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스페인을 찾는다. 저마다 이유는 다르다. 그저 이국적 풍광이 좋아서일 수도 있고,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에 이끌릴 수도 있다. 스페인의 음식과 플라멩코, 투우도 매력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스페인을 얼마나 알고 가는 것일까. 우리는 지금 스페인이 '혼혈의 나라'라는 사실을 곧잘 망각한다. 스페인이야말로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의 혼혈로 이뤄진 나라다. 이 사실을 무시한 채 들여다보는 스페인은 겉껍데기일 따름이다. 스페인 문화의 기저에 있는 '콘비벤시아', 즉 관용과 화합의 정신을 모른다면, 사실상 올바른 스페인 읽기는 실패한 것이다. 콘비벤시아 스페인. 그 기층문화의 세계로 걸어들어가보자.
스페인을 포함해 이베리아 반도는 문명 이식의 역사다. 켈트, 페니키아, 그리스, 카르타고 문명이 차례로 전해졌고, 기원전 2세기에는 로마제국에 속했다. 이 땅에 기독교가 전파된 것은 2~3세기쯤으로 보고 있다.
로마 멸망 이후에는 수에비, 반달, 일라노 등 여러 게르만 민족이 침입했다. 반달족은 409년 이베리아 반도를 침입해 427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아프리카 카르타고까지 진출했고, 게르만족 일파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부터 따뜻한 곳을 찾아 남하해온 서 고트(Visigoth) 족은 이들을 제압하고 507년 왕국을 건설했다.
특히 포르투갈 남부 알가르브(Algarve) 지방과 스페인 안달루시아(Andalucia) 지방은 대표적인 ‘혼혈의 땅’이다. 안달루시아라는 말부터가 반달족이 살고 있는 곳이란 뜻의 아랍어 ‘알 안달루스(Al-Andalus)’에서 나왔다. 포르투갈의 알가르브 역시 ‘서쪽’을 뜻하는 아랍어 ‘알 가르브(al-gharb)’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이곳을 점령한 북아프리카 무어인들은 스페인 세비야를 중심으로 서쪽(포르투갈)을 ‘알 가르브 알 안달루스(al-Gharb al-Andalaus)’ 즉, ‘서부 안달루시아’로 불렀고, 이 호칭이 오늘날 지역 명칭으로 굳어졌다.
711년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연도라고 할 수 있다. 아랍인에 의한 이베리아 반도 정복이 바로 그해에 시작됐다. 지금의 시리아 다마스쿠스(Damascus)를 도읍지로 하고 이란에서부터 모로코까지 방대한 왕국을 건설했던 이슬람 우마야드(Umayyd) 왕조(661~750)의 6대 칼리프 알 왈리드 1세(Al-Walid. Abd al-Malik, 668~715)는 그 해 타리크 이븐 지야드(Tariq Ibn Zyad) 장군에게 이베리아 침공을 명령한다.
이에 타리크 장군은 막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한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족을 주축으로 한 1만여 명의 전투병을 이끌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넜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를 통치하고 있던 서고트 왕국은 이를 무역선으로 착각해 변변한 전투도 치러보지 못한 채 이들의 상륙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 이듬해인 712년 서고트의 왕은 군대를 규합해 과달레테(Guadalete)에서 왕조의 명운을 건 대회전을 치렀지만, 그 자신을 포함해 귀족 대다수가 사망하는 패배를 당했고 안달루시아 지방은 이슬람 차지가 됐다.
해바라기 밭이 지평선을 이루는 안달루시아 지방의 평원 [사진=조용준] |
왈리드 1세는 우마이야 왕조 제2의 창건자로 불릴 만큼 가장 강력한 왕국을 건설했다. 그가 705년 칼리파가 되면서 우마이야 제국은 외부적으로는 동서로 영토를 확장해 나가고 내부적으로는 부를 축적하면서 평화로운 전성기를 맞았다. 그의 치세 10년간 광대한 지역이 이슬람 제국에 병합되고 이슬람 문명과 그 영향력이 최고조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의 정복사업은 이슬람 전파가 우선이던 이슬람 제국의 실제적인 건설자 오마르(Umar ibn, al-Kattab, 583~644) 칼리프와 달리, 실질적으로 물질과 부를 획득할 목적으로 전개됐다. 그래서 오마르 시대의 정복 사업은 ‘이슬람의 팽창’이라 불렸지만, 왈리드 시대의 정복 사업은 ‘아랍의 영토 팽창’이라고 불렸다.
이 당시 정복된 땅은 점차 이슬람화돼 정치적 영토의 확장뿐만 아니라 종교적 영역의 확장도 이뤄졌다. 따라서 이슬람 칼리파 권위에 충성하는 새로운 무슬림 신민들이 증가했다. 결국 왈리드의 정복 사업은 물질과 부의 획득이 우선이었으나, 그 결과는 오마르 때의 정복과 동일하게 이슬람 세계 확대와 무슬림 증가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왈리드 재임 기간에 이룩된 이슬람 제국은 그 이전에 생겨났던 어떤 제국보다 그 규모가 컸다.
아랍 정복자들은 정복 지역의 주민들을 이슬람화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전개했다. 금요 예배에 참석하는 피정복민들에게 금전적 보상을 하고 아랍어로만 읽고 암기해야 하는 ‘꾸란(코란)’을 페르시아어로 낭송하는 것까지 허용했다.
모로코 수도 라바트의 슬라(Chellah) 유적지.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했던 알모라비드와 알모하드 왕조의 왕실 묘지 터다. [사진=조용준] |
전임 압둘 말리크에 의해 시작된 행정개혁은 왈리드 시대에도 계속됐다. 그리스어나 페르시아어로 된 납세자 명부는 아랍어로 번역됐고, 이에 따라 세제가 정비됐다. 각종 공문서와 보고서도 아랍어로 작성됐다. 제국의 재정을 든든히 하기 위해 여러 지역의 재정이 계속 재정비됐다.
제국의 번영으로 쌓이는 부를 이용해 왈리드는 대규모 건축을 진행했다. 메디나, 다마스쿠스, 예루살렘에는 대규모의 사원이 건축됐다. 그는 많은 길을 만들었으며, 특히 성지가 있는 히자즈 지방에 이르는 길을 만들고 잘 정비했다. 길 주위에는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 있도록 우물을 팠다. 그는 고아나 신체장애자와 같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 돈을 사용했으며, 그런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에게 봉급을 지불했다. 또한 사회적 약자를을 위한 병원과 숙소를 짓기도 했다.
이후 우마야드 왕조를 이은 알모라비드(Almoravids)와 알모하드(Almohads) 이슬람 왕조들은 안달루시아와 발렌시아(Valencia) 지방에 뿌리를 내리고 500년도 넘게 프랑스와 접경 지역인 북부 일부를 제외한 반도 전역을 다스렸다.
북부 카스티야(Castilla)와 아라곤(Aragon) 등의 기독교 왕국이 주도한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에 의해 코르도바(Cordova)가 점령된 것이 1236년, 세비야(Seville)가 1248년이니 이 두 도시는 각각 525년과 537년이나 이슬람 통치를 받은 셈이다.
우리의 일제강점기는 36년이다. 그런데도 그토록 많은 변화가 일어나 우리 문화와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500년도 넘은 세월이라면 이베리아 반도에서 저쪽이니 이쪽이니 구분하고 혈통을 따지는 것 자체가 사실상 별 의미 없는 행위임을 말해준다.
게다가 그라나다(Granada)의 경우는 세비야가 기독교 왕에게 넘어간 이후로도 243년 동안이나 더 존속하고 1491년에야 지배권을 내놓았다. 무려 780년 만이다.
뒤에서 자세하게 얘기하겠지만 그라나다가 고립된 이 200여 년 동안 기독교 왕들은 그들의 왕궁을 장식하는 데 있어 오히려 그라나라다의 장인들을 초청해 이슬람 양식으로 치장하는 등 활발한 문화의 혼혈과 융합이 일어났다. 짧게 봐서 500여년, 길게는 700여 년 동안이나 이베리아에서 이슬람 문화가 번성했으니 피는 물론 문화의 모든 것이 뒤섞였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시각이다.
작가 겸 문화탐사 저널리스트. 전 동아일보 기자, <주간동아> 편집장. <유럽 도자기 여행> 시리즈, <펍, 영국의 스토리를 마시다> 등 다수 저서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