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핵심 요약
beta- 변상문은 6·25전쟁 희생자를 기리며 ‘화랑담배’를 정했다.
- 북한은 1950년 5월 전쟁 준비를 독려하며 남침을 준비했다.
- 국군은 인사 교체와 경계 해제로 전선 공백을 자초했다.
!AI가 자동 생성한 요약으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요.
변상문의 '화랑담배'는 6·25전쟁 이야기이다. 6·25전쟁 때 희생된 모든 분에게 감사드리고, 그 위대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제목을 '화랑담배'로 정했다.
평양
침략의 발톱을 숨긴 북한 땅 위로 거대한 음모의 그림자가 소리 없이 드리웠다. 갑작스러운 전쟁의 기운이 감돌며 주민과 군 내부가 불안에 휩싸이자, 북한 수뇌부는 1950년 5월 17일, 모란봉 극장에서 전군 지휘관 회의를 열었다.
그들은 평화라는 이름의 위장된 애드벌룬을 띄우면서도, 뒤편에서는 무력 통일의 필연성과 국방군 섬멸을 위한 동원 태세를 강하게 독려했다. "오늘 이후 전쟁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라"라는 서슬 퍼런 명령이 평양의 공기를 차갑게 얼렸다.
남침을 단 17일 앞둔 1950년 6월 8일, 평양방송은 8월 초 "남북한 총선거를 하자." 달콤한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이승만 정부와 유엔 한국위원단을 배제하라는 독소 조항이 숨어있었다.
대한민국이 1950년 6월 10일 이를 단호히 거절하자, 북한은 돌연 1950년 6월 11일 10:00를 기해 조통요원 이연규, 김태홍, 김재창을 경기도 개성 인근 여현으로 특파하겠다고 발표하며 긴장을 고조시켰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여현 현장에서 이들을 즉각 체포했다. 1950년 6월 10일,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 대령은 이들의 체포와 군법 회부 소식을 전 세계에 알렸다.
이에 북한은 무력행사까지 운운하며 조만식 선생과 남로당의 김삼룡, 이주하를 맞바꾸자는 제안으로 맞섰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6월 16일, 인도적 차원에서 이 제안을 수용했으나 북한은 또 다른 정치적 회의를 제안하며 시간 벌기에 급급했다. 1950년 6월 22일까지 이어진 대한민국의 마지막 제의에도 북한은 끝내 침묵으로 일관하며 총공격의 시계만을 응시했다.

서울
북한의 창끝이 남쪽을 겨누던 1950년 6월 24일, 서울의 풍경은 평양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거리에는 경쾌한 음악이 흐르고 청춘들의 웃음소리가 맥놀이 쳤다. 휴가와 외출을 나온 군인들은 평화로운 거리를 활보했다. 야구장의 함성은 드높았다. 그 누구도 수 시간 뒤에 들이닥칠 비극의 전차 소리를 상상하지 못했다. 1950년 6월 24일 토요일 오후,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의 위장 전술을 미처 간파하지 못한 채 서재에서 정적을 마주했다. 군 정보기관의 이상 동향 보고가 있었으나, 그것이 전면적인 남침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확신은 서울의 그 어느 곳에도 자리 잡지 못했다.
군 수뇌부 인사 단행
위기설이 파도처럼 밀려오던 1950년 6월 10일,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은 전선의 운명을 가를 주요 지휘관 인사를 전격적으로 단행했다.
∎이형근 준장: 제8사단장에서 제2사단장으로
∎유재흥 준장: 제2사단장에서 제7사단장으로
∎김종오 대령: 제1연대장에서 제6사단장으로
∎신상철 대령: 제6사단장에서 육본 인사국장으로
∎이성가 대령: 제16연대장에서 제8사단장으로
∎이종찬 대령: 국방부 제1국장에서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장창국 대령: 참모학교 부교장에서 육본 작전교육국장으로
∎강문봉 대령: 육본 작전교육국장에서 도미 유학 대기로
38도선에 배치된 4개 사단 중 3개 사단장과 작전의 중추인 육본 작전교육국장을 일시에 교체했다. 이 조치는 결과적으로 전선의 지휘 체계에 치명적인 공백을 불러왔다.
장비 후송
전투의 근간이 되는 화기들조차 정비라는 이름 아래 전선을 떠나있었다. 육본 병기감실은 미군으로부터 받은 중고 장비들을 수리하기 위해 각 사단 화기의 15~20%를 부평 병기창으로 후송했다. 특히 제6사단은 장비를 춘천에 집결시켜 놓아, 전쟁이 발발하자 즉각 다시 부대로 분배하여 지장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대는 이미 장비를 후송한 뒤라 제대로 된 화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차량 또한 전군 소요량의 겨우 20%만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그중 상당수가 수리를 위해 후방에 머물렀다. 이로 인해 개전과 동시에 병력과 탄약 수송을 위해 민간 차량을 강제로 징발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이 초래되었다.
비상경계령 해제와 연회
1950년 초부터 일기 시작한 위기설에 따라 4월 29일부터 5월 2일 메이 비상, 5월 27일부터 6월 2일 5·30 총선거 비상, 6월 11일부터 6월 23일 북한의 위장평화 공세에 대비한 비상으로 이어져 장병들은 비상에 면역이 되다시피 하여 비상 해제를 믿지 않았다. 그러던 중, 6월 23일 24:00를 기하여 진짜로 비상이 해제되었다. 1950년 6월 24일 토요일 외출 및 외박, 휴가가 실시되어 군인들이 부대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농번기 일손 돕기와 군량미 부족 해결이라는 명분 아래 병력의 상당수가 전선을 비웠다. 이는 곧 국방의 거대한 공동화로 이어졌다. 그러함에도 38도선에 배치된 일부 부대는 북한군 상황을 우려하여 장병들의 외출·외박, 휴가를 중지하였다.
제7사단 제9연대장 윤춘근 중령은 "적의 전면 남침이 곧 있을 것이다"라고 판단하여 6월 20일 삭발, 금주, 금연을 솔선하면서 6월 24일에는 대대장급 이상 지휘관을 대상으로 "6월 25일 새벽이 위험하다. 12:00까지 기다렸다가 이상 없으면 그때 휴가를 보내라"라고 엄명하였다. 이로써 제9연대는 전군에서 즉각 출동하는 부대가 되었다.
제19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6월 19일 귀순한 북한군 병사로부터 "화천에 전차 40대가 집결해 있다"라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수색대 소위 윤주용을 화천 방면으로 침투시켜 그로부터 "화천에 차량 400대, 양구에 300대가 남쪽을 향해 줄 서 있고 대병력이 숙영 중이다"라는 보고도 받았다. 6월 23일 08:00 때마침 초도 순시 차 연대를 방문한 김종오 사단장에게 적정을 자세히 보고하였다.
김종오 사단장은 즉각 육군본부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마침 출타 중이어서 대신 전화를 받은 미군 대위에게 적정을 알렸다. 그러나 그는 "다른 지역은 평온하며 남침은 절대 없을 것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이 중요한 정보는 '1개 미군 대위의 손'에 의해 파묻히고 말았다.
북한군은 1950년 6월 23일 38도선에 집결 완료했다. 목전에 둔 남침을 위해 지형정찰과 공격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국군은 38도선을 비워 놓았다. 장병들은 부대를 떠나 집으로 향했다. 사단장급 이상 지휘관은 이날 저녁 육본 장교클럽에서 열린 개관 연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부대를 떠나 서울에 있었다. 전선은 비어 있었고, 경계는 무너졌으며, 역사의 비극은 그렇게 소리 없이 다가왔다.
/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