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핵심 요약
beta- 서울시극단이 10월26일~11월14일 에너미를 올린다
- 입센 민중의 적을 SNS시대 여론극으로 재해석했다
- 문소리·이봉련이 커스틴 역을 더블 캐스팅했다
!AI가 자동 생성한 요약으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요.
[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서울시극단(단장 이준우)이 헨리크 입센의 대표작 '민중의 적'(1882)을 원작으로 한 연극 '에너미(The Enemy)'를 오는 10월 26일부터 11월 14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무대에 올린다. 스코틀랜드 극작가 키어런 헐리(Kieran Hurley)가 쓴 현대적 각색본을 강훈구 작가가 번역·윤색하고, 서울시극단 단장 이준우가 연출한다.
입센의 '민중의 적'은 온천 도시의 수질 오염을 발견한 의사가 이를 세상에 알리려다 지역사회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충돌하고, 끝내 자신이 '민중의 적'으로 몰리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발표된 지 14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진실과 다수의 이해, 민주주의와 여론의 취약성을 정면으로 파고든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이번 '에너미'는 원작의 핵심 갈등을 유지하면서도 인물의 성별과 세대를 재배치하고, 신문과 시민 집회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여론 형성의 무대를 SNS와 온라인 라이브 방송 등 오늘날의 디지털 미디어 환경으로 옮겼다. 사실이 충분히 확인되기도 전에 하나의 주장과 이미지가 여론을 뒤덮고, 온라인에서 시작된 반응이 현실의 관계와 삶까지 흔드는 오늘의 풍경을 입센의 서사 위에 겹쳐놓는다.
◆'온천'에서 '대형 리조트'로 더 첨예해진 지역의 생존과 공공선의 충돌
원작에서 지역 경제 부흥의 상징이었던 '온천'은, 대규모 워터파크 리조트 '빅 스플래쉬'로 바뀐다. 극의 배경은 산업 쇠퇴와 인구 유출을 겪고 있는 스코틀랜드의 한 지역 도시. 시장 보니는 중앙정부와 기업의 투자를 이끌어내 리조트 건설을 성사시키고, 정부의 '재생 혁신 도시' 지정을 추진한다. 지역에서 리조트가 사실상 마지막 기회처럼 놓여 있다는 설정은, 오염을 둘러싼 갈등을 단순한 선악 구도가 아니라 절박한 생존의 딜레마로 만들어낸다.
리조트 개장을 밀어붙이는 보니 역시 단순한 악역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녀에게 편법은 부끄러운 타협이 아니라 일을 성사시키기 위한 현실적인 수단이며, 지역 주민을 병들게 하는 것은 오염보다 가난이라는 확고한 믿음도 있다. 오염 사실을 둘러싼 갈등은 선과 악의 대립을 넘어 공동체의 생존과 공공선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확장된다.

원작의 남성 의사 '토마스 스토크만'은 활동가 출신 이사 '커스틴 스토크만'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녀가 친환경 리조트 '빅 스플래쉬'를 직접 제안하고 상임이사가 되었다는 설정은 극의 핵심 아이러니다. 학창 시절 반전 시위를 조직해 홀로 교문에 자신을 묶었을 만큼 신념을 몸으로 밀어붙이던 인물이지만, 이제는 지켜야 할 딸이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주저하게 만든다. 몸으로 막아서던 사람이 잃을 게 생기고 나서야 멈춰 서는, 공공선과 가족 사이에서 고민하는 인물로 다시 그려졌다.
원작의 형제 '페테르와 토마스 스토크만'은 시장 보니와 동생 커스틴이라는 자매 관계로 재구성됐다. 보니는 상수도 교체에 막대한 비용이 들고, '독극물 리조트'라는 낙인이 찍히는 순간 지역경제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이유로 동생의 폭로를 막으려 한다. 여기에 주민들이 리조트 공모주에 참여해 각자의 미래까지 걸어놓았다는 설정이 더해지며 두 자매의 갈등은 개인의 신념을 넘어 도시 전체의 문제로 번져간다.
여론을 움직이는 인물 역시 달라졌다. 원작의 인쇄업자 '아슬락센'은 유튜버 '앨리 아슬락센'으로 변모한다. 선한 영향력을 원했던 그는 여론이 폭력적으로 번지자 당황해 발을 빼고, 커스틴을 방송에 세우려다 베니에게 저지당한다. 원작의 기회주의자와 달리, 선의와 두려움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적인 얼굴로 그려지며, 인쇄된 신문에서 SNS와 라이브 방송으로 옮겨간 여론의 무게중심을 한 인물 안에 담아낸다. 인쇄업자가 유튜버로 바뀐 이 변화는 곧 SNS 시대로 이야기의 중심축이 옮겨갔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치이기도 하다.
◆개장식 날 '민중의 적'이 되기까지 단 24시간
'에너미'의 시간은 리조트 '빅 스플래쉬'가 문을 여는 날 아침에 시작된다. 개장 준비로 들뜬 동네에서, 커스틴은 주민들이 마시는 수돗물이 독성 물질에 오염되었다는 검사 결과를 받아 든다. 원작에서는 신문 발행과 시민 집회라는 절차를 거치며 여론이 서서히 돌아섰다면, '에너미'에서는 진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공동체 전체에게 버림받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채 24시간이 되지 않는 시간 안에서 벌어진다.
개장을 앞둔 시장 보니는 지금은 밝힐 수 없다며 동생의 입을 막고, 특종을 약속했던 기자 베니는 시장의 압박 앞에 등을 돌린다. 기댈 곳을 잃은 커스틴이 SNS에 오염 사실을 직접 올리자, 게시물은 공유와 댓글을 타고 순식간에 번져 나간다. 불과 몇 시간 만에 그는 '정신병을 앓는 여자', '일자리 천이백 개를 날린 배은망덕한 인간'으로 불리고, 검사 결과의 신뢰성과 박사 학위, 지난 사생활까지 파헤쳐진다. 여론의 화살은 끝내 학교와 온라인에서 딸 페트라에게까지 향하고, 그날 열린 개장식 무대에서 커스틴은 공식적으로 '민중의 적'으로 규정된다.
15개의 짧은 장이 빠르게 교차하는 가운데 관객은 한 사람이 존경받는 지역사회의 구성원에서 '민중의 적'으로 추락하는 하루를 실시간으로 따라간다. 사실 확인보다 뉴스가, 뉴스보다 댓글이 빠른 시대. 〈에너미〉는 진실의 내용만큼이나 빠르게 움직이는 여론이 개인과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묻는다.
◆문소리·이봉련, 두 배우가 완성하는 '커스틴'
주인공 커스틴 역에는 배우 문소리와 이봉련이 더블 캐스팅됐다. 신념을 행동으로 옮겨온 활동가이자 '빅 스플래쉬'를 직접 기획한 상임이사, 그리고 한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커스틴은 공공의 책임과 가족의 삶 사이에서 끊임없이 선택을 요구받는 인물이다. 하루 사이 지역사회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인물에서 공동체의 적으로 몰리는 커스틴의 급격한 변화를 문소리와 이봉련이 각기 다른 결로 그려낼 예정이다.
커스틴의 언니이자 시장 '보니' 역은 황영희, 진실과 생존 사이에서 흔들리는 기자 '베니' 역은 마두영, 커스틴의 시아버지이자 사업가 '데릭' 역은 서울시극단 단원 강신구가 맡는다. 뮤지션 출신 유튜버 '앨리' 역에는 이강욱, 커스틴의 외동딸 '페트라' 역에는 박세은이 출연해 각기 다른 입장과 이해관계로 얽힌 공동체의 모습을 완성한다.
◆입센의 고전, 이준우와 강훈구의 손을 거쳐 새롭게 재구성
원작자 헨리크 입센(1828~1906)은 노르웨이의 극작가로, 「인형의 집」, 「헤다 가블레르」 등을 통해 근대 사실주의 연극의 토대를 놓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민중의 적』은 그가 사회 문제와 개인의 신념 사이의 충돌을 가장 직접적으로 다룬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이번 각색을 쓴 키어런 헐리는 스코틀랜드 출신 극작가로, 동시대 사회 문제를 날카롭게 포착하는 작품들로 주목받아 왔다. 그는 1882년에 발표된 입센 원작의 갈등을 오늘날 스코틀랜드의 한 소도시로 옮기고, 형제를 자매로, 온천을 대형 리조트로, 신문과 시민 집회를 SNS와 라이브 방송으로 바꾸며 원작의 질문을 오늘날의 여론 환경 위에 새롭게 펼쳐놓았다.
번역과 윤색을 맡은 강훈구 작가는 원작의 서사 구조를 촘촘히 계승하면서도, 지역소멸과 도시재생, SNS 여론전, 미투 이슈 등 오늘날 어디에서나 마주할 수 있는 동시대적 디테일들을 정교하게 엮어냈다. 특히 극 전체를 리조트 개장을 앞두고 채 24시간이 되지 않는 시간 안에 압축해 배치함으로써, 한 사람이 '민중의 적'으로 몰리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오늘날 얼마나 짧아졌는지를 관객이 체감하도록 설계했다. 사실이 검증되기도 전에 프레임이 되고, 그 프레임이 다시 밈으로, 밈이 실제 위협으로 번져가는 과정을 하루라는 압축된 시간 구조 안에 촘촘하게 배치한 것이 이번 윤색의 핵심이다.
연출은 서울시극단 단장 이준우가 맡는다. 그는 라이브 방송과 실시간 채팅, 쏟아지는 댓글과 뉴스 자막을 배우들의 연기와 동시에 펼쳐 보이며, 관객이 여론의 형성과 확산 과정을 무대 안에서 직접 목격하도록 한다. 이준우 연출은 "140여 년 전 입센이 던진 질문은 조금도 낡지 않았고, 오히려 지금 더 날카로워졌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한 사람이 '민중의 적'이 되기까지 신문이 인쇄되고 사람들이 광장에 모이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게시물 하나와 하루면 충분하다. 〈에너미〉는 그 속도가 한 사람과 한 가족, 한 공동체를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를 정면으로 들여다보는 작품"이라고 전했다. 무대와 온라인 화면이 하나로 겹쳐지는 이번 미디어극의 형식은, 서울시극단을 이끄는 이준우 단장이 동시대 사회극을 향해 가져온 문제의식이 응축된 결과이기도 하다.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은 "140여 년 전 입센이 던진 질문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이 이 작품의 힘"이라며 "진실과 여론, 개인의 신념과 공동체의 이해가 충돌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떤 선택을 하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jyyang@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