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타 산업기술기념관·쿠라가이케기념관 방문
창업주 토요다 키이치로, 의지로 30년 기술 격차 극복
"사람 진보 없이 기술 진보 없다, 인재 양성 노력"
[나고야·토요타시=뉴스핌] 채송무 기자 = 세계 자동차 완성차 업체 중 1위를 기록하고 있는 토요타 자동차의 오늘날을 있게 한 원동력은 무엇일까. 창립자 토요다 키이치로의 창업정신을 지금도 지켜가고 있는 토요타 자동차는 꾸준한 혁신과 현장 제일주의·고객 중심의 정신을 그 원인으로 꼽았다.
지난 26~27일 토요다 키이치로를 기리고 있는 토요타 산업기술기념관과 쿠라가이케기념관을 방문했다.
토요타자동차의 창업주를 기린 쿠라카이게 박물관 전경 [사진=한국자동차기자협회]2023.10.30 dedanhi@newspim.com |
자동차 회사인 토요타 산업기술기념관과 쿠라가이케기념관의 시작은 모두 섬유 관련 직기에 대한 전시로 시작한다. 1926년 설립된 토요다 자동직기제작소가 토요타 자동차의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키이치로의 부친인 토요다 사키치는 어머니가 밤 늦게까지 직물을 짜는 것을 보고 '누군가를 편하게 하기 위해' 1896년 최초의 동력 직기를 개발했다. 사키치는 직기의 기본 골격을 나무로 하고 중요 부문만 철을 사용해 가격을 외산의 20분의 1 수준으로 낮추면서 일본 섬유 산업의 발전을 이끌었다.
여기서 토요타의 생산 철학인 '낭비를 하지 않고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한다'가 나왔다. 이날 설명을 맡은 미야코 요리야스 쿠라가이케 부관장은 "자동화로 사람을 자르는 형태가 아니라 최종적으로 다른 사람을 편하게 해주고 싶은 사람 중심의 철학"이라고 말했다.
토요타 산업기술기념관에 전시된 토요타 자동차 창업주 토요다 키이치로 당시 자동차 제작 모습 [사진=한국자동차기자협회] 2023.10.30 dedanhi@newspim.com |
당시 자동차 산업은 포드와 GM 두 개 회사가 가솔린 엔진으로 세계의 중심이었고 당시 일본은 증기차를 개발하고 있어 약 30년 간의 기술 격차가 있었다. 이 때문에 일본 독자 자동차 산업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많았지만 키이치로는 자동차 산업에 도전했다.
키이치로는 당시 '직기로 번 수입을 자동차에 다 써 회사를 망친다'는 비판이 있었음에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도쿄대 기계공학부를 졸업한 키이치로는 토요다 방직에 입사한 이후 낮에는 직기 일을 하고, 저녁에는 17명의 기술자를 모집해 만든 자동차부 연구를 진행했다. 이 자동차부가 독립해 오늘날의 토요타 자동차가 됐다.
토요타 자동차의 초창기 자동차 [사진=한국자동차기자협회]2023.10.30 dedanhi@newspim.com |
수많은 시행착오도 있었다. 초창기 제품은 타이어 차축이 빠지거나 범퍼가 부서지는 등 고장이 잦아 1년에 800번이나 수리했다. 쿠라가이케 전시관에는 토요타 자동차가 만든 트럭이 고장나 화를 내고 있는 고객과 허리를 굽혀 사과하는 키이치로의 모습이 디오라마로 전시돼 있다.
키이치로는 1941년 토요타 자동차 사장에 취임했는데 전쟁의 영향으로 원하는 자동차를 만들지 못하게 되면서 경영이 어려워졌고, 1949년 노동쟁의가 나는 등 자금이 부족해 직원들의 월급을 주지 못할 정도가 됐다.
이 때 은행들이 대출을 해주는 조건으로 정리해고를 요구해 키이치로는 2400명을 정리해고 한 후 본인 역시 책임을 지고 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후임자인 타지오 이시다 사장은 2년 후에 키이치로의 복귀를 약속했지만, 1952년 키이치로는 고혈압으로 57세의 나이에 사망한다.
토요타 자동차의 창업주를 기리는 쿠라가이케 기념관에 전시된 초기 토요타 자동차부 17인의 모습. 2023.10.30 dedanhi@newspim.com |
키이치로는 자동차를 만들면서 세 가지를 항상 강조했다. 이는 △매일 업무 방식을 개선 △현지현물(현장에서야 답이 나온다) △고객 제일주의였다.
이는 현재 토요타 자동차의 회장인 토요다 아키오 회장이 사장 시절 "상대방의 시선으로 일을 해야 한다"며 "자동차 업계가 100년 만의 큰 개혁의 시기를 겪고 있는 만큼 지금은 다시 원점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할 정도로 현재도 중요한 토요타 자동차의 철학이다.
한편, 토요타 자동차를 만들어낸 자동차부 최초의 17인에 여성이 5명 포함돼 있는 점도 눈길을 끌었다. 당시 보수적인 일본 사회였지만, 이 여성들은 정밀하게 자동차 설계 도면을 그리는 실질적인 업무를 통해 토요타 자동차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키이치로는 당시 다른 일본 자동차 기업들이 영국과 프랑스 등의 기술을 도입했을 때 일본인의 머리와 손으로 만든 순수 국산차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같은 불굴의 의지로 키이치로는 2018년 미국 자동차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토요타 산업전시관에 전시된 현재 토요타 자동차의 자동화된 자동차 제작 모습. [사진=한국자동차기자협회]2023.10.30 dedanhi@newspim.com |
그러나 정작 토요타 자동차는 키이치로 사망 이후인 1955년 크라운이 출시된 이후부터 일본 내에서 인기를 얻었다. 1966년에는 '100cc의 여유'를 내세운 코롤라가 미국에 수출되면서 미국에서 폭스바겐 다음으로 '수입차 2위'에 올라섰고, 현재는 2022년 글로벌 판매량이 1048만대에 이를 정도의 글로벌 완성차 업체 1위를 달리고 있다.
키이치로의 아들인 토요다 쇼이치로는 아버지에 대해 △글로벌 감각이 있는 사람 △빠른 결정력이 있는 사람 △현지현물을 항상 강조했다고 표현했다.
요리야스 쿠라가이케 부관장은 "키이치로 본인은 그 시대의 자동차에 도전했다. 토요타 자동차도 지금 큰 리스크에 도전하고 있다"며 "결국은 사람이 진보하지 않으면 기계의 진보는 없다. 인재 양성에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큰 변화의 파고가 이어지고 있는 자동차 산업에서 토요타 자동차는 인본주의와 인재 육성을 통해 성과를 내고 있다.
dedanhi@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