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 논의 거친 다더니 돌연 'SAA' 조정
삼성전자 주주권 행사땐 '수탁위 건너뛰기'
[서울=뉴스핌] 임성봉 기자 =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방향과 국내주식 비중 조정 문제를 놓고 산하 위원회가 파열음을 내고 있다. 정부가 중요 안건마다 제 입맛에 맞는 결정을 강행, 이에 일부 위원들이 항의하며 회의에 불참하는 등 갈등이 깊어지는 모양새다.
12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기금위)는 지난 9일 노동계·시민사회계 4명의 위원이 불참한 가운데 국내 주식 전략적 자산배분(SAA)의 이탈 허용범위를 기존 ±2.0%에서 ±3.0%포인트로 ±1%포인트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이날 회의에 불참한 위원들은 정부 측 위원 등이 SAA 허용 범위 확대에 대한 충분한 논의 없이 안건 통과를 강행하려하자 항의의 표시로 불참했다.
[서울=뉴스핌] 백인혁 기자 =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이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2021년도 제2차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권 장관 뒤로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21년 주총 국민연금주주권 행사 촉구 피켓팅을 하고 있다. 2021.02.24 dlsgur9757@newspim.com |
앞서 기금위는 지난달 29일에도 이 안건에 대해 논의했으나 찬반 의견이 팽팽히 맞서면서 결론을 내지 못한 바 있다. 정부는 투자정책위원회나 실무평가위원회의 논의를 거친 뒤 다시 안건을 만들기로 했으나 돌연 이 같은 절차를 모두 생략하고 이날 기금위를 열어 안건을 합의 처리했다.
이 때문에 시민사회·노동단체에서도 일제히 비판의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한국노총은 성명서를 통해 "기금위는 사전 협의 없이 일주일 전 문자로 급하게 회의 개최를 통보해 기금위원 20명 중 절반가량만 참여한 상황에서 의결을 강행했다"며 "이미 한번 좌초된 안건을 다시 상정시켜 당장 다음 달부터 적용할 리밸런싱 범위조정을 당장 4월에 결정하자는 것은 그 저의가 의심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참여연대도 성명서를 내고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않고 수익성과 공공성 가치에 부합하는 장기적 투자라는 국민연금기금 운용의 원칙을 훼손하면서 국민연금 국내주식 리밸런싱 범위조정을 강행한 보건복지부를 규탄한다"고 비판했다.
앞서 국민연금은 삼성전자의 사외이사선임 안건에 대한 주주권 행사 방향을 놓고도 수탁자책임 전문위원회(수탁위)와 갈등을 빚은 바 있다. 당시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기금본부)는 내부 지침을 어기고 삼성전자 주주총회 안건을 단독으로 처리해 '수탁위 패싱'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현행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지침은 논란이 있는 안건에 대해서는 수탁위에 결정을 요청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기금본부는 이를 무시한 채 해당 안건에 대해 의결권 '찬성'을 결정한 뒤 그대로 대외적으로 공시했다.
이후 수탁위원 일부가 안건을 수탁위로 넘겨달라고 했으나 기금본부는 이마저도 거부했다. 지침상 수탁위원 3인 이상이 안건 회부를 요구하면 기금본부는 이를 수탁위로 넘겨야만 한다. 그럼에도 기금본부가 기존 결정을 바꾸지 않자 일부 수탁위원들이 항의의 의미로 사퇴 의사를 밝히는 등 갈등이 고조됐다. 결국 국민연금은 수탁위 패싱 논란에 대해 '미흡한 점이 있었다'고 인정한 뒤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기로 한 상태다.
한 기금위원은 "기금위는 그동안 치열한 토론과 논의, 합의 과정을 통해 기금운용의 방향성을 정해왔는데 이제는 최소한의 민주적 절차마저도 지켜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며 "국민연금은 국민의 노후자금을 책임지고 있고 경제적,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큰 데도 정부가 독단적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국민연금 안팎에선 기금의 독립성과 공공성 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민주적, 전문적 논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기금을 운용하고 주주권을 행사한다면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게 될 것"이라며 "특히 이 같은 운영 방식으로는 국민연금이 정부의 꼭두각시 역할만 하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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