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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랑 45주년 기념 '밤하늘의 별이 되어'...서양화 선구자 21명 치열한 삶 조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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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5일부터 5월 4일까지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1978년 설립된 예화랑(서울시 강남구 가로수길 73)이 창립 45주년을 맞아 기념전시 '밤하늘의 별이 되어'를 4월 5일부터 5월 4일까지 개최한다.

'밤하늘의 별이 되어'는 예화랑의 뿌리를 찾아가는 전시다. 이번 전시회의 화가 21명은 동양화가 주류였던 시기 이 땅에 서양화가 유입된 초기 시절 서양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우리의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독자적인 예술로 승화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일생을 살았던 선구자들이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쳐 해방과 6.25전쟁이라는 한국의 파란만장한 근현대사 속에서 오늘의 대한민국 미술을 반석 위에 올려준 미술문화 건국의 주역들을 모시는 자리가 된다.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나 자리에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예화랑은 연락이 닿는 유족들을 불러 선구자들의 아름다운 작품들을 보면서 이들을 기리는 자리를 만들고자 했다.

이번 전시의 작가들은 오지호 구본웅 남관 임군홍 이인성 김환기 윤중식 최영림 김향안 유영국 손응성 장욱진 이준 임직순 이대원 홍종명 문신 권옥연 정규 천경자 변종하(생년월일 순) 21명이다.

예화랑 김방은 대표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당시를 살았던 분들의 예술에 대한 진정성, 순수함과 열정을 느끼며 새삼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고 작가에 대한 존경심, 예술에 대한 경외감을 다시 한번 새길 수 있었다. 힘들었지만 아름다웠던 시기를 돌아보며 지금처럼 좋은 세상을 보지 못하고 가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다. 비록 지금 모습은 볼 수 없지만 '밤하늘의 별이 되어' 우리와 함께 계신 분들을 말이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 오지호 (1905~1982)
1919년 3.1 운동 직후 나라를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강경한 성품과 남다른 민족의식이 전 생애에 걸쳐 있었던 작가. 1921년 한국의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으로부터 미술을 배우고, 1928년 서양화가 단체인 '녹향회'를 결성하여 전시를 열어 활동하던 중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는 사태를 맞기도 했다. 6.25전쟁 때에는 인민군을 피해 산중 생활을 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적도 있는 고난했던 우리의 역사를 피부로 느꼈던 작가다.

1938년 한국 최초의 컬러 화집 <오지호 김주경 2인화집>을 <순수회화론>과 함께 발표하면서 장안의 화제가 되었는데, 당시는 일본 화단에서조차 원색 화집을 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조선 회화의 우수함을 과시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이었다.

오지호의 회화는 한국의 자연, 한국의 정신세계를 담고자 하는 것이었고, 인상주의 화론은 밝고 맑은 한국의 자연을 그리기 위해서 가장 좋은 회화적 수단이라고 믿었다. 오지호는 "자연이 나고 내가 곧 자연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과 자연을 결부시켜 그림에 몰두하고 있었다. 한국의 풍광을 토대로 민족 회화를 창조하기 위해 매진한 오지호는 구상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이론을 겸비한 화가였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오지호, 북구의 봄, 44x59cm, oil on canvas(1981) 2023.04.03 digibobos@newspim.com

 

◆ 남관 (1911~1990)
남관은 흔히 문자추상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 작업을 완성해 가는 그가 창안한 데콜라주 기법은 그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물감이 아닌 종이, 천, 얇은 철판 등을 캔버스 위에 접착제로 붙이는 것을 콜라주라 한다면 데콜라주는 반대의 프로세스로, 붙인 이물질을 떼어내는 작업이다.

남관은 6.25 전쟁이 남긴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던 1954년 미도파화랑에서 도불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12월 프랑스 유학을 감행하였다. 이때만 해도 서울을 떠나 일본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한 달에 걸려 파리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68년까지 14년간의 프랑스 생활이 시작되었다.

힘든 생활이었다. 몽파르나스의 반지하 셋집은 습기가 늘 흥건했고, 벽돌을 바닥에 놓고 그 위에 캔버스를 세워야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극한의 상황이었지만 커피 한잔의 시간도 아까워 사람을 만나는 것도 피해가며 목숨 걸고  그림을 그렸다.

작업실의 축축한 물기가 캔버스 위의 붙여진 종이들을 퉁퉁 불렸고 그 종이를 다시 한 겹 한 겹 벗겨내며 먼 과거로, 아득한 원형의 세계로 돌아간 듯한 미묘한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을 완성시켜나갔다. 남관의 문자추상작업들은 고대의 상형문자와 같고 조선의 예술가들이 작품을 마치고 자기의 분신 같은 낙관을 찍듯 마치 무슨 암호나 코드와 같이 느껴진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남관, 옛뜰, oil on canvas, 64x80cm(1985) 2023.04.03 digibobos@newspim.com

1966년 프랑스 망통 현대 비엔날레에서의 망통시 1등 상은 작가 개인에게는 식민지 시대 청년 일본 유학시절을 거쳐 한국전쟁, 5·60년대의 처절한 고생의 프랑스 유학시절에 대한 보상이기도 하였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 국가에는 커다란 큰 영광을 안겨준 대단한 사건이었다. 

◆ 임군홍 (1912~1950 월북 ~ 1979)
대한민국의 파란만장한 근대사를 고스란히 온몸에 떠 앉고 작업 활동을 했던 작가가 임군홍 이상의 작가가 또 있을까? 임군홍은 1930·40년대 서울, 신징, 베이징, 한커우에서 산업미술과 순수예술의 창작활동을 누구보다도 활발히 하였으나 1948년 교통부의 신년 달력에 세계적인 무용수 최승희 사진을 실었다는 이유로 검거되어 수개월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으로 인해 1950년 9.28 서울 수복 때 임군홍은 가족을 남에 놔둔 채 일단 몸을 피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월북을 하게 된다. 이것이 영원히 가족과 이별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는 일이었을 것이다. 1950년대 이후에는 평양, 개성, 함경북도 일대를 떠돌며 작업을 하다 68세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 그의 일생은 개인이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무거운 시대의 아픔인 것이다.

50년에 북으로 간 이후 우리에게는 잊혀진 화가였지만, 천만다행히 유족에 의해 70년 넘게 고스란히 보관된 그의 30·40년대 작품들은 보물처럼 남아 우리에게 그 시대의 아픔과 함께 임군홍의 작품세계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임군홍, 정물, 16.4x36.5cm, oil on canvas 2023.04.03 digibobos@newspim.com

 

◆ 김환기 (1913~1974)
이번 전시에는 김환기의 예술적 동지이자 삶의 반려자인 김향안 (본명 변동림)의 그림이 함께 전시된다. 두 사람은 1944년 고희동의 주례로 결혼하여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함께 겪고, 파리와 뉴욕에서 동고동락하며 예술 창작에 몰입하였다.

김환기는 타고난 예술적 기질과 지칠 줄 모르는 도전정신으로 추상미술의 최정상에 선 20세기의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작가다. 우리 산천과 달 구름 등 자연의 모습과 백자, 골동 민예품 등 민족 정서를 일깨우는 화재를 선택해 서양화의 재료와 기법을 사용해 서정적이고 추상적인 화면을 완성시켜 나갔다.

1930년대에는 일본에서 교육을 받고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전시 활동을 하였고, 1946~49년 서울대 미술대 교수, 1952년에는 홍대 미술대 교수를 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56년 44세의 나이에 파리로 떠나 3년 동안 프랑스에서 창작 생활을 이어나갔다.

1959년 김환기가 파리를 떠나면서 몽파르나스 뒤 어두운 창고 같은 남관의 화실을 찾아 "자네는 파리에서 뼈를 묻게"라고 한말은 후에 남관의 글을 통해 알려졌다. 이후 김환기는 한국으로 돌아와 작업 생활을 하다가 1963년 뉴욕으로 떠나고 1974년 생을 마칠 때까지 뉴욕에서 머물면서 전면 점화를 탄생시키면서 추상회화의 대표적인 화가가 된다.

1974년 김환기가 뉴욕에서 타계한 소식을 접한 남관은 "김환기 형의 영전에 " (동아일보 1974)에서 김환기의 죽음에 대한 애통한 마음을 전하면서 "서울에 주저앉아 있는 게 형에게 부끄럽다"라는 심정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20세기 최고의 두 추상화가의 예술세계가 얼마나 치열했고 진지했는지 알려주는 대목이다.

◆ 윤중식 (1913~2012)
그는 석양빛 찬란한 자연미의 정취, 비둘기가 나타나는 평화 염원의 시각이 내포된 서정적인 풍경미를 추구한 작가다. 1931년 2학년인 그는 서울의 미술가 등용문이던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출품하여 입선, 그다음 해와 다음다음 해에도 연속 입선하였다. 중학교를 졸업하며 화가의 꿈을 확정한 윤중식은 도쿄의 데이코쿠 미술학교 서양학과로 유학을 떠나 1940년 졸업하고 돌아온다. 1953년 6.25 전쟁 정전 직후 윤중식은 제2회 국전 서양화부에 출품한 <가을풍경>이 특선에 오르며 작가적 위상을 다진다. 그 후 몇 번 입상을 거듭한 그는 1959년 제8회전부터 추천작가 위치에 오른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의 작품은 더욱 자유로운 변용으로 이어진다. 다분히 도식적인 단순화, 그러면서 자연미의 본질을 풍부하고 밀도 짙은 색채로 표현감정이 두드러지게 조화되는 형태로 추구되어 간다. 윤중식은 국립현대미술관의 기획전시를 비롯한 여러 비중 큰 초대전에 거의 빠짐없이 참가했다. 그때마다 그의 화면들은 선명하게 개성적이며 표현감성이 풍부하게 빚어진 전형적 작풍을 부각시켰다.

◆ 최영림 (1916~1985)
최영림은 전설을 테마로 하는 작품 활동을 벌였던 전설의 작가이다. 최영림은 지난날의 말벗이 은밀하게 들려주던 전설의 맥락을 회화의 어법으로 번안하여 현실의 우리들에게 들려주던 말벗으로서의 화가이다. 말벗으로서 최영림의 그림은 정령신앙적인 모티브가 농후하게 응용되고 있다. 그의 소지가 모래나 흙가루 같은 마티에르로 되어있어 더욱 그렇다.

그의 미술은 19세와 20세가 되던 해에 주목받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 평양박물관의 학예원인 일본인 오노 다타아키의 지도로 목판화를 배우게 되는데, 스승의 권유로 일본판화협회전에 출품한 게 입선이 되었다. 이 일은 최영림에겐 크나큰 사건이었고, 사회적 사실로서의 미술의 각성이기도 했다. 그는 후일 오노의 소개로 일본으로 건너가 무나카타 시코로부터 목판화 기법의 지도를 받게 되며, 이때의 경험이 최영림 미술의 생애를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 김향안 (1916~2004)
김향안은 시인 이상과 함께 했고, 수화 김환기의 아내로 기억되지만 그들과 함께 하는 모든 순간 스스로도 그림을 그리고 수필을 씀으로써 자신의 미의식을 발전시키며 본인만의 예술 세계를 펼쳤다. 그녀는 한국적인 정체성을 기반으로 하여 해외에서 활동하는 김환기의 예술 토양이 되어주었으며 그의 작품을 가장 한국적이자 세계적인 작품으로 만드는데 일조한다.

'그림은 사람하고 같은 공기를 마시고 먼지를 쏘이며 생명체처럼 살아갈 때 비로소 광채를 발휘한다.'라고 믿은 그녀는 김환기 사후에 국내 최초 사설 기념관인 환기미술관을 1992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에 개관하였다.
"가로되 아름다움을 공감할 줄 아는 사이에는 나누어 즐겨야 한다. 그의 작품에서 나도 공감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때 황홀하다."

◆ 유영국 (1916~2002)
유영국은 한국 근대미술의 전위에 서서 추상미술의 영역을 개척했던 선구자다. 특히, 한국의 자연을 아름다운 색채와 대담한 추상 형태로 빚어낸 최고의 조형감각을 지닌 화가다. 1935년 도쿄 문화학원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비교적 자유로운 화풍을 자랑했던 문화학원에서 그는 당시 도쿄에서도 가장 전위적인 미술운동이었던 '추상'을 처음부터 시도했다.

형태는 비정형적인 것에서부터 점차 기하학적인 형태로 단순화했고 삼원색을 기반으로 하되 유영국의 특유의 보라, 초록 등 다양한 변주가 구사된다. 이로써 유영국의 작품은 회화적 아름다움이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해간다.

◆ 장욱진 (1917~1990)
장욱진은 소년 시절부터 학생미전에서 빛나는 수상을 하는 등 천부적인 예술적인 소질을 발휘하였다. 1943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후배 양성과 조국의 빈곤한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터전을 개척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작가에게 자연은 늘 영감의 원천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집과 이틀리에 주변을 산책하며 하루를 시작한 그는 자연에서 전쟁으로 떠난 고향과 어린 시절에 관한 향수를 느꼈다. 그의 그림 속 푸르른 생명력을 간직한 풍경은 자연과 벗하며 살기 원한 화가의 또 다른 초상이자 원초적 이상향이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장욱진, Untitled, 26x19.5cm, marker on paper(1979) 2023.04.03 digibobos@newspim.com

장욱진의 작품은 마치 초등학생이 그린 것처럼 단순하지만 그 속에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조화로운 화면 구성과 동양철학 사상을 담고 있다. "나는 심플하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화가 장욱진은 평생을 자연 속에서 심플한 삶을 살면서 그림을 통해 동화적이고 이상적인 내면 세계를 표현하였다.

◆ 임직순 (1921~1996)
'꽃과 여인의 작가'로 불리는 임직순은 특유의 색채가 인상적인 작가이다. 임직순은 빛의 대비와 색채의 변조를 통한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면서도 형식적으로 안정된 구도를 추구하였으며, 작품의 주제로 자연의 모습과 꽃과 여인을 화폭에 담아내 궁극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의 힘과 그 내면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작품의 바탕을 인상파적인 미학에 두었지만, 그보다 더욱 현대적인 감각이나 시각의 기쁨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 임직순의 작품세계이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임직순, 화실의 한떄, oil on canvas, 112x145.5cm(1986 복사) 2023.04.03 digibobos@newspim.com

그는 6·25 전쟁으로 중단됐던 국전이 1953년 휴전과 함께 재개되자 해마다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였고1957년 제6회 국전에서는 꾸준하게 노력과 부지런함으로 닦아온 그간의 역량을 인정받아 문교부장관상을 거쳐 실내의 소녀를 주제 삼은 풍부한 색채 구사의 「좌상」 이 대통령상을 타며 크게 각광을 받았다.

◆ 이대원 (1921~2005)
이대원 작가의 작품에는 진정으로 그리고 싶었던 충동과 남다른 심성의 자연관과 향토적 애정의 깊이가 진하게 묻어 나온다. 이대원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그림 재능을 보이고 있었으나 뜻했던 미술학교 진학은 집안의 반대로 좌절하고 경성제국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림을 포기할 수 없었고, 화가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나갔다.

전통적 미의식과 한국적 감성의 표출, 우리의 고화, 민화 민예품 등에 애정을 가지고 있던 이대원은 서예와 이조의 수묵화, 중국 청나라 초에 간행된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등의 묘화법 등을 배워 1960년대 민화 풍의 시도와 유채로서의 문인화 전통의 묵화 형식을 계승하고 1970년대 동양적 혹은 한국적 감성 표출을 위한 점묘다채 수법을 통해 한층 독자성을 키워나갔다.

프랑스 미술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는 "이대원은 빛을 그린다기보다는 데생한다."며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그의 나무 그림은 한국 수묵화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고 평가했으며 부수처럼 쏟아지는 눈부신 색채의 향연에서 받는 감동적인 자연에의 귀의는 바야흐로 생의 허심한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니냐는 극찬을 받고 있다.

◆ 홍종명 (1922~2004)
과수원 집 딸을 그리는 작가로 알려져 있는 홍종명은 일제 강점기 때 데이고쿠미술학교에서 수학한 뒤 한국전쟁 중 남한으로 자유를 찾아 내려온 평양 출신이다. 1951년 후퇴 때 제주까지 피난을 와 어려운 피난 상황에서도 제주시 칠성통에 '미술사'라는 화방을 열고, 오현중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일하는 동시에, 그림을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을 가르쳐 제주 현대미술의 주역들을 키워냈다.

한국전쟁과 분단으로 이산이라는 아픔을 겪어 그의 작품에는 고향을 연상시키는 향토적 소재, 헤어진 큰 딸을 그리워하는 정서가 자연스럽게 담겨있다. 작가는 향토적 정서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정립하였고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흙의 빛깔과 같은 색을 사용하여 고분벽화의 퇴락한 색조를 재현하려 했다. 그의 작품에서 간취되는 한국적인 특성은 거친 질감과 투박한 색채에 의해 초가집, 벽화와 같은 요소이며 질감이 남한에는 없는 고구려 고분 벽화를 상기시킨다는 점은 주목할 일이다.

◆ 문신 (1923~1995)
문신은 유년 시절을 마산에서 보내고 1938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일본미술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한 후 고국으로 돌아왔다. 마산과 서울을 오가며 회화작가로 활동하다가 돌연 1961년 프랑스로 떠나 60년후반부터 기존에 하던 구상회화에서 벗어나 추상조각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970년 프랑스에서 열린 국제 조각 심포지엄에 출품한 13미터 높이 나무조각 '태양의 인간'으로 조각가로서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그가 선보인 브론즈, 나무, 석고 조각은 유럽 미술계에서도 독창성을 인정받고 조각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1980년 프랑스로부터의 귀화 요청을 거절하고 귀국, 고향 마산에 정착하여 1995년 타계할 때까지 창작에 몰두했다.

그는 퍼블릭 아트라 불리는 야외 조각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1988년 올림픽 조각공원의 25미터 높이 작품으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1992년에는 파리 시립현대미술관에서 헨리 무어, 알렉산더 칼더와 함께 <세계3대 조각 거장전>에 참여해 조각가로서의 명성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또한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문학 훈장인 '슈발리에'를 수상했고, 제11회 세종문화상을 수상했다. 1994년에는 프랑스 예술문화 훈장 '오피시에'를 수상했다.

◆ 권옥연 (1923~2011)
화가 권옥연을 떠올렸을 때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그만의 개성은 사물을 인식하고 자신의 내면 속에서 걸러내어 이를 화면 위에 개성적 이미지로 발현시키는 개인 양식을 심화한 결과이다. 그는 독자적인 자신만의 양식을 확립한 작가들을 동경하면서 "전람회장에 들어갔을 때, 작품보다는 사람이 먼저 보이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하였고 "흉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체취, 자신만의 시, 자신만의 노래"를 갖기를 원했다.

이러한 면모는 권옥연을 어떤 사조나 운동의 흐름 속의 하나가 아닌 권옥연 자체가 가진 고고한 개성으로 작품을 바라보게 한다. 그가 일본 제국미술학교에서 수학 후 돌아와 활동한 초기의 구상적 화풍에서, 50년대 후반부터의 추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양식의 화풍, 70년대 이후의 인물, 정물, 풍경의 구상적 화풍으로 회귀하기까지 변화의 과정 속에서도 그의 감수성에 바탕을 둔 '스타일'은 또렷하게 드러난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권옥연, 여인, 27.5x22cm, oil on canvas, (1980-1984) 2023.04.03 digibobos@newspim.com

"권옥연의 목청을 그림 속 빛깔로 나타낸다면 오래된 기왓장을 닮은 청회색이 될 것이다"라고 평론가 황인이 말했듯이, 그의 그림 속 절제된 회색 톤을 자신만의 그림을 나타내는 특유의 포에지(poesie)로 자리 잡았다. 강렬한 원색이 없이도 단번에 눈길을 잡아끌고 오래 보게 하는 것은 그가 가진 예리하고 풍부한 감성을 갈무리하여 깊이를 더하고, 차분한 색채를 조화롭게 사용하는 뛰어난 역량 때문이다. 

◆ 정규 (1923~1971)
정규는 화가, 판화가, 도예가로 장르를 넘나들며 활발한 화단 활동을 하였다. 그는 20대에 일본 데이코쿠 미술학교에서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해방을 맞이했지만 곧 6.25가 터지자 부산으로 내려왔고 1953년 부산 르네상스 다방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이듬해 서울로 올라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55년 록펠러재단 후원으로 국립박물관 부설 한국조형 문화연구소가 설립되자 연구원으로 활동하였다. 박물관에서 근무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58년에는 록펠러재단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가 도자를 연구하였고 1963년 경희대학교 요업 공예과 교수로 부임하여 현대 도자 운동을 주도하였다. 정규는 박대순, 남상교, 이신자 등과 함께 한국공예가회를 발족시키고, 공예 운동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정규는 최순우, 이구열, 이경성 등 당대 미술 이론가 및 비평가들과 교류하며 비평가로도 활동하였다. 특히 그가 1957년 잡지 <신태양>에 연재했던 '한국 양화의 선구자들'을 통해 우리의 근대미술가들을 발굴하고 재정립하였다. 그는 시대의 흐름을 예리하게 인지하여 관통하는 비전을 가졌고, 우리 고유의 미를 찾아 현대화하며 차별화하는 것을 고민한 작가였다.

◆ 천경자 (1924~2015)
천경자는 누구와도 닮지 않은 독특한 화풍과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컬러로 환상적인 작품 세계를 확립한 작가다. 그녀의 화가로서의 삶은 1940년 유학길에 올라 일본 동경여자미술대학에서 인물화를 익히고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자신의 조부를 그린 작품이 입선하며 시작되었다.

귀국 후 1946년에 모교인 광주여고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이후 1949년 서울에서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치르며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그 무렵 동생의 죽음과 삶의 역경으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린 1951년 작품 <생태>는 수십 마리의 뱀이 얽혀 있는 모습으로 화제가 되었다.

천경자는 자신의 삶의 희로애락을 작품을 통해 가감 없이 보여주었으며, 특히 여성으로서 삶이 가진 한과 슬픔을 화려한 색채를 통해 역설적으로 표현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받았다. 대표적인 작품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는 55세의 작가가 22세 자신의 과거 모습을 떠올리면서 그린 것으로, 그녀가 그린 작품 속 수많은 여인들은 모두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분신이다. "나는 종일 혼자 있어도 내 그림에 나오는 모델들과 대화도 하고 사랑도 나누니까 하루가 지루하지 않다"라며 자신의 그림을 목숨처럼 아끼고 사랑했고, 그림을 통해 삶을 구원받았다고 하였다.

1955년 여인 소묘를 시작으로 출간했던 여러 수필들로 연애와 결혼, 그리고 여자이자 엄마이고 예술가로서 살아가는 자신의 경험과 생각들을 진솔하게 남겼다. 1969년부터 유럽과 남미, 아프리카 등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이국적인 풍물에 영감을 받아 몽환적인 예술로 승화해서 표현하였다. 그녀에게 삶은 곧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떠나는 여행이었고, 2015년 타계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자신만의 꿈과 환상을 쫓아 생명력 넘치는 아름다운 작품을 피워냈다.

◆ 변종하 (1926~2000)
변종하는 한국적 이미지를 서정적이고 은유적으로 담아낸 작가이다. 그는 1950년대 서울에서 활발히 작품을 발표해오다 1960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의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와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62년 저명한 평론가이자 시인인 르네 드루앵(Rene Drouin)과 만나면서 이전의 표현주의적 경향에서 벗어나 작품 세계에 큰 전환을 가져왔다.

르네가 말한 '테푸이예(depoailler)', '껍질을 벗긴다'는 뜻의 단어는 화가에게는 군더더기를 빼고 본질에 도달해야 한다는 의미로, 변종하 작품세계의 평생의 테마가 되었다. 르네 드루앵에게 발탁된 후, 그는 런던과 파리, 뮌헨 등 유럽의 갤러리와 미술관을 무대로 활동하며 일그러진 인물상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우화>와 <돈키호테>연작 등을 발표했다.

변종하는 귀국 이후 1970년대부터는 부조와 같은 독특한 요철의 화면에 물들이듯이 채색을 하는 '요철회화'의 기법을 새롭게 시도하였다. 1980년대에는 한국의 자연에서 따온 모티브인 꽃, 새, 나무,달, 잠자리 등 우 리에게 친근한 풍경을 특유의 시적 서정성을 담아 간결하고 소박하게 표현했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변종하, 새, 46x53cm, mixed media on relief laid on canvas(1980년대) 2023.04.03 digibobos@newspim.com

이후에도 판화, 분청사기나 청화와 같은 도화(陶畵)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주제와 다양한 기법 등을 펼쳐 보였으며, 변종하만큼 이렇게 전 생애를 걸쳐 회화의 새로운 길을 탐구한 화가는 보기 드물다. 또한 그의 작품 속 간결하고 자연스러운 형태와 부드러운 색감, 독특한 문학적 서사가 있는 구성은 항상 본질에 다가가고자 했던 화가의 심상 그 자체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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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참 "북한군 지뢰일 가능성 매우 높다" [서울=뉴스핌] 오동룡 군사방산전문기자 = 합동참모본부는 지난 21일 육군 25사단 지역 비무장지대(DMZ)에서 발생한 지뢰 폭발 사고의 원인을 "북한군 지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했다. 부상 장병의 장구류에서는 TNT 성분과 갈색 계열 이물질이 검출됐다. 폭발하지 않은 채 발견된 1발은 북한군 수지(樹脂)반보병지뢰로 추정된다. 합참 현장조사 태스크포스(T/F)장인 권대원 합참차장(육군 중장)은 28일 저녁 국방부 청사에서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권 차장은 "최종조사 결과 북한군이 매설한 지뢰로 판정되면, 군사분계선(MDL) 이남에서 정상적으로 작전하던 우리 장병이 북한군 지뢰에 부상을 당한 것"이라며 "모든 책임은 북한에 있고, 합당하고 상응한 조치를 시행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최종 결과는 유엔군사령부와 평가를 거쳐 발표할 예정이다. 권대원 합참차장(육군 중장)이 28일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에서 '25사단 지역 DMZ 내 지뢰 폭발 사고'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권 차장은 "국과수 1차 감정에서 TNT 성분과 갈색 계열 이물질이 검출됐고 철제 파편은 없었다"며 "이번 지뢰 폭발 원인은 북한군 지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밝혔다. [사진=국방부 브리핑 화면 캡처]2026.09.29 gomsi@newspim.com ◆폭발 지점 MDL 남쪽 10여m…"철제 파편 없어 아군 지뢰 아냐" = 합참에 따르면, 폭발은 21일 오전 10시 51분쯤 MDL 남쪽 10여m 지점에서 일어났다. 이곳은 북한군이 최근 지뢰를 매설한 것으로 추정되는 지형 변화 지역에서 10여m 떨어진 곳이다. 폭발은 2발이었고, 철수 과정에서 1발을 더 발견했다는 진술을 근거로 원점 일대에 모두 3발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국과수 1차 감정 결과는 이날 오후 4시 4분 합참에 통보됐다. 작전 병력의 피복·장구류와 화약흔 채취 거즈 등 10종을 감정한 결과, 방탄헬멧 1개와 방탄조끼 2개 등 3개 품목에서 TNT 성분과 갈색 계열 이물질이 나왔다. 양진혁 합참 작전부장(육군 소장)은 "주 장약이 TNT인 아군 지뢰는 폭발 시 철제 파편이 다량 발생하고 살상 반경이 20m 이상"이라며 "이번에는 철제 파편이 없고 갈색 이물질만 있으며 살상 반경도 상대적으로 작아 아군 지뢰는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합참은 북한군 지뢰로 판단한 근거로 네 가지를 제시했다. 우선 해당 지역에는 아군 지뢰 매설 기록이 없는 반면, 인근에서는 2025년 9월 북한군의 지뢰 매설 흔적이 발견됐다. 국과수 1차 감정에서 갈색 이물질이 검출됐고 철제 파편은 나오지 않았다. 1차 폭발 지점에서 1m가량 떨어진 곳에서 갈색의 북한군 수지반보병지뢰를 봤다는 진술도 있었다. 폭발 지점의 화구와 화염 형태, 장병들의 부상 정도, 작전 인원들의 진술 역시 북한군 지뢰를 가리킨다는 것이 합참의 판단이다. 폭발 당시 영상은 확보되지 않았다. 다만 800여m 떨어진 GP의 집음기에 약 58초 간격으로 비슷한 폭발음 두 번이 녹음됐고, 작전 요원들도 "1분 정도 간격이었다"고 같은 진술을 했다. 양진혁 합참 작전부장(육군 소장)이 28일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에서 '25사단 지역 DMZ 내 지뢰 폭발 사고'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수색로 개척 종료 시점과 1·2차 폭발 당시의 대형(隊形)을 요도로 설명하고 있다. 양 작전부장은 "철수를 준비하던 공병 요원이 왼발을 내딛는 순간 1차 폭발이 일어났고, 쓰러진 요원을 구하던 중 2차 폭발로 수색대대장이 중상을 입었다"고 밝혔다. [사진=국방부 브리핑 화면 캡처] 2026.09.29 gomsi@newspim.com ◆미폭발 1발은 '북한 수지반보병지뢰' 추정…탐지기엔 안 잡혀 = 미폭발 지뢰는 1차 폭발 지점에서 약 1m, 탐지를 마친 수색로 끝에서 5~10㎝ 깊이에 매설돼 있었다. 2차례 폭발 뒤 공병 요원이 무릎을 꿇고 손곡괭이로 땅을 찔러 가며 탈출로를 내던 중 발견했다. 발견한 요원은 "갈색의 네모난 형태에 표면은 매끄러운 플라스틱이고 무늬가 있었다"고 진술했고, 북한군 교리에 나오는 지뢰 사진을 보고는 "대단히 유사하다"고 했다. 주변에서 함께 본 3명의 진술은 '적색', '갈색', '목함지뢰' 등으로 엇갈렸다. 합참 공보실은 이 지뢰를 목함지뢰가 아닌 수지반보병지뢰로 정정했다. 합참 관계자는 "목함지뢰와 형태는 같고 재질만 플라스틱"이라며 "북한이 1969년부터 운용해 온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국과수가 검출한 갈색 이물질이 나무인지 플라스틱인지는 아직 구분되지 않았다. 지뢰를 수거할지는 29일 현장에서 유엔사와 협의해 판단한다. 지뢰 3발이 1~2m 간격으로 있었는데도 탐지기가 잡아내지 못한 데 대해 합참 관계자는 "탐지기를 바닥에 최대한 붙여 나갔지만, 수년간 쌓인 잡목 등으로 지뢰가 탐지 성능 깊이 아래에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3발 모두 매설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미폭발 1발은 매설로 추정되지만, 터진 2발은 매설인지 유실인지 아직 특정할 수 없다"고 했다. 28일 현장조사에는 유엔사 군사정전위원회 비서장과 25사단 작전부사단장 등 40여 명이 참여해 2차 폭발 지점 2m 앞까지 접근했다. 1차 폭발 지점은 여기서 2m 더 떨어져 있다. 조사단은 작전 병력의 군장과 방탄헬멧, 지뢰화를 확보하고 웅덩이 형태의 화구 2곳을 육안으로 확인했다. 목격 진술이 나온 지뢰 추정 물체와 잔해물까지는 가지 못했다. 합동조사팀 조사도 시간 관계상 진행하지 못해 29일 다시 들어간다. 지난 28일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비서장과 25사단 작전부사단장 등 40여 명으로 구성된 조사단이 '25사단 지역 DMZ 내 지뢰 폭발 사고' 원점 일대에 접근해 촬영한 현장 모습이다. 흰색 원 두 개는 지뢰 폭발로 생긴 웅덩이 형태의 화구로, 아래쪽이 2차 폭발, 위쪽이 1차 폭발 지점으로 추정된다. 조사단은 2차 폭발 지점 2m 앞까지 접근했고, 1차 폭발 지점은 거기서 2m 더 떨어져 있다. [사진=합동참모본부] 2026.09.29 gomsi@newspim.com ◆1차 폭발 뒤 전우 구하다 2차 폭발…GP 집음기에 58초 간격 폭발음 = 이날 합참은 사고 경위도 처음으로 자세히 공개했다. 이번 작전은 북한군의 지뢰 매설 추정 지역을 유엔사와 함께 조사하기 위해 새 수색로를 여는 작전이었다. 수색대대장 등 18명은 GOP 철책에서 소형 전술차량과 산악 바이크로 추진철책 소통문까지 이동한 뒤, 기존 수색로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이어 MDL 방향으로 수십 년간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 수풀 지대를 공병 요원이 앞장서 탐지와 예초를 번갈아 하며 약 200m 전진했다. 18명 가운데 9명은 탐지조·지휘조·작전지원조로 앞에 섰고, 나머지 9명은 20~100여m 뒤에서 통신, 후방 경계, 의무 지원을 맡았다. MDL에 근접했다고 판단한 대대장이 철수를 결심했고, 철수를 준비하던 공병 요원이 왼발을 내딛는 순간 1차 폭발이 일어났다. 주변 3명이 동시에 쓰러졌고, 수색 요원이 화구에 빠진 요원을 끌어내던 중 2차 폭발이 이어졌다. "괜찮아?"라고 외치며 달려가던 대대장이 쓰러졌다. 대대장은 왼쪽 발목에 심한 부상을, 오른쪽 허벅지 등에 파편상을 입었다. 서 있던 정보참모는 얼굴 등에 파편상을 입었고, 1m 옆에 웅크리고 있던 수색 요원은 다치지 않았다. 지난 21일 육군 25사단 지역 DMZ 지뢰 폭발 사고 직후, 메디온 의무후송헬기에서 하강한 응급구조사가 중상을 입은 수색대대장을 호이스트에 결속하고 있다. 장병들은 폭발 직후 지혈 조치를 한 뒤 수색대대장을 2인 1조로 안고 옮기다가 들것으로 교대해 가며 약 200m 떨어진 호이스트 지점까지 후송했다. [사진=합동참모본부] 2026.09.29 gomsi@newspim.com GOP 대대는 오전 10시 59분 의무사령부 의료종합상황센터에 지원을 요청했다. 메디온 의무후송헬기 3대가 차례로 출동했다. 합참의 요청에 유엔사는 11시 38분 DMZ 진입을 승인했고, 헬기는 11시 40분쯤 진입했다. 장병들은 대대장을 2인 1조로 안고 옮기다가 들것으로 교대해 가며 약 200m 떨어진 호이스트 지점까지 후송했다. 대대장과 공병 중사는 호이스트로 각각 헬기에 올라 국군수도병원으로 옮겨졌고, 나머지 인원도 모두 헬기 2대로 후송돼 정밀검진을 받았다. 18명 중 15명은 퇴원했고 중상자 2명과 경상자 1명은 입원 중이다. 대대장의 지뢰 덧신 착용 여부에 대해 합참 관계자는 "일부는 착용하고 있었다고 진술했다"면서도 "조사 중인 사안이라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대대장은 중환자실에 있어 아직 면담하지 못했다. 지난 21일 육군 25사단 지역 DMZ 지뢰 폭발 사고로 중상을 입은 수색대대장이 호이스트에 결속된 채 메디온 의무후송헬기로 끌어올려지고 있다(흰색 원). 수색대대장은 첫 번째 헬기에, 부상한 공병 중사는 두 번째 헬기에 태워져 국군수도병원으로 옮겨졌다. 현장에 하강한 응급구조사는 "수색 요원들의 신속한 응급처치가 출혈을 최소화해 더 큰 피해를 막았다"고 진술했다. [사진=합동참모본부] 2026.09.29 gomsi@newspim.com ◆"고의 지연 없었다"…매설 시점·고의성 판단은 유보 = 현장조사 지연 논란에 대해 합참 관계자는 "축소·은폐, 북한 눈치 보기, 상부 지시 같은 의혹은 일절 사실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현장 안내를 맡을 작전 병력이 모두 입원해 있었고, 1군단장이 직무배제된 상황이었다는 설명이다. 22일 합참의장 주관 상황평가에서 군단장 직무대리가 29일 투입을 건의했고, 의장은 이를 승인하면서 앞당길 방안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25일 의장이 25사단을 방문했을 때 직무대리가 "제한 사항이 해소돼 더 일찍 들어갈 수 있다"고 건의해 일정이 27일로 당겨졌다고 합참은 밝혔다. 안내를 맡은 수색중대장, 공병중대장, 공병 중사 3명은 23일 퇴원했다. MDL에서 10여m까지 접근한 경위도 논란이다. 합참 관계자는 "최초 계획 경로의 개척이 어려워 대대장이 더 양호한 지역으로 판단한 곳으로 갔다는 중대장 진술이 있지만, 대대장에게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고 했다. 사고 초기 '수십m 떨어진 곳'이라고 알린 데 대해서는 "통신 난청 지역이라 위치를 찍은 지점과 차이가 있었고 GPS 오차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다족보행로봇 등 무인장비는 시험해 봤지만 덩굴과 급경사 때문에 기동이 어려워 투입하지 않았다. 북한군의 지형 변화는 지난해 9월 위성영상으로 처음 식별됐다. 작업 시기는 지난해 8~11월로 추정되지만, 북한군 병력의 활동이 직접 포착되지는 않았다. 매설 시점에 대해 합참 관계자는 "당시 표시한 흔적보다 바깥에 있어 과거에 매설한 지뢰일 가능성도 있다"며 "양면성이 있다"고 했다. 고의성 판단도 유보했다. 합참 관계자는 "2015년 목함지뢰 도발은 우리 장병이 매일 드나드는 통문 앞뒤에 심은 것이어서 의도가 명확했다"며 "이번 지역은 50여 년간 사실상 가지 않은 곳이라 아군 병력을 노렸다고 보기에는 제한이 있다"고 말했다. 2015년 8월 10일 북한군 목함지뢰 도발 현장인 경기 파주 서부전선 GP 추진철책 통문에서 국방부 출입기자들이 취재하고 있다. 당시 한·유엔사 합동조사단은 현장에서 철제 용수철·공이 등 잔해물 43점을 수거해 북한군 목함지뢰 3발이 의도적으로 매설된 것으로 결론 냈다. 폭발 지점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는 경사지라 떠내려온 지뢰일 가능성도 배제됐다. [사진= 국방일보] 2026.09.29 gomsi@newspim.com MDL에 대해서도 "1292개 표지판이 촘촘히 있는 것이 아니어서 남북 간, 유엔사와도 인식 차이가 있다"며 "북한이 자기 땅으로 여겨 매설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군은 유엔사와 MDL 기준선을 일치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군은 사고 이후 DMZ 2단계 수색로 개척 작전을 잠정 중단하고 원점에서 재평가하고 있다. 대응 수위에 대해 양 작전부장은 "최종조사 결과가 나오는 대로 합참은 군사적으로, 국방부는 정책적으로 모든 옵션을 올려놓고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gomsi@newspim.com 2026-09-29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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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공개] 靑 신규 참모 6명 재산공개 [서울=뉴스핌] 김미경 기자 = 올해 6월 21일 임명된 청와대 신규 참모 가운데 박지영 사법제도비서관이 92억여 원을 신고해 재산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본인·배우자 명의로 주택 2채 이상을 보유한 다주택자는 김경자 사회수석비서관 1명이었다.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가 29일 관보에 게재한 9월 수시 재산등록사항을 살펴보면 대통령비서실과 국가안보실 신규 재산공개 대상자 6명 중 박 비서관이 92억1772만 원으로 재산이 가장 많았다. 이어 성기홍 홍보소통수석비서관이 86억6347만 원, 한찬식 민정수석비서관이 58억6067만 원으로 뒤를 이었다. 강건작 국가안보실 제1차장은 10억4150만 원, 김태근 자치발전비서관은 5억5398만 원, 김경자 수석은 5억748만 원을 신고했다. 청와대 전경 [사진=뉴스핌 DB] ◆ 김경자 수석, 성남 태평동에 아파트·다가구주택 보유 본인과 배우자가 소유권을 가진 주택을 기준으로 다주택 여부를 판단하면 신규 참모 중 다주택자는 김 수석뿐이다. 김 수석은 경기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 선경태평아파트(35.51㎡·1억6700만 원)와 같은 지역의 다가구주택(59.91㎡·2억2200만 원)을 본인 명의로 신고했다. 두 주택에는 임대보증금 채무가 각각 1000만 원, 1466만 원 잡혀 있다. 김 수석은 예금 8474만원을 신고했다. 임대보증금과 은행 대출을 합친 채무는 1억7502만원이었다. ◆ 박지영 비서관, 반포자이 부부 공동명의…임대보증금 29억5000만원 박 비서관은 서울 서초구 반포동 반포자이 아파트(165.45㎡)를 본인(132.39㎡)과 배우자(33.06㎡) 지분으로 나눠 신고했다. 신고가액은 본인 지분 36억6400만 원, 배우자 지분 9억1600만 원으로 모두 45억8000만 원이다. 이 아파트에 걸린 임대보증금 29억5000만 원은 채무로 올렸다. 박 비서관은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 센트럴파크 아파트 전세권(114.50㎡·21억3000만 원)도 신고했다. 배우자는 전북 군산·김제·완주 일대 밭과 임야 지분 1억2779만 원어치를 보유했다. 금융자산 규모도 컸다. 박 비서관 일가의 예금은 28억5785만 원, 증권은 24억440만 원이었다. 박 비서관 본인은 한국전력 3853주, 한화오션 1371주, 삼성전자 422주 등 상장주식 8억9937만 원어치를 신고했다. 배우자는 LS 일렉트릭 1321주, 이수페타시스 1750주, 한국전력 5030주 등 13억1834만 원어치를 보유했다. ◆ 성기홍 수석, 대치우성 부부 공동 39억 성 수석은 서울 강남구 대치동 대치우성 아파트(125.17㎡)를 배우자와 절반씩 나눠 보유했다. 지분별 신고가액은 각 19억5000만 원으로, 모두 39억 원이다. 본인·배우자 기준으로는 1주택자다. 성 수석 일가의 예금은 14억1605만 원, 증권은 13억6567만 원으로 집계됐다. 성 수석 본인은 삼성전자 2194주와 SK하이닉스 6주, 달바글로벌 192주 등 상장주식 8억3159만 원어치를 신고했다. 연합인포맥스 비상장주식 248주(4162만 원)도 갖고 있다. 배우자는 미국 국채 등 채권과 마이크로소프트·엔비디아·브로드컴 등 해외 주식을 보유했다. 성 수석은 비트코인 0.74개(7187만 원)도 신고했다.  ◆ 한찬식 수석, 서초 아파트분양권·강남 아파트 전세권 보유…채무 10억 한찬식 수석은 소유권을 가진 주택 없이 서울 서초구 신반포로 '디에이치 클래스트' 아파트 분양권(130.96㎡·25억5665만 원)을 신고했다. 서울 강남구 개포동 현대2차아파트 전세권(165.08㎡·12억 원)도 함께 올렸다. 한 수석의 배우자는 경기 부천시 소사구 괴안동 근린생활시설 지분(14억6559만 원)과 경남 산청군 임야(1억4410만 원)를 보유했다. 장남·장녀·차녀는 경기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임야 지분을 각각 1307만 원어치씩 신고했다. 한 수석은 농협은행 9억 원을 포함해 금융채무 9억5178만 원을 신고했다. 가족 전체 채무는 10억350만 원이었다. 한 수석 본인은 반얀트리클럽 앤 스파 서울 회원권(1억5000만 원)을, 배우자는 서울클럽 회원권(5000만 원)을 보유했다. ◆ 강건작 1차장·김태근 비서관, 1주택 강 1차장은 서울 은평구 불광동 메트로타워 아파트(104.49㎡)를 배우자와 공동명의로 보유했다. 지분 가액을 합치면 8억9000만 원이다. 강 1차장은 예금 2억340만 원, 채무 7155만 원을 신고했다. 김 비서관은 울산 중구 태화동 일신아파트(59.84㎡·1억1300만 원) 1채를 본인 명의로 신고했다. 김 비서관 일가는 예금 2억2180만 원, 증권 2억1887만 원을 보유했다. 배우자는 로킷헬스케어 1260주와 삼성전자 200주, 삼양식품 26주 등을 신고했다. 박 비서관은 모친, 김 비서관과 강 1차장은 장남에 대해 독립생계유지 등을 이유로 재산 고지를 거부했다. the13ook@newspim.com 2026-09-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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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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