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14)
그동안 독자들의 많은 사랑속에 문학가 편을 연재하였읍니다. 오늘부터는 음악가 편을 시작으로 미술가, 그리고 대중예술가 순으로 연재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애독을 바랍니다.
18세기 중후반, ‘음악의 신동’이라고 불리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함께 또 다른 천재이자 ‘음악의 성인’으로 불리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태어났다.
두 사람의 아버지는 여러 면에서 대비가 된다. 어린 모차르트에게 아버지는 언제나 신 다음 가는 존재였다. 그러나 어린 베토벤에게 '아버지'라는 말은 곧 악마와 동의어였다. 그를 낳아준 아버지는 주정뱅이에다 게으르고 성질이 과격한 3류 음악가였다. 베토벤의 아버지는 어린 모차르트가 ‘음악의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는 것을 보면서 자기 아들도 그렇게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아들이 다섯 살 때 바이올린을 가르쳤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작곡에 두각을 나타낸 모차르트와는 달리 베토벤은 음악의 모든 기법을 철두철미하게 익힌 뒤에야 작곡을 시작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독일의 작지만 개방적인 도시였던 본에서 태어나고 또 성장했다. 본 궁정악단의 테너로 활동하고 있었던 아버지 요한은 그의 아들을 천재로 만들고자 하는 야망을 불태우고 있었다.
베토벤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혹독한 음악교육을 받기는 했으나, 음악가로서의 본격적인 수업은 11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리고 22세가 되던 1792년에는 빈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쾰른 대주교 선제후(選帝侯=신성 로마제국에서 독일 황제의 선거권을 가졌던 일곱 사람의 제후)가 이 재능 있는 청년이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빈으로 보내준 것이다. 당시 빈은 음악의 중심지였으므로 음악을 하려면 반드시 그곳으로 가야 했다. 이 무렵 베토벤은 여러 사람들로부터 음악적 지원을 받게 된다. 우선 하이든은 젊은 음악가 베토벤이 음악공부를 할 수 있도록 후원자들과 연결해 주었고, 모차르트의 숙적으로 알려져 있는 살리에리로부터는 오페라를 비롯한 성악관련 작곡법을, 알브레히츠베르거에게는 대위법 등 음악이론을 배웠다.
베토벤은 빈에서 바흐의 평균율과 자신의 작품을 연주하면서 점차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을 쌓아가게 된다. 그는 특히 즉흥연주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그러는 동안 베토벤은 빈에서 확고한 위치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청중들은 베토벤의 정열적이고 탁월한 피아노 즉흥연주에 매료되었으며, 차츰 그의 교향곡에도 환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베토벤의 음악가로서의 생애는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제1기는 1783년부터 1803년까지로, 그가 음악을 배우는 시기였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영향을 크게 받지만 새로운 혁신을 시도한다. 1804년부터 1815년이 제2기라 불리는데, 이 시기에 그만의 음악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당시 만들어진 그의 음악은 웅장하고 카리스마가 넘쳐서 일명 ‘영웅적 시기’라고도 일컬어진다.
제3기는 음악과 인간 승리의 시기이다. 그는 점점 청각 기능을 잃어갔지만, 그런 속에서도 불굴의 인간정신을 음악으로 승화시킨다. 그는 1795년부터 음악가로서는 치명적인 청각장애를 겪게 되고, 1801년에는 증세가 심각하게 악화된다. 한때 자살까지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음악가로서의 삶을 결코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이처럼 청각을 잃어버린 베토벤 만년의 음악적 삶은 영웅적인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상당수의 주요 작품이 그가 완전히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마지막 10년간 작곡된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삶에 대한 의지와 음악세계는 교향곡 제9번 《합창》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베토벤의 위대성이 가장 잘 발휘된 장르는 교향곡이다. 그는 교향곡을 9개 만들었지만 모두가 하나같이 우주의 장엄함과 인간의 위대한 정신이 담긴 걸작들이다. 특히 제3번 교향곡부터는 그의 특유의, 오로지 베토벤만의 음악세계와 형식을 펼쳐 보이고 있다.
제3번 교향곡은 본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대한 흠모에서 구상되었다. 그 근거로는 1804년 8월에 쓰인 악보 필사본에 적힌 “대심포니 / 제목 : 보나파르트(Sinfonia grande/ initolata Banaparte)”에서 암시된다. 자유와 평등에 대한 희망과 열정에 가득 찼던 청년 시절, 베토벤은 보나파르트 장군을 새로운 혁명 이념의 예언자로 믿었다. 그래서 그에게 바치는 교향곡을 작곡했다. 그러나 얼마 뒤 보나파르트 장군은 나폴레옹 황제가 되었고, 자유와 평등은 공화국의 이념에서 사라져버렸다. 이후 작품의 표지에 '어느 위인에게 바치는 영웅교향곡(Eroica)'이라고 고쳐 썼다.
이러한 영웅적 도전은 베토벤의 제5번 교향곡 《운명》에서도 계속된다. 제1악장의 모티브처럼 “운명이 이렇게 문을 두들겼을지”는 몰라도, 베토벤은 복수의 여신을 극복하고 승리의 전진을 행한다. 베토벤 교향곡 제6번은 《전원》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기도 했지만, 이를 넘어 전원생활의 기쁨이나 자연이 사람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여러 가지 느낌을 표현하고 있다.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 제9번 《합창》은 인류와 우주 전체의 영역을 음악에 담으면서, 실러의 ‘환희의 송가(An die Freude, Ode to Joy)’를 내용으로 한 합창이 피날레로 이어진다. 1, 2, 3악장에서 인간은 불안, 환호, 의연함을 경험한다. 그러다 마지막 4악장에서 그는 무한하고 드넓은 광야로 인도하여 완벽하고 영원한 낙원으로 이끌어간다. 그는 이 마지막 교향곡에서 가장 오래된 악기, 바로 인간의 소리로 돌아간다.
이 《합창》 교향곡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초연은 1824년 5월 7일 빈에서 있었다. 당시 관객들은 두 개의 지휘자석(포디움, podium)과 두 명의 지휘자라는 이상한 무대를 보아야 했다. 이는 합창 교향곡의 지휘를 반드시 직접 해야겠다는 베토벤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서였다. 난감해진 극장 측은 결국 빌헬름 움라우프를 보조 지휘자로 무대에 올렸고, 단원들은 두 명의 지휘자를 동시에 보며 연주해 나갔다고 한다. 마지막 4악장이 끝난 후 베토벤은 청중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알토 가수 웅거가 베토벤을 부축해 돌려세웠다. 그때서야 청중의 엄청난 환호를 볼 수 있었고, 비로소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베토벤은 결혼하지 않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베토벤에게 호감을 느끼는 귀족 여성들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그들은 한결같이 베토벤을 저버리고 달아났다. 베토벤이 평민출신인데다 무엇보다 천형과 같은 청각장애가 문제였다. 더 이상 결혼을 꿈꾸지 않을 나이인 47살이 됐을 때 베토벤은 지인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제 경험에 따르면 부부 중 어느 한쪽이 결혼을 후회하지 않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과거에 제가 열렬히 사랑했던 여성들 중 그 누구도 제 아내가 되지 않은 게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뒤 유품 속에서 3통의 편지가 나왔다. “나의 천사, 나의 모든 것, 나의 진정한 자신…” 열렬한 고백이 담긴 이 편지는 온천지인 테플리츠에서 썼는데, 7월 6일과 7월 7일이란 날짜만 표시돼 있을 뿐 연도는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수신인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전기 작가들은 모든 정황을 종합한 뒤 베토벤이 이 편지를 쓴 건 1812년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편지의 수취인은 지금까지 여전히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 버나드 로즈 감독의 영화 《불멸의 연인(Immortal Beloved)》에서도 베일 속에 가려진 베토벤의 진정한 연인을 추적했지만, 이는 어느 정도의 흥미요소를 가미한 픽션에 가깝다.
영화 ‘불멸의 연인(Immortal Beloved)’ 포스터 <사진=이철환> |
그러면 과연 평생 독신이었던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은 누구였을까?
여러 여성이 이 편지의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우선, 음악과 연관해서 본다면 《월광》이라는 피아노곡을 바친 줄리에타(Giullietta Guicciardi 1784~1865)와 《엘리제를 위하여》의 주인공인 테레제(Therese von Malfatti 1792~1851)가 유력하게 떠오른다.
줄리에타는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배웠던 제자이자 한때 결혼까지 생각했던 여인이다. 둘은 서로 애틋한 감정을 나누었지만 신분상의 문제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베토벤을 버리고 20세의 미남 귀족과 결혼해 이탈리아의 나폴리로 멀리 이주해버리고 말았다. 이후 베토벤은 그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담아 이 곡을 그녀에게 바친 것이다. 다만, 《월광》이란 곡명은 베토벤이 붙인 것이 아니다. 훗날 음악평론가인 루트비히 렐스타프가 제1악장에 대해 ‘달빛이 비치는 루체른 호수 물결에 흔들리는 작은 배’ 같다고 평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엘리제를 위하여》의 주인공인 테레제도 유력한 후보이다. 대지주의 딸이자 빈 사교계에 널리 알려졌을 만큼 대단한 미인이었고 성격 또한 명랑했던 그녀 또한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며 한때 결혼까지 생각했다. 그녀를 흠모했던 베토벤은 틈만 나면 그녀의 집을 방문하고 열렬한 사랑의 편지를 보내면서 결혼을 위해 세례증명까지 준비했지만, 결국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뜨거운 애정의 결과로 작곡된 《엘리제를 위하여》의 악보는 베토벤이 죽은 지 40년 뒤에 독일 뮌헨에서 발견되었다. 연주를 들어보면 베토벤이 작곡했으리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감미롭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세 번째 후보로는 베토벤의 친구 프란츠의 아내 안토니이다. 베토벤에 따르면 안토니는 다정한 마음과 빛나는 영혼을 가진 순수하면서도 현명한 여인이었다. 안토니는 네 아이의 어머니였는데, 몸이 허약해서 자주 아팠다. 베토벤은 프란츠 집의 난롯가에서 몸을 녹였고, 그들의 가족생활에 기꺼이 동참했다. 이런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생겨났을 법도 하다. 물론 베토벤의 높은 도덕성을 감안할 때 친구의 아내와 연애를 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두 사람은 정서적 교감을 나누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베토벤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담겨있다. “너, 불쌍한 베토벤이여, 너에게 행복은 따로 주어지지 않는다. 너는 오로지 혼자 모든 것을 창조해야만 한다. 너의 예술 안에서만 살아라. 그것만이 너의 유일한 실존이다.”
그 밖에도 여러 명의 여인들이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린다. 이처럼 베토벤은 평생을 통해 많은 여인과 교류를 갖고 애정을 느꼈지만 결실이 없었다. 물론 신분상의 문제도 있었지만, 베토벤의 진지하고 냉철한 성격이 스스로를 엄격하게 제어하고 통제하였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는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의 감정을 음악으로 승화시켰다. 사랑의 상처가 거듭되면서 오로지 음악에만 마음을 열고 자신의 모든 열정과 사랑을 쏟아 부었던 것이다. 그 결과 불후의 명작들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베토벤은 1827년 3월 26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사망했다. 사흘 후 거행된 그의 장례식에는 무려 2만 명의 빈 시민들이 모여 위대한 악성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문화와 경제의 행복한 만남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