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최신뉴스 GAM 라씨로
KYD 디데이
문화·연예 문화·연예일반

속보

더보기

[이철환의 예술가 이야기] 예술과 여자를 동시에 탐하다, 피카소

기사입력 : 2017년12월15일 12:30

최종수정 : 2017년12월15일 12:30

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36)

현대 회화사에 있어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사진의 등장'일 것이다. 사진의 등장은 그 동안 자연이란 대상을 시각화해낼 수 있는 특권적 권리를 누려왔던 화가들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이때부터 회화와 사진은 경쟁자이자 동시에 동반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미술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일은 사진에 맡기고, 스스로 독자적인 존재 이유를 확인코자 시도하게 된다. 그래서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은 자신들의 인상, 시각과 시선을 그림에 개입시키며 사진과는 다른 회화만의 별도의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인상파시대를 지나면서 활동한 피카소는 이로부터 더 나아가 ‘큐비즘(Cubism, 입체파)’이라는 새로운 미술 사조를 열어나가게 된다. 큐비즘이란 평면의 화면에 입체감과 깊이를 부여하는 화풍을 말한다. 피카소는 동료 미술가인 브라크와 함께 3차원적인 형태를 2차원의 평면에 묘사하는 입체주의 양식의 독창적인 기법과 이론들을 정립시켰다.
그는 일상의 진부한 재료를 변용한 파피에 콜레(papier collé), 콜라주(collage), 아상블라주(assemblage)의 작업을 통해 예술과 산업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화면에 신문지· 우표· 벽지· 상표 등의 실물을 붙이는 기법이 파피에 콜레이며, 인쇄물· 천· 쇠붙이· 나무 조각· 모래· 나뭇잎 등을 붙이는 것은 콜라주이다. 이에 비해 아상블라주란 아예 화면을 사용하지 않고 일상품을 한데 모아 구성한 미술품을 뜻한다.
이처럼 피카소의 주요 관심사는 미술가의 창조적 사고, 변형능력, 그리고 미술이 아닌 것에서 미술을 창조해내는 능력 등이었다. 이런 그의 사고는 예술이란 자연이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원칙을 내세운 젊은 초현실주의자들과 비슷하다.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 1973)는 1881년 스페인 남부 말라가에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는 결코 어린아이처럼 데생한 적이 없다. 열두 살 때 이미 라파엘로처럼 그렸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천재성을 보였다. 그런 천재성의 일단은 여러 군데서 나타났다. 그는 나이 제한에도 불구하고 바르셀로나 미술학교 시험에 당당하게 합격했다. 또 스페인의 미술전통을 소화해 열다섯 살 때에는 풍속화, 초상화를 능란하게 그려냈다.
1900년 그가 19세 때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하였고, 다음해 재차 방문하여 몽마르트르에 정착하게 된다. 이후 죽을 때까지 프랑스에서 살았다. 파리에 둥지를 틀게 된 피카소는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등 인상파들의 작품을 접했으며 고갱의 원시주의, 고흐의 열정적 표현주의 등의 영향도 받았다. 당시 피카소는 파리의 구석진 다락방에서 추위와 가난을 인내하며 지냈다. 하지만 20세에 첫 전시회를 열어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상황은 나아지기 시작했다. 1904년에는 아방가르드 미술가들과 작가들의 모임에 핵심적인 인물이 되었다.

피카소의 작품세계는 흔히 ‘청색 시대(1901~1904)’, ‘장미 빛 시대(1905~1907)’, ‘원시 시대(1908~1909)’, ‘분석적 입체주의 시대(1908~1912)’, ‘종합적 입체주의 시대(1912~1913)’ 등으로 나뉜다. 청색 시대의 작품들은 우울한 분위기를 발산한다. 장미 빛 시대에는 핑크색과 오렌지색의 색조가 두드러진다. 원시 시대에는 고대 이베리아 조각과 아프리카 미술, 그리고 오세아니아 미술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선구적인 작품인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선보였다. 인물들을 각지게 묘사한 이 그림은 입체주의로의 전환을 알리는 작품이 되었다.
이와 함께 피카소의 화풍은 사람들과의 관계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피카소는 초기 파리생활이 어려울 때 주로 거지와 가난한 가족 등을 그렸다. 특히 당시 파리에서 동고동락하였던 절친한 친구 카를로스 카사헤마스의 비극적인 자살은 그에게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자연히 그의 화면은 청색 단색조의 차가운 색조가 주종을 이루었다. 그러던 중 그의 첫 여자인 페르낭드 올리비에와 만나게 되면서 점차 짙은 우울에서 벗어나 장미 빛 시대를 열어나간다. 이즈음 그는 파리에서 많은 친구들과 동료들을 만들게 된다. 시인 아폴리네르, 화가 마티스와 모딜리아니 등도 포함되어 있다.

피카소의 후기 작품들은 분류하기가 쉽지 않다. 스페인 내전 당시 나치 독일의 공군 원수 헤르만 괴링의 무차별 폭격으로 황폐화 된 게르니카 시가지의 참극을 듣고 분노해 그린 그림이 《게르니카(Guernica)》이다. 이 그림은 3.5m × 7.8m라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작품이다. 그래서 피카소는 붓이 아니라 롤러로 그림을 그렸다. 거대한 캔버스에는 회색과 흰색의 색조만이 칠해졌는데, 이는 참사의 슬픔을 나타내고 있다. 그림 속의 황소, 말, 백열전구, 믿기지 않는 공포에 괴로운 표정으로 허둥대며 달리는 사람들, 꽃을 든 팔, 부서진 검 등은 전쟁의 공포와 참혹상을 송두리째 담고 있다.
피카소는 이후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미움을 사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피카소는 “스페인이 민주화되기 전에는 《게르니카》를 스페인에 걸 수 없다”고 했으며, 프랑코가 죽고 1981년이 되어서야 이 걸작은 스페인으로 반환되었다. 지금은 마드리드의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 별도 전시실에 전시되어있다. 이런 일화도 있다. 나치의 파리 점령 직후 한 게슈타포 장교가 피카소에게 “당신이 《게르니카》를 그렸나?”라고 물었다. 이에 피카소는 “아니, 당신들이 그렸지”라고 답했다고 한다.

게르니카, 캔버스에 유화, 349x776cm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 소장 <사진=이철환>

피카소처럼 살아 있는 동안 인생을 다양하게 정열적으로 즐기고 풍요로움을 만끽하면서 또 영향력까지 가졌던 예술가가 또 있을까? 그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통하여 그림, 판화, 조각, 데생, 콜라주, 도자기 등 모두 4만 4천여 점의 방대한 양의 작품들을 남겼다. 그의 그림 중 1억 달러를 상회하는 것만 해도 《알제의 여인들》, 《누드, 녹색 잎과 상반신》, 《파이프를 든 소년》 등 3점이나 된다. 미술 경매사상 가장 비싸게 팔린 그림인 《알제의 여인들》이란 작품의 가격은 무려 1억 7,936만 달러였다. 그 어떤 화가들보다 압도적이다.
피카소의 천재성은 20세기 미술을 지배했다. 그 결과 20세기의 다른 모든 미술가들은 상대적으로 그의 그늘에 가려진 것처럼 보였다. 피카소는 마치 카멜레온처럼 양식과 매체를 변경해가며 많은 작품들을 제작했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독창적이었고 때로는 도발적이기까지 했다. 그는 조르주 브라크, 앙리 마티스, 페르낭 레제와 같은 동시대의 미술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아실 고르키 등 후대의 미술가들에게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그는 인간의 자유와 독창성을 사랑하고 또 표현해 내기를 갈망한 진정한 예술가이자 휴머니스트였다. 그러나 한 시대를 풍미했던 피카소도 세월의 무게를 어쩌지 못하고 1973년 93세의 나이로 프랑스의 액상 프로방스 근처 무쟁의 저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피카소는 작품의 수만큼이나 많은 여인들과의 염문으로도 유명하다. 23세 때 만난 첫 여인을 시작으로 72세에 만난 자클린 로크까지 수많은 여인들과 함께하였다. 7명의 여인들과 동거했고 2번 결혼했다. 후세의 평론가들은 피카소에게 있어 여인이란 존재는 예술 창조의 원천이었을 것으로 평가한다.
피카소의 나이 23세가 되던 1904년, 그는 파리에서 유부녀인 동갑내기 프랑스 여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게 된다. 모델이었던 그녀는 피카소가 처음 사랑한 여인이었다. 키가 크고 균형 잡힌 육감적인 몸매와 검붉은 머리칼을 지닌 그녀는 항상 쾌활한 성격으로 피카소를 기쁘게 했다.
가난한 시절 ‘청색 시대’ 그림을 그렸던 피카소는 그녀의 헌신적 도움으로 침울한 청색을 벗고 ‘장미 빛 시대’로 변신한다. 대표적인 작품이 1907년의 《아비뇽의 아가씨들》이다. 이 작품을 통해 피카소는 큐비즘을 개척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에 피카소는 페르낭드에게 등을 돌린다. 자유를 갈망하던 피카소는 그녀의 깔끔함과 상류사회 지향의 기질에 갑갑함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피카소는 1911년, 9년에 걸친 페르낭드와의 동거를 끝내고 친구 마르쿠스의 연인 에바와 깊은 사랑에 빠진다. 이 여인은 피카소가 차갑고 날카로운 분석적 큐비즘을 버리고 격정과 선율에 가득 찬 종합적 큐비즘으로 들어설 때 인도자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았던 에바는 1915년 30세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피카소의 세번째 여인인 올가는 러시아 출신의 발레리나로 귀족적 아름다움을 지닌 여성이었다. 장 콕토의 발레 《퍼레이드》에 무대미술을 맡은 피카소는 36살에 25살의 발레리나 올가와 처음으로 정식 결혼을 한다. 둘 사이에 첫아들 파울로를 낳는다. 그러나 올가가 피카소와 아이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바람에 오히려 피카소와의 사이가 소원해지고 결혼 4년 만에 부부관계는 파경을 맞는다.

1927년 피카소의 나이 45세가 되던 해, 그는 관능미 넘치는 17세 금발의 소녀 마리 테레즈를 6개월 동안 쫒아 다닌 끝에 걸작 《거울 앞에 선 처녀》의 모델로 세운다. 그녀는 22살 때 피카소의 두 번째 아이인 딸 마야를 낳는다. 피카소에게 가장 창조적인 영감을 준 여성이었다. 그러나 피카소는 그녀가 세련되지 못하고 무식하다며 버리고 떠난다. 피카소가 숨을 거둔 지 3년째, 피카소를 만난 지 50년이 되는 날, 그녀는 피카소를 저승에서도 보살펴야 한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순애보의 주인공으로 남은 불행한 여인이었다.
나이 54세가 되던 1936년 피카소는 29살의 사진작가이자 그의 다섯 번째 여인이 되는 도라 마르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피카소의 대작 《게르니카》의 제작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한다. 피카소 작품에서 ‘우는 여인’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피카소와의 이별로 정신착란증을 일으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 불행한 여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944년, 62세의 피카소는 20살의 젊고 아름다운 여류화가 프랑스와즈를 만나 함께 살며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를 낳는다. 피카소의 그림 속에서 그녀는 빛나는 태양이나 꽃으로 표현된다. 프랑스와즈는 피카소가 자신의 친구와 외도를 하는 것을 알고는 이를 용서하지 않고 그를 떠나게 된다. 자발적으로 피카소 곁을 떠난 유일한 여성이었다.
프랑스와즈는 피카소와 이별 후 《피카소와의 삶(Life with Picasso)》이란 책을 발표해 피카소와 함께한 10년간의 생활을 솔직히 고백했다. “저는 저희 아버지나 남자친구와는 대화가 잘 되지 않는다. 그런데 저보다 3곱절 연상인 당신과 말이 통하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요.”

나이 72세가 되던 1953년, 피카소는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내조를 해준 마지막 여인인 재클린이라는 이혼녀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8년간의 동거 이후 1961년 34살의 나이에 80세의 피카소와 결혼한다. 그리고 피카소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함께 한다. 그녀는 피카소에게 헌신적으로 절대적인 사랑을 바친다. 피카소가 죽은 후 재클린은 방에 걸린 검은 커튼을 한 번도 열지 않았다고 한다. 또 피카소의 망령을 위해 식탁에 피카소의 자리를 마련해 놓고 노래를 들려주거나 기이한 의식을 치르곤 했다고 전해진다.
피카소가 세상을 떠난 후 그와 함께 했던 수많은 여인들과 후손들은 대부분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피카소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리 테레즈는 목을 매 자살했고, 재클린은 1986년 10월 15일 피카소의 105번째 생일을 앞두고 피카소의 무덤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올가와 피카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파울로는 약물 중독으로 죽었다. 또 피카소의 손자 중 한사람인 파블리토는 피카소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왔다가 약을 먹고 자살했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문화와 경제의 행복한 만남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뉴스핌 베스트 기사]

사진
尹대통령 국정 지지율 30.1%…부정평가 66.7% '경고등' [서울=뉴스핌] 김종원 전문기자 =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30.1%가 나왔다. 지난 2주 전 뉴스핌 정기 여론조사 38.1%보다 8%포인트가 빠졌다. 반면 부정 지지율은 66.7%로 2주 전 59.3%보다 7.4%포인트가 오른 70%에 육박했다. 정부·여당의 4·10 22대 총선 참패에 따른 국정 심판 여파가 아직도 전 연령과 전국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국민 10명 중 7명 가까이 윤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대해 부정적 여론이 거센 상황에서 취임 2년을 맞는 윤 대통령의 국정 동력 확보에 경고등이 켜졌다. 이번 정례 여론조사는 뉴스핌 의뢰로 미디어리서치가 지난 4월 29일부터 30일까지 이틀 간 전국 만 18살 이상 남녀 1006명을 대상으로 실시했다.   4·10 총선 민의에 따른 윤 대통령과 제1야당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간의 지난 29일 첫 영수회담 결과는 아직 민심에 온전히 반영되지 않아 좀 더 여론의 추이를 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정례 조사에서 '매우 잘하고 있다' 15.2%, '잘하고 있는 편' 14.9%로 국정 긍정 평가는 30.1%였다. 4·10 총선 직후 2주 전인 지난 4월 15·16일 뉴스핌 정기조사 때 긍정평가 38.1%보다 8%포인트 하락했다. 윤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대한 긍정 지지율이 뉴스핌 정기 여론조사에서 30%선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사실상 국정 장악과 국정 운영 동력 확보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부정평가는 '매우 잘 못하고 있다' 57.2%, '잘 못하는 편' 9.5%로 국민 10명 중 7명에 가까운 66.7%였다. 지난 2주 전 조사 59.3%보다 7.4%포인트가 많아졌다. 윤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대한 긍·부정 격차는 지난 2주 전 조사와 비교해서 21.2%포인트에서 36.6%포인트로 크게 벌어졌다. 연령대별로 보면 30대에서 부정평가가 79.2%로 가장 높았다. 40대 77.4%, 50대 70.4%로 30·40·50세대 10명 7명이 윤 대통령 국정 운영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70대 이상에서만 부정 41.0%, 긍정 48.0%로 긍정 평가가 조금 앞섰다. 지역별로는 정부와 여당인 국민의힘의 전통 지지층인 대구경북(TK)에서도 긍정 40.9%, 부정 54.4%로 부정 수치가 10%포인트를 훌쩍 넘어섰다. 부산울산경남(PK)에서는 긍정 35.5%, 부정 61.6%로 긍·부정 격차가 절반 가까이 됐다. 광주전남전북 호남에서는 부정 80.9%, 긍정 16.5%로 10명 중 8명이 부정적이었다. 정당별 지지층에서도 지지층이 없는 무당층의 69.1%가 부정, 긍정 27.9%로 10명 중 7명 가까이가 부정적 평가였다. 김대은 미디어리서치 대표는 윤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크게 떨어진 이유에 대해 "지난달 29일 이재명 야당 대표와 취임 후 700여 일 만에 첫 영수회담을 했지만 국론 분열과 민생 위기를 타개할 뚜렷한 해법은 없었다"고 분석했다. 김 대표는 "오히려 4·10 총선 참패 이후 단행한 대통령실 비서실장에 찐윤' 인사를 임명하는 등 윤 대통령의 변하지 않는 일방적·독선적 국정운영 스타일과 함께 답이 보이지 않는 의대 증원 문제에 대한 국민 피로감이 커졌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김 대표는 "물가 상승으로 인한 민생 경제 불안감 등 여론이 악화되면서 지지층 마저 대거 이탈하며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추락했다"고 분석했다. 이번 조사는 무선(100%) 가상번호 임의걸기(RDD) 자동응답(ARS) 방식으로 진행됐다. 신뢰 수준은 95%에 표본 오차 ±3.1%포인트, 응답률은 2.9%다. 자세한 조사 내용은 미디어리서치 홈페이지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kjw8619@newspim.com 2024-05-02 06:00
사진
"몸 힘들어도 환자 위했는데, 공공의 적 됐다" 전공의 '울먹' [서울=뉴스핌] 방보경 노연경 기자 = 의과대학 학생, 전공의 등은 정부가 독단적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전공의 대표는 '정부가 우리를 악마화하는 과정에서 (환자와의) 신뢰를 깨고 있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서울의대 비대위)가 30일 개최 의료개혁 관련 긴급 심포지엄에서 박재일 서울대병원 전공의 대표는 "국민 위한 의료개혁이 올바른 방향 무엇인가를 고민했는데, 공공의 적이 돼버렸다"며 울먹였다.  [서울=뉴스핌] 윤창빈 기자 =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 병원 제일제당홀에서 열린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협의회 비대위 긴급 심포지엄에 의료진들이 참석해 있다. 2024.04.30 pangbin@newspim.com 이날 열린 심포지엄은 의대 정원 확정을 앞두고 이뤄졌다. 교수들은 의료대란의 배경 및 정부에 제시할 정책 대안을 짚었다. 김민호 서울대 의과대학 학생회장과 박재일 서울대병원 전공의대표 역시 자리에 참석해 입장을 표명했다.  특히 박 대표는 혈액종양내과에서 일해오면서 느꼈던 개인적인 소회를 털어놨다. 박 대표는 "수련받으면서 몸이 힘든 시간이 있었지만, 몸이 힘들수록 내 환자의 몸은 건강해질 거라고 믿었다"고 했다.  그는 "내과 1년차 때 맡았던 환자에게 매일 울면서 어떤 말을 해드려야 하는지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신을 믿지 않지만 인생에서 처음으로 기도를 했다"며 "(그분을 볼 때마다) 복도로 다시 나와서 심호흡하고 커튼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걸 반복했다"며 개인적인 경험을 공유했다.  박 대표는 "2년 후 그분이 완치된 것을 보고 힘든 상황에 환자들 곁에 있고 싶어서 혈액종양내과를 지원했다"며 "회복한 환자들의 감사인사와 편지를 마음속에 품는데 정부는 전공의를 악마화해서 국민 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어 "자부심과 긍지 갖고 환자 곁에서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달라"며 "기피과가 있다면 시스템 개선해서 모든 전공의들이 소신껏 지원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다.  박 대표의 발표가 끝나자 30초 이상의 큰 박수소리가 이어졌다. 박 대표는 자리로 돌아간 뒤에도 휴지를 손에 쥐고 연신 눈물을 닦았다. 동료 전공의로 보이는 몇몇은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방재승 분당서울대학교병원 교수는 "교수이자 선배의사로서 부끄럽기도 하고 마음이 심란하다. 전공의 대표가 저렇게 슬픈 모습 보이는 것은 진심이 아니면 나올 수 없다"며 "정부는 전공의 복귀를 이야기하기 전에 진실된 마음으로 의대생과 전공의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뉴스핌] 윤창빈 기자 =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 병원 제일제당홀에서 열린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협의회 비대위 긴급 심포지엄에 의료진들이 참석해 있다. 2024.04.30 pangbin@newspim.com 박 대표는 발표에서 정부가 전문직, 수련생, 노동자 등의 정체성이 혼재된 전공의의 입장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의료계는 오래전부터 의료체계 문제점 분석해 정부에게 해결책을 제시해 왔다. 하지만 정부는 보건의료정책 심의위원회에서도 알 수 있듯, 의료계 현장 목소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특히 "타국과 비교했을 때 전문가 의견 태도가 반영되지 않았고, 의료개혁특별위원회까지 지속됐다"며 "정부는 의료체계 전반적 문제점을 잘못 진단하고 엉뚱한 해결책을 내놓고 있다"며 초기 진단과정부터 되짚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민호 의과대학 학생 대표 역시 정부가 의료계와 교육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는 점을 지적했다. 김 대표는 "정부는 필수의료만이 국민의 건강을 위해 필요하며, 비필수의료는 시스템을 왜곡하는 주범인 양 몰아가고 있다"며 "저수가 박리다매 의료 시스템이 고성장 시대가 끝나자 통째로 무너져내리고 있는데, 이를 정부가 좁고 자의적인 범위로만 보고 있다"고 했다.  이어 "증원으로 교육 질 저하, 의료 질 저하 발생하면 책임 결과 또한 의료인이 같이 안게 된다"며 "학생들은 (정부 정책이) 의료와 의학을 위하는 진심 어린 정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김 대표는 ▲시스템적 접근 필요 ▲현장의 목소리 청취 ▲필수의료패키지 반대 등의 안건을 내놓으며 대정부 요구안을 제시했다.  hello@newspim.com 2024-04-30 15:03
안다쇼핑
Top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