부터 전반적인 전황을 들은 뒤에야 철수를 결심했다.
09:00. 제10중대는 치마산으로 이동했다. 양재정 대위는 50번 도로와 해안선을 따라 북한군이 접근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치마산 서쪽 기슭 약 1km 구간에 3개 소대를 일직선으로 배치했다.

한 시간이 지났다. 10:00. 북한군의 선두부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차 4대가 앞장섰고 장갑차 4대와 보병이 뒤따랐다.
북한군의 행군대형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선두의 전차가 국군 진지 가까이 접근했지만, 제10중대 병사들은 적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살상지대에 들어온 북한군은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다.
제10중대 병사 대부분은 북한군 전차를 처음 보았다. 거대한 궤도가 흙을 짓이기며 다가왔다. 전차포가 불을 뿜고 기관총탄이 참호 위를 갈랐다.
긴장한 병사들은 2.36인치 로켓포를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소총을 쏘았다. 소총탄은 전차 장갑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국군의 화력이 약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북한군은 전차와 장갑차를 도로 밖으로 전개했다. 전차와 장갑차가 포와 기관총을 난사하며 제10중대 진지를 압박했다.
제10중대는 물러서지 않았다. 살상지대에 들어온 북한군을 향해 사격을 계속했다. 가까운 거리에서 대전차화기를 운용한 병사들은 100m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북한군 전차 1대와 장갑차 1대를 파괴했다.
그러나 전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북한군의 전차와 장갑차는 포와 기관총을 집중했다. 제10중대는 많은 사상자를 남긴 채 강령 방향으로 흩어져 철수했다.
그 시각, 제9중대는 까치산에서 철수하고 있었다. 제9중대는 석계리 북쪽의 무명고지에 도착했다. 약 190m 높이의 고지였다. 왼쪽은 깎아지른 절벽이었고, 오른쪽에는 저수지로 이어지는 폭 1.2km의 좁은 통로가 있었다.
전차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은 한정되어 있었다. 대전차방어에는 유리한 지형이었다.
제9중대장 김동환 소위는 제1소대를 좁은 통로 입구에 배치했다. 2.36인치 로켓포 6문과 기관총 6정을 북쪽과 남쪽에 나누어 배치했다. 석계리에 60mm 박격포를 배치하고, 애로를 화력으로 봉쇄할 수 있도록 화망을 만들었다.
11:00경이었다. 북한군의 전차 4대와 장갑차 4대가 나뭇가지로 차체를 위장한 채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제9중대 병사들은 숨을 죽였다.
그보다 앞선 08:30, 북한군은 소재를 점령한 뒤 약 5km를 진격하는 데 2시간 30분을 소비했다. 그 시간 덕분에 제9중대는 새로운 방어진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북한군은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았다. 일부 전차병은 전차 밖으로 몸을 내놓고 있었다. 선두 전차가 장애물을 발견하고 멈췄다. 뒤따르던 장갑차와 보병도 차례로 정지했다.
김동환이 사격명령을 내렸다. 기관총과 소총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북한군 보병들이 쓰러졌다. 로켓포탄이 장갑차를 향해 날아갔다.
장갑차 2대가 불길에 휩싸였다. 뒤따르던 보병들은 혼비백산해 흩어졌다. 석계리 골짜기에 국군 병사들의 함성이 울렸다.
그러나 승리의 순간은 길지 않았다. 북한군 전차와 장갑차가 포신을 돌렸다. 전차포와 기관총 사격이 제9중대 진지를 뒤덮었다. 흙과 돌이 솟구쳤고, 참호가 무너졌다.
북한군에 비해 병력과 화력이 크게 열세였던 제9중대는 끝내 진지를 지킬 수 없었다. 많은 사상자를 남기고 강령 방향으로 분산 철수했다.
제3대대 우전방을 맡았던 제11중대도 철수하고 있었다. 소재에 배치되었던 제11중대 제1소대는 철수명령을 받았다. 소대장 김태금 소위는 2개 소대를 대대본부에서 철수시킨 뒤, 서쪽 무명고지에 급편 방어진지를 만들었다.
제11중대장 김종룡 중위와 다른 중대원들은 더 늦게 철수를 시작해 217고지에 집결하고 있었다.
11:00. 북쪽에서 요란한 총성과 포성이 들렸다. 약 20분 뒤 북한군의 전차와 장갑차 대열이 석계리에 나타났다.
제11중대 제1소대는 화력을 한곳에 집중했다.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려 했지만, 전차포탄이 진지 주변에서 연이어 터졌다. 병력은 더 버티지 못하고 철수했다.
철수하던 제1소대는 제10중대장 양재정 대위를 만났다. 그들은 함께 광암리(부포 북쪽 7km)로 이동해 바다로 나갈 배를 찾았다.
6월 26일 아침, 양재정 대위는 어렵게 어선 한 척을 구했다. 그러나 배는 작았다. 모든 병력을 한꺼번에 태울 수 없었다.
그는 병력을 세 개 조로 나눴다. 제11중대 제1소대의 김동석 소위에게 먼저 20명을 이끌고 연평도로 향하도록 했다.
그러나 운항 도중 선임하사가 물에 빠져 사망했다. 남은 병사들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작은 배 한 척에 자신들의 생사가 걸려 있었다. 그들은 전우의 죽음을 뒤로하고 연평도를 향해 떠났다.
이로써 제17연대 제3대대가 방어했던 양원·강령 지구의 지상전투는 끝났다. 옹진반도의 전투는 이제 육지에서 바다로 옮겨가고 있었다.
/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