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서 국내 최초 기업형 조림사업…수익은 장학금으로
수도권에 투자하자는 말에 "내가 땅장사인 줄 아느냐" 혼쭐
M&A에도 과감한 투자…"운만으로는 큰 사업 할 수 없어"
[서울=뉴스핌] 정경환 기자 = "내가 땅장수인 줄 아느냐."
고(故) 최종현 전 SK그룹 회장의 호통이다. 1970년대 최종현 회장이 민둥산을 사서 조림사업을 하겠다고 나서자, 한 임원이 '이왕이면 경기도 수도권 근처의 산에 투자하는 것이 산간 오지의 땅을 사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가 혼쭐이 난 것이다.
SK그룹이 이달 초 충주 인등산에 '그린 포레스트 파빌리온(Green Forest Pavilion)'이라는 디지털 전시관을 개관하면서, SK의 'ESG 경영'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 조림으로 환경 보전하고 우수인재 양성해 사회에 기여…"SK ESG 경영의 뿌리"
SK그룹의 ESG 경영은 최종현 회장이 1972년 서해개발주식회사를(현 SK임업)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최종현 회장은 1960~70년대 무분별한 벌목으로 민둥산이 늘어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다 천안 광덕산, 충주 인등산, 영동 시항산 등 총 4500ha의 황무지를 사들이면서 국내 최초로 기업형 조림사업에 착수했다.
임야를 매입하다 보니 부동산 장사를 한다는 괜한 오해도 받았다. 내부에서는 부지를 활용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그런 과정에서 앞서 언급한 '땅장수' 에피소드도 생겨났다.
최종현 회장은 임야 매입을 부동산 투자로 바라보는 시각을 우려, 수도권에서 거리가 한참 떨어진 황무지를 매입했고, 호두나무와 자작나무 등 고급 활엽수를 촘촘히 심으면서 오해를 불식시켰다. 이런 노력으로 50년 전 민둥산은 현재 400만 그루, 서울 남산의 약 40배 크기의 울창한 숲으로 변신했다.
폐암수술을 받은 故 최종현 전 SK그룹 회장(가운데)이 IMF 구제금융 직전인 1997년 9월, 산소 호흡기를 꽂은 채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참석, 경제위기 극복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사진=SK] |
조림사업으로 발생한 수익금은 국가와 사회에 필요한 우수인재를 양성하는 장학금으로 쓰였다. 최종현 회장은 1974년 사재를 출연해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설립한 뒤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학비와 생활비 전액을 장학금으로 지급했다.
SK 측은 "최종현 선대회장은 조림으로 환경을 보전하고 우수인재를 양성해 사회에 기여했다는 측면에서 SK ESG 경영의 효시로 간주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선대회장의 자취가 선명한, ESG 경영 출발점이 된 충주 인등산에서 SK는 '그린 포레스트 파빌리온'을 통해 탄소감축을 위한 구체적인 로드맵을 제시하며 넷제로(Net Zero) 경영에 대한 굳은 의지를 다진 것"이라고 덧붙였다.
◆ 장학사업·M&A에 과감한 투자…"운만으로는 큰 사업 할 수 없어"
ESG 화두를 던지며 세계적 경영 흐름을 내다본 선견지명에 더해 최종현 선대회장은 그룹 경영 전반에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1980년대 초반 장학퀴즈 500회 특집이 방영될 무렵 최종현 회장은 선경그룹 임원 및 장학퀴즈 제작진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간 장학퀴즈에 투자한 돈이 얼마냐"고 물었다. 배석한 임원이 "150억~160억 원 가량 된다"고 답하자 그는 "그럼 선경이 장학퀴즈로 번 돈이 얼마나 되냐"고 되물었다. 임원들이 답을 머뭇거리자 최종현 회장은 "7조 원쯤 된다. 기업 홍보 효과가 1조~2조 원쯤 되고 5조~6조 원이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해 교육시킨 효과"라고 설명해 주변을 숙연케 했다.
인재 육성에 아낌없이 쏟아붓다보니 웃지 못 할 해프닝도 생겨났다. 재단 장학생 출신인 염재호 전 고려대 총장은 "말도 안되는 공고였다. 미국에 유학을 가는데, 학업 외 아무 조건 없이 엄청난 등록금과 5년 동안의 생활비까지 보장해 준다고 했다. 혹시 이상한 종교단체나 중앙정보부에서 지원해 주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까지 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500달러인 시절에 1년 동안 해외 유학을 하기 위해서는 생활비를 포함해 적어도 7500달러가 필요했다. 장학생들 역시 의례히 있을 법한 '의무, 근무' 관련 조건이 단 한 줄도 없었기 때문에 재단을 의심했다고 한다. 실제로 최종현 회장이 장학생들에게서 받은 가장 많은 질문 중 하나가 "전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한다는 것은 많은 재원을 필요로 하는데, 아무런 조건이 붙지 않는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SK 서린빌딩 [사진=SK] |
과감한 인수합병(M&A) 전략도 빼놓을 수 없다. 1973년 그룹 회장에 취임한 후 최종현 회장은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 계열화를 반드시 이루겠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1973년 정부로부터 정유공장 설립 허가서를 받아냈으나, 그 해 1차 오일 쇼크가 일어나 정유공장 설립이 무산됐다. 그러나 최종현 회장은 중동에 사우디아라비아 왕가 등 고위 석유네트워크를 구축해 안정적인 원유 공급선을 확보하는 등 석유사업 진출을 위한 기반을 세워갔다. 이후 유공의 합작선인 걸프사가 철수하리라 보고 비밀리에 인수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회장 자신이 직접 팀장을 맡아 걸프 지분 인수를 모색하다 1980년 드디어 인수에 성공한다.
그후에도 사업 다각화를 위해 자동차와 전자 산업 진출을 검토했으나, 다른 그룹과의 중복 투자로 인한 국력 낭비가 예상돼 포기했다. 이때 주목한 것이 정보통신 분야였다. 1984년 미국에 미주경영실을 세워 정보수집 및 현지 정보통신 회사에 투자를 하고 인력을 파견하는 등 10여 년이라는 준비 기간을 거쳤다. 1992년 선경은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획득했지만 상황 변화로 사업권을 자진 반납했다. 그 후 김영삼 정부의 한국이동통신 민영화 방침에 최고가를 제시해 당당히 인수했다.
한국이동통신 인수 과정에서 최종현 회장은 세 번의 큰 도전을 겪었다. 첫 번째는 특혜의혹이었다. 이동통신사업 진출을 10여년 전부터 준비했던 선경은 국제적 사업수행 능력과 경험, 치밀한 사업전략으로 모든 평가 분야에서 현격한 점수 차로 제2이동통신사업자로 최종 선정됐다. 그럼에도 끊임없는 특혜 의혹으로 사돈이 대통령을 하지 않는 시기에 재신청하기로 하고 백지화하는 데 동의했다. 국론 분열을 위한 막기 위한 결정이었다. 최종현 회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사업권 반납은 선경그룹의 도약을 위한 일보 후퇴에 불과했고 반드시 재도전을 통해 사업권을 다시 획득할 자신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두 번째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으로서의 대승적 양보였다. 새 정부에서 전경련이 컨소시엄을 만들어 제2이동통신 사업자를 선정하게 했지만 최종현 회장 자신이 전경련 회장이었기에 또 한번 난처한 상황이 됐다. 과감히 컨소시엄에서 빠지기로 결정한 최종현 회장은 "자칫 재계의 화목이 깨질 것이 걱정돼 또다시 물러섰지만 결국 재계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됐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세 번째는 고가의 인수비용이었다. 주당 8만 원대이던 한국이동통신 주가는 선경의 인수 소식 이후 30만 원으로 올랐고, 선경은 33만5000원에 인수했다. 선경 이외의 나머지 289건의 입찰신청은 모두 입찰 예정가에 미달돼 유찰됐다. 주가 상승으로 1500억 원 정도를 더 부담해야 상황에 내부 반발도 높았다. 최종현 회장은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회'다. 우리는 기업을 산 것이 아니라 통신사업 진출의 기회를 산 것이다. 기회를 돈 만으로 따질 수는 없다. 이렇게 해야 특혜 시비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다. 회사가치는 더욱 키워가면 된다"고 설득했다.
M&A 명가 SK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훗날 누군가가 M&A로 성장한 선경을 두고 '참 운이 좋다'고 했다. 최종현 회장의 답은 간단했다. 치밀한 준비과정을 직접 보여준 것. "이런 것이 운입니까? 운만으로는 큰 사업을 할 수가 없습니다."
hoan@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