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흔히 보이는 것들로 뫼비우스적, 그 이상의 상상 여행을 하려 한다. 주변의 사물들엔 저마다 독특한 내력이 숨어 있고 어떻게 빚느냐에 따라 보석이 되기도 하고 나침판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출발한 여행의 과정에 어떤 빛깔의 풍경이 나타날지, 그 끝이 어디까지 다다를지 필자 자신도 설레인다. 인문학의 시대라고 하는데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 메타적 성찰 역시 필요한 시점이다. 사물과 풍경, 시대와 인문을 두루 관통하면서 색다르면서도 유익한 여행을 떠나려 한다.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에 대해 쓰다 보니 한옥 마당까지 왔다. 다시 이야기하면 나는 풍자적인 수저계급론의 배경이 되는 우리나라의 불평등 구조를 질타하되 그 담론에 빠지지 말고 벗어나길 바라는 의미에서 엄마가 김치를 찢어 입에 넣어줄 때의 손수저와 숟가락을 떨어뜨릴 때의 소리의 세계로 독자들을 안내했다. 물론 경제 불황과 계층 간의 갈등에 따른 현실 인식과 그 모순의 혁파가 더 중요하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수저는 주방에 있기에 주방 내지 부엌에 대해 그것을 색다른 안목으로 봐봤다. 부엌 이야기는 아궁이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 다음엔 아궁이의 솥단지에 불은 검댕의 세계로 초대했다. 그리곤 아궁이와 더불어 정주민 생활의 중요한 축이 되는 항아리로 나아갔다. 그 다음엔 항아리가 놓여진 마당에 대해 썼다. 마당은 유목민적 사회와 정주민적 사회 즉 인류의 선사 시대와 역사 시대 전체를 압축하고 있는 터전이었다. 요약하자면 수저계급론에 갇히지 말자는 모색을 하다보니 피상적이나마 인류사적인 대지로 상상이 확장된 것이다. 최근의 에세이들을 그렇게 나름대로 정리하며 숲길을 걷다가 바닥에서 내 눈길을 휘어잡는 것이 있었다.
그저 단순한 나뭇가지이다. 평소에도 흔한 그것이 갑자기 내 가슴을 후비고 들어와 상상력에 불을 지피는 것이었다.
불이 사용되기 이전일 것이다. 돌도끼나 돌칼 같은 도구들을 사용하기 이전일 것이다. 동물에서 인간으로 진화되어 인간이 초기에 이용한 것 중의 하나가 간단한 작대기 형태일 것이다.
79만 년 전에 인류가 불을 사용한 흔적이 사해의 북부 지역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150 만 년 전에 유골이 불에 탄 흔적도 발견되었다는데 그 불이 자연발화가 아니라면 불이 사용된 기원은 그만큼 올라갈 것이다. 340만 년 전에 뼈로 만들어진 칼의 화석이 이디오피아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니 그 모두의 이전일 것이다.
도구를 만들어 쓰던 호모 하빌리스가 직립 보행하던 호모 에렉투스보다 먼저라고 하니 도구라고 하기도 뭐한 최초의 자연 상태의 물건이기에 호모 하빌리스의 초기나 그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340 만년 전의 칼의 화석으로든 또다른 유물들의 발견이 뒤따른다면 기존의 학설이나 시기가 달라질 것이며 이미 그런 것들이 나오는 상황이다. 미래의 고고학이 그려낼 인류의 선사적 그림은 지금 대략적으로 합의되어 그려지는 것과 다를 수도 있다.
넝쿨이나 돌멩이가 먼저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도 아니고 검증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초기의 인간들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고 한다면 누구는 넝쿨이나 자연상태의 돌멩이를 만지작했을지도 모르고 누구는 나뭇가지 또 누구는 열매나 흙, 나뭇잎을 만지작거렸을 것이다. 이런 원초적인 것들은 원숭이나 침팬지도 사용하니 인간만의 고유라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손의 사용이 자유로와진 인간은 점점 지능이 향상된다.
나뭇가지를 들면 자기 키보다 높게 달린 것을 건드릴 수 있다. 그곳에 과일이 달려 있다면 손에 쥔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움직여 따낼 수 있다. 시골에서 감이나 밤을 딸 때 지금도 그런 모습인데 그 시원이 아마 아궁이나 토기는 물론이고 불이 사용된 기원보다 더 멀리 나갈 것 같다.
나뭇가지는 어느새 무기로 발전한다. 들소나 매머드를 잡을 때 손에 쥐고 뛰었을 것이다. 한명이 쥐면 덩달아 움직이는 사람들 모두의 손에 쥐어질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자신을 보호하는 방패가 된다. 들소가 자신을 향해 덤벼들 때 휘두르면 공포를 줄일 수 있다. 공격과 수비 모두에 가능하고 자연에서 쉽게 구할 수 있으니 확산이 금세 이루어졌을 것이다. 칼이나 창은 이 최초의 간단한 도구가 발전해 나간 것일 것이다. 총기류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
작대기는 손의 연장이자 확장이다. 말하자면 손의 기능과 일차적으로는 같다. 손이 닿지 않는 곳의 일들을 처리해주고 손의 활용도보다 훨씬 복잡한 일들을 해결해준다.
나뭇가지로 땅에 뭔가를 그리거나 적기도 했을 것이다. 자연 상태의 나뭇가지를 분지르거나 꺾거나 접어서 제각기 활용해 나갔을 것이다. 브이 자 모양의 나뭇가지도 고무줄을 만들어낸 다음엔 장난감 새총으로 활용되었는데 태고적에도 쓰임새가 있었을른지도 모른다.
나뭇가지를 잘게 잘라 토막을 만들면 붓이나 연필, 볼펜, 크레파스의 원형이 된다. 알타미라의 동굴에 벽화를 그려나가던 예술가의 손엔 그 토막에서 한참 진화된 그림도구가 쥐어졌을 것이다.
예술의 전당 콘서트 홀에서 지휘를 하는 정명훈의 손에 쥐인 지휘봉도 그 원형을 거슬러 올라가면 태고적의 나뭇가지에 다달을 것이다. 비즈니스 룸에서 명함을 건네며 싸인할 때 쓰곤 하는 몽블랑 만년필, 집이나 사무실을 계약할 때 쓰는 도장, 놀이터의 철봉, 노인이 의지하는 지팡이 등등 그 예들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수저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느 빌라의 외벽에 설치된 가스관들이다. 좀더 복잡한 형태인 저것들의 기원도 인류 초기의 그 간단한 작대기 즉 선(線)일 것이다. 그것은 시간이 흘러 직선과 곡선으로 개념 정리 및 분화가 일어났을 것이다. 그 각각이 변형 및 입체화가 되고 또 서로 조합되면서 별의별 형태들을 빚어나갔을 것이다.
가스관, 전깃줄, 인터넷망 등등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것들이 우리의 삶을 에워싼다. 핏줄, 신경회로, 섬유조직 등등 우리 몸 속의 세계로 들어가도 그와 연계된 것들 천지일 것이지만 선, 그것들의 연쇄 조합 빼고는 문화나 문명을 이야기할 수 없다. 지금 문명의 첨단 속에 흐르는 SNS나 웹, 인공지능의 섬세한 망들도 마찬가지이다. 초기의 단순한 선이 현대의 망 세계로 진화한 것이다.
현대는 실로 망 세계로 부름직하다. 웹도 하나의 망이고 www(world wide web)도 망이다.
그래서 뭐를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그런 것보다는 뭐가 어떻게 되어 왔는지 상상 가능한 마당을 열어보자는 것이다. 초기에 존재했을 어떤 원초적 사람이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 뭔가를 해보던 순간이 지금 세상 도처를 꽉 채우고 있는 망 성격의 문명을 포함한 문명 자체를 이루었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광대한 시공 초기의 선 하나가 초래한 변화무쌍한 드라마를 한번쯤은 상상해 보는 즐거움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이다. SNS나 점점 커져가는 인공지능 세계가 인간과 인류 사회를 파괴하는 면이 있다면 그러한 디스토피아 역시 까마득한 태고적의 선 하나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거기까지 상상한다면 창조와 파괴를 아우르는 뭇 신화들 가령 그리스 신화나 성경의 창세기 신화, 인도의 신화보다 싱거우면서도 참신한 경이감에 쌓이지 않을까.
결혼 예물 선물로 시계를 주는 것이 보편화 되어 있다. 내가 어릴 적에는 숲에 가서 풀을 꺾어 손가락에 둘러 꽃반지를 만들어 주거나 손목에 들러 꽃시계를 만들어 주는 것이 유행이었다. 풀잎도 나뭇가지와 다른 면이 있지만 동일선상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풀잎을 활용한 것들 역시 너무도 풍성해 문명에 또다른 구조와 색채를 첨가했을 것이다.
싯가 몇 백만원 가는 로랙스 시계나 꽃반지, 꽃시계나 기원이 같은 것이다. 그런 의미나 가치가 부여되어 그것이 커지다 보면 거기에 달라붙는 가격은 큰 문제가 아닌 것으로 되기도 한다. 즉 가치와 가격이 등가화 되거나 가격이 가치를 좌지우지하는 이 시대에 원래의 가치 세계를 복원함으로써 일상의 혁명이 가능할 수 있다. 문명이 발전하고 더욱이 망 세계 역시 커지면서 인간을 윤택하게 하는 반면 소외감을 더욱 깊게 하기도 한다. 그에 따라 인간 소외의 극복과 사랑의 회복을 위해 일상의 부드러운 혁명이 절실한 상황이다. 그에 대한 담론이 싹틀 대지를 제공할 수도 있다는 것이 선 하나에 대한 이러한 상상이 주는 선물이다. 허허로운 숲길에 떨어져 뒹구는 나뭇가지 하나는 그마저 품고 있었다.
선에 대한 상상의 예들은 너무도 풍부해 초등학교 저학년 수업 시간에 결혼 시계와 꽃 시계를 말해주며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 다음에 각자 예를 들어 설명해 보라고 한다면 그 수업시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행복으로 가득찰 것이다. 아이들은 그 추억을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어떤 여자 아이가 “저는요. 아빠가 때릴 때 쓰는 회초리가 생각나요.”라고 말했다면 그 애를 마음에 두고 있는 남자 아이는 그 한마디가 주는 놀라움과 호기심과 연민의 바다에서 한동안 유영할 것이다.
그런 수업 교실의 바깥에선 다른 반 학생들이 텃밭에서 자라는 고추를 매어줄 말뚝을 박을 것이며 그 말뚝에 길고 흰 끈을 엮어 나갈 것이다. 다사로운 햇살은 그 흰 끈과 까르륵 웃는 소리가 들리는 교실의 유리창,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구릿빛 얼굴에 맑은 금도금을 할 것이다.
이명훈 (소설 ′작약도′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