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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환의 예술가 이야기]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마리아 칼라스

기사입력 : 2017년11월21일 12:00

최종수정 : 2017년11월21일 12:00

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24)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당시, 개막식 때 아테네 주경기장에 울려 퍼지는 소프라노 가수 마리아 칼라스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장내는 잠시 숙연해지기도 하였다.
“My Life is My Work. My Work is My Life.” 라 말했던 마리아 칼라스! 그녀는 어릴 적 어머니에게 “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오페라 가수가 될 거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내 얘기를 하게 할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마리아 칼라스를 두고 흔히들 '오페라의 프리마돈나, '오페라의 여신', '오페라의 처음과 끝'이라고들 부른다.
오페라에서 소프라노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어서 ‘무대의 꽃’, ‘디바(Diva, 여신)’라고들 한다. 음악계에서는 소프라노의 역사를 마리아 칼라스의 전과 후(B.C, Before Callas)로 나누어 비교하고 있는데, 이는 결코 과장된 게 아니다. 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그녀에 견줄 만한 소프라노가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 칼라스는 힘찬 소프라노부터 어슴푸레한 메조소프라노까지를 소화하는 풍부하고 다양한 음색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대부분 소프라노들이 고음으로 갈수록 소리가 작아지는 반면, 마리아 칼라스의 극 고음은 중저음 못지않은 성량으로 관객들의 심금을 파고든다. 그리고 그녀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음악 속에 숨겨진 미묘한 드라마와 감정과 성격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는 놀라운 표현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근성도 강했다. 서른 살 무렵 2년 사이에 한때 95㎏에 달하던 체중을 30㎏이나 감량하면서 외모까지 완벽한 여신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칼라스가 라 스칼라와 메트로폴리탄 등 전 세계 최고의 오페라 극장에서 여신처럼 군림하게 된 후 평론가들은 그녀의 목소리를 두고 “낯선 은하계에서 길을 잃은 별 같다.”고 말했다. 천부적으로 맑고 고운 목소리를 타고난 소프라노가 아니면서도 감정을 담은 목소리와 풍요로운 연기력으로 듣는 이들의 가슴속을 파고들면서, 당대의 어떤 가수와도 비교하기 어려운 개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칼라스를 '오페라의 여신'으로 불리게 한 대표적인 배역은 벨리니의 《노르마(Norma)》와 푸치니의 《토스카(Tosca)》에서의 주연 역할이었다. 그러나 칼라스에게 최고의 영예와 명성을 안겨 준 이 배역의 여주인공들이 극 중에서 겪었던 불행한 사건은 바로 칼라스의 삶 속에서도 일어났다. 사랑하는 남자의 배신, 그리고 사랑으로 인한 죽음이었다. 특히 《토스카》의 유명한 아리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가사는 마치 칼라스의 생애를 요약한 듯하다. 노래로 세상을 얻었지만 사랑에 모든 것을 걸었다가 파멸과 죽음을 재촉했기 때문이다.

1923년 태어나 1977년 54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한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 1923~1977). 그녀는 1923년 12월 2일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나 13세까지의 소녀시절을 미국에서 보냈다. 본명은 마리아 칼로예로풀루(Maria Kalogeropoulos)였다. 어린 시절 뚱뚱한 외모와 소극적인 성격 때문에 주위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십대 소녀 칼라스는 오로지 한 곳 음악에 몰입하게 되었다.
대공황 이후 미국의 경제 상황이 나빠지자 칼라스의 어머니는 1937년 그녀를 데리고 고국인 그리스 아테네로 돌아간다. 여기서 그녀의 인생을 결정해준 스승 엘비라 데 이달고를 만난다. 그는 칼라스에게 성악의 기본 창법과 철학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무대 위에서의 매너와 기교까지도 가르쳤다.
1940년 11월 칼라스는 그리스 아테네 국립오페라극장에 데뷔해 일하다가 전쟁이 끝나면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뉴욕에서 배역을 얻어 보려던 노력은 계속 실패로 끝났다. 그러던 중 마침내 1947년 기회가 왔다. 이탈리아 베로나 페스티벌에서 폰키엘리의 오페라 《라 조콘다 (La Gioconda)》의 주인공 조콘다 역을 맡게 된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Giovanni Battista Meneghini)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만난 지 5분 만에 ‘바로 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칼라스는 회고했다. 세련됨과 교양 그리고 탁월한 예술적 감각을 지닌 오십대 초반의 사업가 메네기니는 칼라스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조언자가 되었다. 스물여섯 살의 칼라스는 28세 연상인 메네기니와 결혼하였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칼라스의 시대가 열렸다.
《라 조콘다》는 칼라스와 메네기니에겐 운명적인 의미가 있었다. 그녀가 이탈리아의 무대에 처음 출연한 것이 이 오페라였고, 두 사람의 사랑이 싹튼 것도 바로 이 오페라의 리허설 때였다. 그리고 그녀가 메네기니를 버리고 오나시스를 따라가기로 결심했을 때도 역시 《라 조콘다》를 레코딩하고 있을 때였다. 또한 칼라스가 죽음을 앞두고 쪽지에 남긴 글귀도 《라 조콘다》였다. 자살을 결심하는 극적인 장면을 보여 주는 오페라 속의 아리아 가사는 현실에서도 그녀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끔찍한 순간에/ 내게 남은 건 그대 뿐/ 그대만이 내 마음을 유혹한다/
그것은 내 운명의 마지막 부름/ 인생의 노상에서 마지막 건너야 할 길...”

1950년으로 접어들면서 그녀에게 성악가로서의 행운이 뜻밖에 찾아들었다. 칼라스는 병이 난 레나타 테발디의 대타로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 입성해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 배역은 오페라 《아이다》에서의 주연 ‘아이다’ 역이었다.
당시 테발디는 ‘라 스칼라’극장의 여왕이었다. 그런데 테발디에게 예기치 않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아이다 공연을 며칠 앞두고 갑자기 쓰러진 것이다. 극장 측은 서둘러 대역을 쓰기로 했다. 테발디의 대타로 등장한 가수가 바로 마리아 칼라스였다. 칼라스는 당시 아직도 무명이었고, 거칠고 모난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다’의 감정을 너무나 잘 표현하는 목소리에 넋이 나간 관객들은 열광했다. 작가 헤밍웨이는 ‘황금빛 목소리를 가진 태풍’이라고 칭송했고, 공연을 본 관객마다 ‘새로운 디바가 등장했다’며 환호했다.

단 한 번의 공연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은 칼라스는 곧바로 스타덤에 올랐고, 그 후 오페라 팬들은 ‘마리아 칼라스 파’와 ‘레나타 테발디 파’로 갈리기 시작했다. 라 스칼라 극장은 칼라스와 전속계약을 맺기에 이른다. 1951년 스칼라극장의 브라질 공연에서 대스타였던 레나타 테발디는 신인인 마리아 칼라스와 한 무대에서 교대로 노래를 불러야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테발디는 공연 전 자신이 먼저 나서 동료들에게 앙코르를 받지 말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정작 무대에서는 자신만이 앙코르 곡을 불렀다. 당연히 테발디가 칼라스를 위시한 전 동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이 사건 이후 둘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거듭했다. 한번은 《라 트라비아타》 공연에서 테발디가 키를 반음 낮춰 부르자, 마리아 칼라스는 시사 주간지 〈타임(TIME)〉과의 인터뷰에서 “자신과 테발디를 비교하는 것은 샴페인과 김빠진 콜라를 비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두 사람의 언행과 갈등은 실시간으로 전 세계 신문에 좋은 가십거리로 보도되었다.
1953년, 3일 간격으로 테발디가 출연하는 《라 발리(La Wally)》와 마리아 칼라스의 《메데아(Médée)》 공연이 라 스칼라 극장에서 열리게 되면서, 누가 더 많은 관객을 동원할 지가 초유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결과는 칼라스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칼라스의 공연은 표가 매진됐으나 테발디의 표는 조금 남아 있었다. 이 공연을 계기로 칼라스는 테발디를 밀쳐내고 1인자 자리에 등극한다. 이후 테발디는 이탈리아를 떠나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제2의 음악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둘은 라이벌로서 경쟁하는 가운데 서로에게 음악적으로 좋은 영향을 끼쳤고 결과적으로 관객들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오페라 토스카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를 부르는 디바, 마리아 칼라스 <사진=이철환>

한편, 칼라스의 명성이 높아지게 되면서 점차 극장과 지휘자와의 마찰이 잦아지게 되었다. 결국 1947년부터 시작한 밀라노의 라 스칼라 오페라단 생활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녀는 1958년 1월 2일, 로마 오페라(Opera di Roma) 극장에서 이탈리아 대통령 조반니 그론키 앞에서 《노르마》를 공연했다. 그런데 하필 그날 몸이 좋지 않았다. 결국 약을 먹고 공연하였으나, 통증과 약기운으로 인해 도중에 공연을 중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탈리아의 청중들은 그녀를 맹비난했고, 이 일로 칼라스는 극장 측과 격렬히 싸운 후 극장과의 관계를 청산했다.
이후 미국의 메트로폴리탄에서도 잠시 동안 몸담아 있기도 했으나, 이 역시 극장 측과의 불화로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나 1958년 12월 19일 파리에서 가진 갈라 콘서트에서 칼라스는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했다. 이때 청중 속에 있던 오나시스는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신이 내린 목소리 마리아 칼라스는 그의 예술적 명성과는 달리 사랑 때문에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운명적인 여인이었다. 1950~60년대에 오페라 계를 풍미하던 그녀였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그리 순탄치 못하였다. 칼라스에게는 자신 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세 명의 남자가 있었다.
첫 번째 남자는 이탈리아의 부유한 사업가 메네기니였다. 그는 칼라스의 첫 남편이자 매니저로서 그녀를 세계 오페라 무대에 당당히 등장시킨 인물이었다. 칼라스는 1947년 베로나 아레나 공연에서 만난 28년 연상의 메네기니와 동거하다가 곧 결혼하였다. 이후 남편 메네기기가 그녀의 음반과 각종 활동비용을 후원하였기에 칼라스는 노래와 오페라에만 전념할 수가 있었다.
두 번째 남자는 대지휘자였던 툴리오 세란핀이었다. 그는 칼라스에게 오페라 가수로서의 자신감을 심어준 훌륭한 스승이었다. 세라핀과 함께한 칼라스는 한 시즌에 바그너 《발퀴레》의 브륀힐데 역과 벨리니 《청교도》의 엘비라 역을 동시에 불러 이탈리아 오페라 계를 들끓게 했다. 어떤 소프라노도 이처럼 성격이 다른 배역을 며칠 사이에 완벽하게 바꿔가며 부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남자는 세계적인 거부 그리스의 선박왕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Aristotle Onassis)였다. 칼라스에게 오나시스의 만남은 그녀의 비극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칼라스가 오나시스와 첫 만남을 가졌을 당시 메네기니와는 여전히 서로 사랑하는 부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오나시스의 초대로 두 사람은 오나시스의 요트를 타고 함께 여행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이 요트 여행이 끝날 즈음에 오나시스와 칼라스는 묘한 관계로 발전되었다. 이로 인해 그동안 화목했던 메네기니와의 결혼생활은 막을 내리게 된다.
칼라스는 남편이자 후원자였던 메네기니를 버리고 오나시스와 동거생활을 하게 되었다. 1960년 초에는 오나시스를 따라 상류사회의 생활과 사교계에 다니는 가운데 작품 활동이 뜸하였다. 칼라스는 메네기니와 이혼 후 오나시스와 결혼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1957년 칼라스는 메네기니에게 먼저 이혼을 요구하였다.
오나시스는 칼라스를 철저하게 물질주의와 향락주의에 물들게 만들었다. 무대에 오르기보다는 오나시스가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하는 것을 우선으로 했고, 자신의 연주 스케줄보다는 오나시스의 스케줄에 더 몰두하며 지냈다.
칼라스는 그야말로 몇 년간을 상류사회의 향락에 빠져 지냈다. 몇몇 사람들이 그녀에게 간곡히 충고하여 다시 무대에 오르기도 했지만, 온통 오나시스 한사람 생각으로만 채워져 있던 칼라스를 되돌리기는 쉽지 않았다. 오나시스를 평생의 반려자로 생각하고 핑크빛 꿈에 졌어 있던 그녀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결혼을 위해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그리스 국적으로 변경하면서까지 사랑했던 오나시스가 전 미국 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 케네디와 재혼을 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칼라스는 이 무렵 아기를 유산하였다. 그의 목소리에도 이상이 생겼다. 이런 저런 이유로 공연취소가 연이어졌고 그에 따른 관객들의 비난이 쇄도하였다.

오나시스의 갑작스런 배신으로 그녀는 모든 기력이 소진되어 황폐해져 버리게 되었다. 목소리는 더 이상 전성기와 같지 않았고 연주에 대한 열정 또한 사리진 지 오래였다. 칼라스는 1965년 영국 코벤트 가든에서 열린 《토스카》 공연에서의 ‘토스카’역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자신의 세월이 다 가버렸음을 알아차린 칼라스는 프랑스로 건너가 은둔생활을 하였다.
파리에서 조용한 삶을 살아가던 중 1973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절친한 친구인 테너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함께 순회공연을 떠나보았다. 그러나 성과는 기대에 못 미쳤다. 육체적으로 무리한 공연일정을 마친 얼마 후 마리아 칼라스는 또다시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된다. 자신을 철저하게 배신했지만 마지막까지 그의 여자가 되기를 원했던 오나시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것이다. 이 소식은 칼라스에게 견딜 수 없는 정신적 충격이었다. 결국 그녀는 모든 의욕을 상실한 채 지내다 오나시스가 세상을 떠난 3년 후인 1977년 9월 16일 파리의 한 아파트에서 우울증 약물 및 수면제 과다복용 등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칼라스는 고독을 견딜 수 없을 만큼 싫어했다. 칼라스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메네기니의 친구에게 메네기니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얘기를 털어놓았다. 친구는 메네기니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칼라스를 다시 만나볼 것을 종용했으나 메네기니는 “떠난 사람이 먼저 사과하고 돌아와야 한다”며 먼저 손 내미는 것을 거절했다.
이 시대 최고 오페라 디바의 쓸쓸한 임종을 마지막까지 지켜 본 사람은 오로지 그녀의 간호사와 집사뿐이었다. 한때 자살설이 돌기도 했다. 극심한 고독에 의한 자살이라는 것이었다. 마리아 칼라스는 죽기 얼마 전 이런 얘기를 남겼다. “지금까지 노래를 사랑해 왔지만, 나에게 남는 건 사랑밖에 없더라!”

수많은 비극 오페라의 한 장면처럼 미스터리 속에 이 세상을 떠나간 마리아 칼라스. 그녀의 시신은 화장되어 납골당에 안치되었다가 살아생전 사랑했던 그리스 앞바다 에게 해에 뿌려졌다. 그 때 그녀 나이 54세였다. 이제 그녀는 갔지만 그의 목소리는 영원히 남아 지금도 온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특별한 감동으로 적시고 있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문화와 경제의 행복한 만남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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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네르, 생애 첫 윔블던 단식 우승 [서울=뉴스핌] 박상욱 기자 = 세계 1위 얀니크 신네르(이탈리아)가 생애 첫 윔블던 남자 단식 정상에 올랐다. 신네르는 13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올잉글랜드클럽 센터코트에서 열린 2025 윔블던 테니스 대회 남자 단식 결승에서 카를로스 알카라스(스페인·2위)를 3시간 4분 만에 3-1(4-6 6-4 6-4 6-4)로 꺾었다. 올해 1월 호주오픈에 이은 시즌 두 번째 메이저 타이틀을 품에 안고 상금은 300만 파운드(약 55억8000만원)를 거머쥐었다. 이탈리아 선수가 윔블던 단식 정상을 밟은 것은 남녀를 통틀어 이번이 처음이다. 2021년 남자 단식 마테오 베레티니, 2024년 여자 단식 자스민 파올리니가 결승에 진출했지만 모두 준우승에 그쳤다. [런던 로이터 =뉴스핌] 박상욱 기자 = 신네르가 13일(현지시간) 열린 윔블던 남자 단식 결승에서 알카라스를 꺾고 우승한 뒤 기뻐하고 있다. 2025.7.13 psoq1337@newspim.com 이번 결승은 지난 프랑스오픈 결승에 이은 두 선수의 메이저 결승 리턴 매치. 당시 신네르는 알카라스에게 2-3(6-4 7-6<7-4> 4-6 6-7<3-7> 6-7<2-10>)으로 패해 우승을 놓쳤다. 당시 트리플 매치 포인트를 날린 신네르는 경기 후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경기'라며 절치부심했고 한 달 만에 완벽하게 되갚았다. 신네르는 알카라스에게 당하던 5연패 사슬을 끊었다. 둘의 상대 전적은 여전히 알카라스가 8승 5패로 앞선다. 신네르는 이날 알카라스 특유의 드롭샷과 로브, 변칙 플레이에 흔들리지 않았다. 특히 3세트 게임스코어 4-4에서 브레이크에 성공하며 분위기를 완전히 가져왔다. 4세트에서도 다시 한 번 브레이크로 균형을 깼다. 게임스코어 5-4, 자신의 마지막 서브 게임에서 신네르는 평균 200km/h에 가까운 강서브로 트리플 챔피언십 포인트를 만들었고 두 번째 기회를 놓치지 않으며 우승을 확정 지었다. [런던 로이터 =뉴스핌] 박상욱 기자 = 신네르가 13일(현지시간) 열린 윔블던 남자 단식 결승에서 알카라스를 꺾고 우승한 뒤 케이트 미들턴 영국 왕세자빈의 축하를 받고 있다. 2025.7.13 psoq1337@newspim.com 경기 후 신네르는 "파리에서 정말 힘든 패배를 겪었기 때문에 감정이 북받친다"며 "결국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다. 우리는 패배를 받아들이고 계속 노력했고, 그 결과 이렇게 트로피를 들게 됐다"고 말했다. 하드 코트 메이저에서만 세 차례(2023 US오픈, 2024 호주오픈 포함) 우승했던 그는 이번 잔디 코트에서 처음 정상에 올라 메이저 전천후 강자임을 입증했다. 유일하게 우승이 없는 클레이코트 메이저 프랑스오픈까지 제패할 경우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다. 지난해 도핑 양성 반응이 나왔던 신네르는 도핑 사실이 알려진 뒤로는 올해 호주오픈에 이어 두 번째 메이저 트로피를 따냈고 도핑으로 인한 3개월 출전 정지 징계를 마친 올해 5월 초 이후로는 이번이 첫 메이저 우승이다. 반면 알카라스는 윔블던 3연패 도전에 실패했다. 통산 6번째 메이저 결승전에서 처음으로 패배를 당했고 커리어 그랜드슬램 달성을 위해선 여전히 호주오픈 우승이 필요하다. [런던 로이터 =뉴스핌] 박상욱 기자 = 신네르(왼쪽)와 알카라스가 13일(현지시간) 열린 윔블던 남자 단식 결승을 마치고 축하와 위로의 인사를 나누고 있다. 2025.7.13 psoq1337@newspim.com 그는 "결승에서 지는 건 언제나 힘든 일이다"라면서도 "하지만 오늘은 야닉의 날이다. 훌륭한 테니스를 한 그에게 축하를 전하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신네르와 알카라스는 지난해 호주오픈부터 치러진 7번의 메이저 대회에서 타이틀을 전부 나눠 가졌다. 2023년엔 알카라스가 프랑스오픈과 윔블던을, 신네르가 호주오픈과 US오픈을 차지했고, 올해는 다시 신네르가 호주오픈과 윔블던을, 알카라스가 프랑스오픈을 가져갔다. 이제 두 선수는 메이저를 양분하는 확실한 '빅2'로 자리매김했다. psoq1337@newspim.com 2025-07-14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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