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최신뉴스 GAM 라씨로
KYD 디데이
문화·연예 문화·연예일반

속보

더보기

[이철환의 예술가 이야기] 화폭에 담은 관능과 에로티시즘, 구스타프 클림트

기사입력 : 2017년12월07일 12:00

최종수정 : 2017년12월07일 12:00

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33)

구스타프 클림트는 수수께끼 같은 화가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그림에 대해 한 번도 설명한 적이 없고, 인터뷰도 하지 않았으며 사생활은 철저히 숨겼다. 자화상도 그리지 않았다. 다만, 그가 남긴 짧은 글이 하나 있다. “나에 관해 알고자 하는 사람은- 물론 화가로서의 나를 말한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뿐이므로- 내 작품을 보고 찾아내면 될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며,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러한 언행으로 인해 그와 그의 작품이 더욱 신비롭고 매력적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를 일이다. 클림트는 죽은 지 50년 후부터 재평가되기 시작하더니 언제부턴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를 황금빛 섬광으로 물들인 시대를 뛰어넘는 영원한 에로티시즘의 화신이다. 실로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인간의 육체가 발하는 미묘한 숭고함을 느낄 수 있다. 클림트는 벌거벗은 여성상에 벌거벗은 진실을 담았다. 은폐돼온 성을 발가벗김으로써 20세기는 인간을 재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평생토록 찬반논의가 무성했던 미술가 클림트는 대중과 주류 미술계 그리고 평론가들로부터 사랑과 미움을 동시에 받았다. 그는 종종 신랄한 비평의 표적이 되기도 했으며, 때로는 젊은이들의 예민한 감수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작품 앞에 스크린을 친 채 전시되기도 했다. 1900년에는 포르노 미술과 지나친 성도착이라는 죄명으로 외설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성욕을 삶의 결정적인 요소로 중요시했던 클림트의 견해와 화풍은 당시로서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이는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가 지속적으로 천착했던 근대 에로티시즘(eroticism)의 서막을 열어주었다.
클림트는 생전에 이미 유명 작가였지만, 한편으로는 영욕이 교차하는 경험을 거듭했다. 그가 빈번하게 그린 나체와 섹스 장면이 줄곧 문제되었던 것이다. 클림트 사후 약 50년 동안 클림트나 그의 동료이자 제자인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 클림트는 새로이 탄생하게 된다.
클림트 자신과 그의 작품들이 재조명되더니 클림트는 이제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화가가 되었다. 한때는 외설로 여겨졌던 것이 지금은 아름다운 예술로 승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2006년 6월 18일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 기록이 경신되었다. 2004년 파블로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이 소더비 경매에서 세운 1억 416만 달러를 훌쩍 뛰어넘은 작품은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이었다. 매매가는 무려 1억 3,500만 달러였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는 1862년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났다. 보헤미아에서 이민 온 그의 아버지는 금세공사이며 판화가였지만, 그리 성공하지는 못해 클림트의 어린 시절은 가난하고 우울했다. 14세 때인 1876년 빈 응용미술학교에서 회화와 수공예적인 장식 교육을 받았다. 1883년 졸업 후에는 그의 동생 에른스트와 동료 학생인 프란츠 마치와 함께 공방을 차려 공공건물에 벽화를 그리는 일을 했다. 그러던 중 1880년대 말경 빈에 새로 들어선 국립극장과 미술사 박물관에 장식화를 그려 건축 장식미술의 대가로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1892년 아버지와 동생 에른스트의 죽음으로 정신적인 동요를 겪게 되면서, 인상파와 상징주의 등 다양한 아방가르드(avant garde)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클림트는 순수와 응용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총체적인 예술을 지향했다.

클림트는 19세기말 빈에서 청년화가를 이끄는 개혁의 주역이자 유명 인사로 떠오른다. 동시대에 에드바르트 뭉크는 《절규》를 그렸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작곡했으며,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을 출판하고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제3번》이 초연됐다.
1897년 그는 낡고 판에 박힌 사상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고 미술과 삶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에 접근하고자 하는 ‘빈 분리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다.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 칼 몰, 오토 바그너 등 당대 오스트리아를 선도한 화가, 디자이너, 건축가들이 빈 분리파에 참여했다.
빈 분리파는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표어를 내세워 매너리즘에 빠진 미술가협회에 맞섰다. 그들은 이제 검열에 통과하려고 애쓰지 않았고 오직 진실만을 생각하고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솔직하고 대담하게 그렸다. 19세기 말 클림트를 비롯한 혁신적인 예술가들은 빈 미술가협회의 회원이었으나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중견과 원로들의 작품을 참을 수 없었다. 이들은 빈 미술가협회로부터 독립을 추진했다. 이들은 ‘부자를 위한 예술과 가난한 자를 위한 예술’을 일치시키고자 했고, 감각적인 예술을 추구했다. 아울러 모든 예술 영역의 요소들을 이용하여 종합 예술작품을 만들고자 했으며 나아가 자신들의 작품으로 사회를 변혁하려 했다. 바야흐로 유럽 미술계에 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편, 빈 분리파를 이끌어 가던 클림트는 더 이상 본래의 취지에 충실하지 못한다고 여기고 1905년 빈 분리파를 탈퇴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이른바 ‘황금시대’를 여는 시발점이 되었다. 클림트는 이탈리아 라벤나의 모자이크와 장식적인 패턴, 금을 사용하여 눈에 띄는 독창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 시기의 그의 작품들은 실생활에 거리를 두고 신비로운 것과 정신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어 매우 화려하고 역동적이며, 에로틱한 요소와 강렬한 상징주의 등을 담고 있었다.

클림트의 작품은 관능적인 여성 이미지와 찬란한 황금빛, 화려한 색채를 특징으로 한다. 그는 성(性)과 사랑, 죽음에 대한 풍성하고도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들을 연결시킨 작품들을 선보여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극적인 에로티시즘을 강조했다는 이유로 거센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00년부터 1903년까지 빈 대학교 대강당의 천장에 차례로 그린 우의적(寓意的)인 장식화 《철학》, 《의학》, 《법학》은 그 외설성으로 인해 빈 대학교 교수들과 정면충돌하는 사태를 빚었다. 이 일 이후 그는 공공작품을 의뢰받지 않았으며, 기하학적이고 지적인 추상양식으로 변모해 갔다.
클림트는 금을 활용해 많은 작품을 그렸다. 《입맞춤 (The Kiss)》도 마찬가지다. 작품의 에로틱과 화려함은 황금색에서 비롯된다. 황금색은 부와 권위, 그리고 욕망을 나타낸다. 그래서 더욱 화려하고 에로틱해 보인다. 그가 이처럼 금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금 세공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유디트(Judith)》, 《프리차 리들러의 초상 (Portrait of Fritsa Reidler)》,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입맞춤 (The Kiss)》, 《다나에 (Danaë)》, 《아담과 이브 (Adam and Eve)》 등이 있다.

《유디트(Judith)》는 클림트의 황금시대를 열어젖힌 1901년 작이다. 그림에 새겨진 여인의 모습에는 연인을 파멸과 죽음으로 이끄는 요부의 고혹적 이미지가 드러나 있다. 살짝 들어 올린 얼굴, 반쯤 감긴 유혹의 눈길, 주춤하게 벌어진 입술, 풀어헤쳐 가슴이 드러난 옷섶 등이 요부의 전형을 보여준다.
유디트는 원래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의 애국여걸이다. 그녀는 아시리아 군대가 쳐들어오자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 적장을 유혹해 술에 취하게 한 뒤 그의 목을 베어버린다. 그런 유디트를 몽롱한 표정의 요부로 그린 것이다. 클림트는 자신이 생각했던 유디트의 모델로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를 선택했다. 원래 아델레는 유부녀인데 클림트와는 화가와 그림 구입자의 관계로 처음 만나게 되었다. 이후 그녀는 클림트의 모델이 되어주기도 하면서 깊은 관계로 발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아델레의 나이는 18세였고, 클림트는 37세였다. 그녀는 유디트뿐만 아니라 후에 미술시장에서 최고가를 경신한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의 모델이기도 했다.

‘입맞춤 (The Kiss)’, 캔버스에 은박, 금박, 유채. 180 x 180cm / 빈미술사미술관 소장. <사진=이철환>

클림트의 대표작의 하나인 《입맞춤》에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숨어있다. 그에게 있어 육체적 관계가 아닌 정신적 사랑의 유일한 상대였던 에밀리 플뢰게(Emilie Flöge)에게는 키스조차 할 수가 없었다. 결국 클림트는 플뢰게 몰래 다른 여자들을 만나며 영감을 얻었고, 자신의 관능을 되살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플뢰게는 클림트가 다른 여자와 밀회하는 장면을 목격한 뒤 그의 곁을 떠났다. 그런데 이후 완성된 작품 《입맞춤》을 본 플뢰게는 다시 클림트의 사랑을 받아주었다고 한다.

클림트는 평생 수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맺었지만 누구와도 결혼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14명의 여인들이 친자확인 소송을 냈다. 많은 모델들과 관계했지만 그는 어쩌면 진정으로 안주할 여인을 찾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혹은 혼인하여 아기를 낳고 생활에 안주하는 것 자체를 부담스럽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오직 한 사람, 에밀리 플뢰게는 클림트의 진정한 사랑이었다. 플뢰게는 클림트와 늘 함께한 정신적 반려자였다. 수많은 여성들과 스스럼없이 잠자리를 같이 했지만, 그녀에게만큼은 키스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순수한 사랑을 했다. 클림트는 꽃을 살 돈이 없자 그녀를 위해 꽃잎 수만큼의 하트를 그려 넣은 다음 한 줄의 메시지를 적었다. “꽃이 없어 이것으로 대신합니다.”
사실 플뢰게는 클림트에게 결혼을 요청했었다. 그러나 클림트는 이를 거절했다. 그는 결혼이란 시민사회의 가증스런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클림트의 플뢰게를 향한 사랑의 감정은 지속되었다. 그녀에게 무려 400여 통의 사랑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플뢰게 또한 비록 결혼은 하지 못했지만 클림트의 진심을 이해하고 그와의 사랑을 계속 이어나갔다.

클림트는 1918년 2월 갑작스런 뇌출혈이 있은 후 일련의 합병증으로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뇌출혈로 쓰러질 당시 그는 다급하게 “미디를 오라고 해!”라고 소리쳤다. 미디는 에밀리 플뢰게의 애칭이었다. 플뢰게는 급히 달려와 클림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주었다.
클림트가 죽은 후 플뢰게는 많은 서신들을 태워 그와의 비밀을 없앴다고 한다. 플뢰게는 1952년 세상을 뜰 때까지 클림트의 추억을 안고 살았다. 또 클림트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는 혈육 못지않게 절친했던 동료 에곤 실레가 함께했는데, 실레는 클림트의 마지막 모습을 그림 속에 담았다. 묘하게도 빈 분리파의 주축 멤버였던 오토 바그너, 콜로만 모저, 그리고 에곤 실레도 같은 해에 죽었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문화와 경제의 행복한 만남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뉴스핌 베스트 기사]

사진
"3초안에 13가지 암 찾는다" [서울=뉴스핌] 김용석 기자 = 혈액 검사 데이터만으로 3초 안에 13가지 조기 암을 찾아내는 시대가 열렸다. 미국 식약청(FDA)은 12일(한국시간) AI를 활용한 의료 시범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료하고, 전 부문으로 확장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마틴 A. 마카리 FDA 박사가 이끄는 이번 계획은 올 6월 30일까지 모든 FDA 센터에 AI를 도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사진= 뉴스핌 DB] FDA에 따르면 AI의료 혁신은 단순히 진단만 하는 게 아니라, 유전자 수준에서 향후 5년간 암 발생 확률을 예측할수 있게 됐다. 이 시스템에는 '거짓말 필터'가 내장돼 있어, 환자가 숨긴 병력도 감지할 수 있을 정도다. 특히 혈액 검사 데이터만으로 3초 안에 13가지 조기 암을 찾아낼 수 있으며, 정확도는 대형병원 의사를 능가하는 수준으로 알려졌다. 진료 비용은 인간 의사의 1/20에 불과하며. 다만, 매년 999달러의 'AI 사용 연회비'를 내야 한다. 마카리 박사는 "AI 시범 사업 성공에 큰 감명을 받았다. 검토 과정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비생산적인 반복 작업을 줄일수 있다. AI혁신 의료 기술은 새로운 치료법 검토 시간을 가속화하는 데 큰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라고 밝혔다. FDA의 신약평가연구센터(CDER) 신약평가과학국 부국장인 진중(진) 리우는 "이는 게임 체인저 기술이다. 3일 걸리던 작업을 몇분 만에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새 AI의료 혁신은 FDA의 패스트트랙(그린 채널)을 통과해 다음 주부터 뉴욕 장로회 병원에서 시험 운영된다. fineview@newspim.com 2025-05-12 11:48
사진
와이스 호투...한화 12연승 날다 [서울=뉴스핌] 박상욱 기자 = 독수리가 마침내 12연승까지 날아올랐다. 김광현은 양현종과의 '레전드 매치'에서 웃었지만 김도영에 솔로 홈런을 허용했다. 화장한 날씨를 보인 이날 더블헤더를 포함해 8경기에 총 14만7708명의 관중이 입장해 역대 일일 최다 관중 신기록을 세웠다. 종전 일일 최다 관중은 지난해 6월 23일 역시 8경기에서 기록한 14만 2660명이었다. 단독 선두 한화는 11일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키움과의 방문 경기에서 라이언 와이스의 호투를 발판 삼아 8-0으로 승리했다. 와이스는 8이닝 동안 삼진 9개를 뽑으며 1안타 무실점으로 키움 타선을 봉쇄했다. 라이언 와이스(왼쪽)와 노시환. [사진=한화] 한화가 12연승을 거둔 것은 빙그레 시절이던 1992년 5월 이후 33년 만이다. 당시 빙그레는 14연승까지 거뒀다. 한화는 3회초 2사 1, 3루에서 키움 포수 김재현의 2루 악송구 때 3루 주자가 홈을 밟아 1-0으로 앞섰다. 5회에는 2사 2, 3루에서 키움 선발 김윤하의 폭투로 1점을 추가한 뒤 노시환이 유격수 강습 중전 적시타를 때려 3-0으로 달아났다. 6회에는 이진영의 솔로 홈런과 이도윤의 적시타로 2점을 추가해 5-0으로 점수 차를 벌렸다. 한화는 9회초에도 3점을 보태 쐐기를 박았다. 대구에서는 문성주가 혼자 4타점을 뽑은 LG가 삼성을 7-4로 꺾었다. LG는 전날 더블헤더 1, 2차전을 포함해 3연승을 달린 반면 삼성은 8연패의 늪에 빠졌다. 1-3으로 끌려가던 삼성은 6회말 선두타자 구자욱이 좌중간 2루타로 포문을 열자 김영웅이 좌월 투런 홈런을 쏘아 올려 3-3 동점을 만들었다. 이어 르윈 디아즈는 우측 외야 스탠드 상단에 꽂히는 백투백 홈런을 터뜨려 4-3으로 역전시켰다. 문성주. [사진=LG] 하지만 LG는 7회초 2사 만루에서 문성주가 좌측 펜스 상단을 때리는 3타점 2루타를 터뜨려 단숨에 6-4로 다시 뒤집었다. 8회초에는 2사 만루에서 홍창기가 밀어내기 볼넷으로 1점을 보태 승부를 결정지었다. 더블헤더가 펼쳐진 인천에서는 SSG가 1차전에서 KIA를 8-4로 꺾었다. SSG는 4-1로 앞선 4회말에는 조형우의 적시타와 최지훈의 3루타 등으로 3점을 추가해 7-1로 달아났다. KIA는 5회초 최형우가 투런홈런을 날렸으나 더는 추격하지 못했다. KIA 선발 제임스 네일은 4이닝 동안 개인 최다인 7실점하고 무너졌다. 김광현과 양현종이 선발 대결을 펼친 2차전에서도 SSG가 5-1로 승리했다. KIA는 4회초 김도영이 좌중월 솔로홈런을 날려 선취점을 뽑았다. SSG는 6회말 채현우의 3루타 등 4안타와 볼넷 4개를 묶어 대거 5점을 뽑아 전세를 뒤집었다. 7이닝 1안타 1실점으로 호투한 김광현은 승리투수가 됐고 5.1이닝 3안타와 볼넷 2개로 3실점 한 양현종은 패전투수가 됐다. 김광현. [사진=SSG] 잠실에서는 NC가 두산을 맞아 더블헤더 1차전을 11-5로 이긴 뒤 2차전마저 5-2로 승리했다. NC는 7연승을 달리며 4위로 뛰어올랐다. 두산은 1차전 1회말 상대 실책 속에 양석환의 2루타와 볼넷 3개를 묶어 먼저 4점을 뽑았다. 그러나 NC는 2회초 두산 선발 콜 어빈의 제구가 흔들리는 사이 3안타와 4사사구로 6점을 뽑아 전세를 뒤집었다. 3회에는 안중열의 2루타로 2점을 추가한 NC는 4회에도 1점을 보태 9-4로 달아나며 일찌감치 승기를 잡았다. 천재환. [사진=NC] 2차전에서 NC는 2회초 천재환이 선제 솔로홈런을 날렸으나 두산은 2회말 1사 만루에서 김기연이 2타점 우전안타를 날려 전세를 뒤집었다. 그러나 NC는 3회초 4안타와 볼넷 2개로 4점을 뽑아 5-2로 재역전했다. 수원구장 더블헤더 1차전은 롯데가 6-1로 승리했으나 2차전은 kt와 1-1로 비겼다. 롯데는 1차전 1회초 전준우의 투런홈런 등으로 먼저 3점을 뽑았다. kt가 1회말 실책을 틈타 1점을 만회했으나 롯데는 3회초 전준우가 희생플라이로 다시 1점을 보탰다. 박세웅. [사진=롯데] 승기를 잡은 롯데는 6회와 9회에도 1점씩 보태며 승부를 갈랐다. 롯데 선발 박세웅은 6.1이닝을 4안타 1실점(비자책)으로 막고 시즌 8승(1패)째를 거둬 다승 단독 선두로 나섰다. 2차전에서 kt는 1회 안현민의 적시타로 선취점을 뽑았으나 롯데는 4회초 안타 없이 사사구 4개로 동점을 만들었다. 이후 양 팀이 점수를 뽑지 못하면서 무승부가 됐다. psoq1337@newspim.com 2025-05-11 22:32
안다쇼핑
Top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