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이영란 편집위원 = 맑고 투명한 색면추상화로 한국 단색화의 전통을 잇고 있는 화가 김택상(1958~)이 지난 21일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창성동)의 리안갤러리 서울에서 개인전을 개막했다. 김택상은 'Between color and light(색과 빛 사이에서)'라는 제목으로 내년 1월10일까지 작품전을 연다. 이번 전시에 작가는 캔버스 위에 아름다운 물빛, 꽃빛, 하늘빛이 고요히 스며든 회화 17점을 출품했다.
리안갤러리를 찾은 관람객들은 전시장 초입에 걸린 가로 2.1m 크기의 분홍빛 대작 '여린 진달래 숨빛'을 접하면서부터 "아름답다"라는 찬사를 터뜨린다. 이제 막 꽃봉오리를 틔운 어린 진달래의 자태를 차분히 변주되는 색의 그라데이션을 통해 홀리듯 표현한 그림에선 생명의 숨결이 느껴진다. 그리곤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면 한가지 또는 두가지의 색을 여러 겹의 레이어로 스며들게 한 미니멀한 추상화 연작을 만날 수 있다. 자연의 빛과 색을 촉촉한 물기를 머금으며 오롯이 드러낸 작품들은 '김택상다운 맑은 회화'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준다.
[서울=뉴스핌] 이영란 기자 = 김택상 'Breathing light_Young Azalea(어린 진달래 숨빛)' 2014~2019 [사진=리안갤러리] 2019.11.22 art29@newspim.com |
'포스트(후세대) 단색화' 작가 중에서도 김택상은 국내외에서 호응이 뜨거운 편이다. 특히 일본에는 그의 회화를 꾸준히 수집하는 팬층이 두텁게 형성돼 있다. 그런데도 서울에서의 개인전은 무려 16년 만이다. 꽤 격조했던 셈인데 김택상의 색면회화를 기다려온 서울의 미술애호가들에겐 꽤나 긴 시간이었다. 김택상은 그 사이 일본 도쿄와 부산, 대구에서 개인전을 13회나 가졌다. 도쿄의 다구치 파인아트에서는 2년마다 초대전을 열 정도로 러브콜이 이어졌다.
21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도쿄에서 개인전을 다섯 번이나 하는 동안 서울에선 기회가 안 닿았다. 16년 만에 갖는 서울 전시라니 안 믿긴다. 그런데 나는 기다리는데 선수다. 꽃잎 하나도, 풀잎 하나도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것 없더라. 세상 모든 게 하루 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는 걸 자연이 내게 가르쳐줬다. 모든 건 무르익어야 제대로 이뤄지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 때문일까? 김택상이 이번에 출품한 작품들은 보통 3, 4년씩 긴 호흡으로 제작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6, 7년 아니, 10년 넘게 기다리며 숙성시킨 작품도 있다. "기다리는 건 자신있다"는 작가의 말을 실감케 한다.
김택상이 지금과 같은 그윽한 색면추상을 시도하게 된 것은 30년 전 한 TV 다큐멘터리 때문이다. "1990년대초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을 보던 중 미국 옐로스톤국립공원의 화산 분화구에 담긴 물빛을 보고 숨이 멎어버렸다. 그 오묘한 물빛이 내 가슴 속으로 '쿵'하고 들어와 버리더라. 마치 연애가 시작됐다고 할까? 그 물빛을 표현하고 싶어 1년 넘게 붓질이란 붓질은 죄다 해봤고, 온갖 방법을 썼는데 안됐다. 색을 칠하면 칠할수록 자연의 맑은 물빛과 오히려 멀어졌다. 그런데 어느 날, 분화구의 영롱한 물빛이 '조건'때문에 그렇게 비쳐졌을 거란 생각이 뇌리를 스쳤고, 조건을 만들었더니 비로소 느낌이 터져나왔다"고 밝혔다.
[서울=뉴스핌] 이영란 기자 = 신작 앞에 선 작가 김택상 [사진=리안갤러리] 2019.11.22 art29@newspim.com |
이후 김택상은 물의 깊이와 양, 찰랑이는 바람에 따라 물빛이 달라짐을 간파하고, 붓질로 화폭에 색을 입히는 대신, 물로 색을 스며들게 했다. 아크릴물감을 혼합한 뒤 물을 섞고, 그 색물을 오목한 판 위에 배치한 캔버스 위에 붓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그런데 색물을 엷고도 엷게 수십, 수백 번을 천 위에 스며들게 해야 비로소 원하는 레이어가 나온다. 때문에 김택상의 작업은 거의 수행에 가깝다. 매우 고되고, 지리한 과정이다. 일년 내내 물과 색과 씨름하며, 일조량과 습기, 햇빛과 중력의 상호작용을 살피고 기다려야 마침내 만족스런 작품이 빚어진다.
작가는 "이 같은 방식을 택한 뒤론 자연을 더욱 깊이 관찰하게 됐다. 말 없는 자연이야말로 최고의 스승이다. 또 미학과 언어학도 공부하게 됐다. 그러면서 가장 나다운 것, 나의 언어, 나의 정체성을 온전히 투영해야 감동이 있는 진실한 그림이 나온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또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니 '스미는 감수성'이 내 본연의 모습이더라. 앞으로도 손이 아닌 가슴으로 그린 그림, 천천히 스며드는 그림, 자연을 닮은 '치유의 그림'에 계속 몰두하겠다"고 밝혔다.
자연의 모든 것이 단 하나도 같은 것이 없듯이 김택상의 회화도 비슷한 것 같아도 저마다 모두 다르다. 물감이 스며든 층이 균일하지 않고, 제각각 다른 레이어를 보인다. 그 스며듬과 작가의 호흡이 조금씩, 섬세하게 달라 똑같은 작품은 하나도 없다. 오래 두고 음미하고 곱씹어볼수록 김택상이 드러내고자 하는 자연의 찬란하고 섬세한 빛과 결이 감지된다.
근래들어 작가는 화폭을 액자에 가두지 않고, 가장자리를 그대로 드러내기도 한다. 여러 시간, 여러 계절을 거쳐 겹겹이 쌓고 쌓은 반복된 색상의 층위는 회화의 가장자리에 나이테 같은 자국을 남긴다. 이러한 자국은 작가가 명상하듯 몰입한 작업과정을 보여주는 동시에, 실제의 공간에서 실시간으로 반응하는 시간성을 함께 느끼게 한다. 김택상은 또 2점의 서로 다른 회화를 겹치듯 포갠 작품, 서로 상반된 두가지 색이 오묘하게 교차하는 작업 등 새로운 시도도 하고 있다. 이는 격식과 닫힘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로와지길 원하는 심성 때문일 것이다.
김택상을 전속작가로 영입한 리안갤러리의 안혜령 대표는 "아트바젤 홍콩에 김택상의 작품을 출품했는데 외국 화랑들의 반응이 매우 뜨거웠다. 딜러들 자신이 '매혹적'이라며 서로 갖고 싶어했다. 오늘 아침에는 호주의 명문화랑인 폭스 젠슨 갤러리(Fox Jensen Gallery)로부터 김택상의 시드니 개인전을 개최하고 싶다는 제안이 왔다"며 "세계적인 거장 마크 로스코(1903~1975)의 그림은 못 사도, 김택상의 색면추상은 사겠다는 해외 컬렉터들이 꽤 많다. 독창적인 기법으로 화폭에 '숨쉬는 빛'을 청아하게 구현한 김택상의 회화는 글로벌 아트마켓에서 충분히 경쟁력이 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서울=뉴스핌] 이영란 기자 = 김택상 'Breathing light-Violet in black'. 2009~2019 [사진=리안갤러리] 2019.11.22 art29@newspim.com |
언어학자이자 평론가인 홍가이 박사는 "김택상의 작업은 담화(淡畵)이다. 이는 비가 내린 후 흙탕물이 된 혼탁한 물이 시간이 흘러 부유물이 가라앉고 맑아진 상태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수많은 정념들로 오염된 우리의 영혼이 치유되듯 평정심을 회복한 맑은 상태로 되돌아오는 것이다"라고 했다.
에머랄드빛 호수 위로 반사하는 빛의 물결처럼 보이기도 하고,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빛의 산란처럼 보이기도 하는 김택상의 작품은 마크 로스코, 바넷 뉴먼의 모더니즘 회화를 떠올리게 한다. 형식적 측면에서 유사점도 있다. 그러나 여러 차원이 동시에 존재하고, 물질과 정신을 통합하며 초월한다는 점에서 서구의 미의식과는 차별화되는 요소가 분명히 존재한다.
중앙대학교 회화과와 홍익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김택상은 현재 청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며,국립현대미술관,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일본 요코가와일렉트릭, 홍콩 포시즌스호텔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art29@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