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최신뉴스 GAM 라씨로
KYD 라이브
KYD 디데이
문화·연예 문화·연예일반

속보

더보기

여인과 장미를 사랑한 로맨티스트, 라이너 마리아 릴케

기사입력 : 2017년08월30일 10:29

최종수정 : 2017년08월30일 10:29

예술보다 사랑, 사랑보다 예술(7)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해 주소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진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을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오래오래 그러할 것입니다.
깨어서, 책을 읽고, 길고 긴 편지를 쓰고,
나뭇잎이 굴러갈 때면, 불안스레
가로수 길을 이리저리 소요할 것입니다.

릴케는 '가을 날'을 이렇게 시로 표현하였다. 아련한 향수와 그리움을 자아내는 이름,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그야말로 시인의 대명사다. 세계인에게 가장 많은 애송시를 제공한 시인이다. 또 그는 여인과 장미를 사랑하는 로맨티스트였다.

스위스 라롱에 있는 릴케의 무덤과 묘비명 <사진=이철환>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는 1875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장교로서 입신을 꿈꾸었으나 실패하고 제대하여 하급관리가 되었다. 허영심 강한 어머니는 결혼생활에 만족할 수 없었다. 이처럼 릴케는 어린 시절 화목하지 못한 가정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더욱이 어머니는 결혼 후 처음으로 낳은 딸이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자 딸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드러낸다. 죽은 딸을 잊지 못한 어머니는 릴케를 여자아이처럼 키웠다. 그래서 일곱 살 때까지 여자 옷을 입고 자라야 했다. 여덟 살 때 부모가 이혼하자 릴케는 따뜻하지 않은 어머니 품에서 자라게 된다.

1886~1890년까지 아버지의 뜻을 좇아 육군 군사학교에 적을 두었으나, 섬약한 시인의 감수성을 타고난 데다 병약한 릴케에게는 군사학교의 생활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견디기 힘들었다. 그리하여 1891년에 신병을 이유로 중퇴하고 말았다. 그 뒤 20세 때인 1895년 프라하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여 예술사와 문학사를 공부하였고, 곧이어 1896년 뮌헨 대학으로 옮겨 예술사, 미학 등을 공부하였다.

1897년, 릴케는 성공한 작가이자 평론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던 열네 살 연상의 여인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를 만나게 된다. 루 살로메는 릴케의 인생과 작품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1899년과 1900년 2회에 걸쳐서 루 살로메와 함께 러시아를 여행한 것이 시인으로서의 릴케에게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고, 그의 진면목을 떨치게 한 계기가 되었다.

또 릴케는 1902년에는 파리로 가서 조각가 로댕의 비서가 되었다. 로댕과 한집에 기거하면서 로댕 예술의 진수를 접하게 된 것도 그의 작품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9년 6월 스위스의 어느 문학 단체의 초청을 받아 스위스로 갔다가 거기서 영주하였다. '두이노의 비가(Duineser Elegien)'나 '오르페우스에게 부치는 소네트(Sonnette an Orpheus)' 같은 대작이 여기에서 만들어졌다.

릴케의 문학이 처음부터 화려한 꽃을 피운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독학하다시피한 문학청년 시절에 첫 시집을 냈으니, 미숙했던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릴케가 처녀시집 '삶과 노래'를 낸 것은 그의 나이 18세 때였다. 사실 첫 시집을 비롯하여 루 살로메를 만나기 전까지의 시들은 완성도가 다소 떨어진다. 다만, 격정을 숨기지 않는 청년의 감수성은 십분 느낄 수가 있다.

루 살로메를 만나 러시아 여행 등을 통해 인식의 지평을 넓히게 되면서 릴케의 문학은 바야흐로 날개를 달게 되었다. 1905년에 씌어진 '기도시집(祈禱詩集)'을 통해 비로소 릴케는 평단과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기 시작했다. 1907년 발표한 '신 시집'에서는 한층 더 성숙된 그의 시세계를 선보인다. 또한 이 무렵 로댕과 함께 일하면서 조각의 세계를 통해 사물을 보는 눈이 더욱 깊어지게 된다.

1910년 만들어진 소설 '말테의 수기'도 릴케 문학의 완숙기에 창작된 중요한 작품이다. 덴마크 출신의 젊은 시인 말테가 파리에서 고독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수기 형식으로 담은 이 소설은 릴케의 문학과 인생에 대한 고민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또한 '신 시집'에 대응되는 산문으로 된 작품이다. 그동안의 시들이 상징주의자의 순수시였다면, '말테의 수기'는 실존주의자적 관점으로 만든 첫 작품이라 할 것이다. 다만 좀 난해한 측면이 없지 않다. 여하튼 이 대작을 발표한 이후 그는 후유증으로 집필장애를 가지게 되었고, 그 결과 오랫동안 글 쓰는 것을 중단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그는 마지막 조국으로 여기는 스위스에서 살면서 그의 문학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두이노의 비가'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를 1923년 연이어 집필한다. '두이노의 비가'는 릴케 시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릴케의 문학세계와 삶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사랑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에게는 수많은 여인들이 스쳐지나갔다. 누군가 릴케의 여자들을 ‘항성’과 ‘혜성’으로 나누었다. 이에 따르면 루 살로메와 같은 여인이 릴케의 생애 내내 사라지지 않은 항성이라면, 화가 발라디네 클로소프스카 등은 잠깐 스쳐 지나간 유성 내지 혜성과 같은 존재라 할 것이다.

수많은 여인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여인은 단연 루 살로메다. 릴케가 22세였던 1897년, 당시 36세인 루 살로메를 만나 곧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루와의 만남은 릴케의 인생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루는 릴케에게 연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모성애를 풍기는 여인으로서 그의 감성적 역량과 자질을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릴케 시의 세계에 많은 영감을 준 러시아를 소개해 준 사람이었다. 그들의 관계가 끝난 후에도 루는 릴케의 절친한 친구로 남아 있게 되었다.

1897년 5월 12일, 뮌헨의 소설가 야콥 바서만의 집에서 열린 다과 모임에서였다. 젊은 시인 릴케는 당대 멋진 여성의 대명사였던 루 살로메를 만나자마자 사랑의 거센 폭풍에 휘말려 들어갔다. 열네 살이나 연상이었지만, 아니 그러했기 때문에 루 살로메는 릴케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포근하면서도 따뜻한 모성의 여인이었다. 시원하면서도 강렬하고 자유분방한 그녀의 정신세계는 또한 릴케의 젊은 열정과 만나 불꽃을 튀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만나자마자 릴케의 가슴은 루 살로메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릴케에게 루 살로메가 각별했던 것은 그가 한 해 전에 읽은 그녀의 에세이 덕분이기도 했다. 루의 에세이 '유대인 예수'를 읽고 깊은 인상을 받은 릴케는 익명으로 그녀에게 몇 편의 시를 우송하기도 했다. 그녀의 에세이를 탐독하고 또 함께 했던 각별한 시간을 추억하는 젊은 시인에게 루도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는 급진전되어 금세 연인 사이가 된다.

릴케에게 루는 육체적인 관계를 넘어서는 정신적인 반려자였다. 그녀는 릴케에게 어머니로부터 받지 못한 모성적인 사랑의 제공자였고,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데 미숙한 시인에게 현실적인 길을 안내하는 정신적 후원자였다. 두 사람은 함께 공부하고 몇 차례에 걸쳐 여행을 떠나면서 정신적으로 더욱 가까워졌다. 루는 릴케에게 프리드리히 니체의 사상을 알려주었으며, 나아가 러시아 문학의 세계를 소개해 주었다.

루를 만난 후 릴케에게 두 가지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 우선 하나는 새로운 이름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1897년 빈의 한 잡지에 ‘르네 마리아 릴케(René Karl Wilhelm Johann Josef Maria Rilke)’라는 기존의 이름을 버리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작품을 게재한다. 이는 루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이후 릴케는 줄곧 이 이름을 쓰게 된다. 또 다른 변화는 릴케의 시 세계가 더욱 원숙해지게 되어 그는 이 무렵 초기 시의 미성숙한 단계를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내 눈빛을 꺼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아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내 팔을 부러뜨려주소서, 나는 손으로 하듯
내 가슴으로 당신을 끌어안을 것입니다.
내 심장을 막아주소서, 그러면 나의 뇌가 고동칠 것입니다.
내 뇌에 불을 지르면, 나는 당신을
피에 실어 나르겠습니다.
-루 살로메에게 헌정한 ‘기도시집’의 제2부에서-

릴케에게 이다지도 큰 영향을 끼친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녀는 1861년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미모에 지적 편력이 더해져 평범한 여자가 될 수 없는 운명이었다. 21세 때 스위스로 건너온 루는 38세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와 역시 같은 시대의 철학자였던 33세의 파울 레를 만난다. 두 사람 모두 루에게 빠져들었으나 루는 레를 선택해서 동거에 들어갔다. 그러자 니체는 패배감과 상실감으로 오랫동안 고통스러워했다. 당시 니체는 실연의 아픔을 이기기 위해 열흘 만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Also sprach Zarathustra)'를 탈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레 역시 오래 가지 않아 루에게서 버림받고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한다.

루 살로메는 26세 되던 때 베를린의 문헌학자 프리드리히 칼 안드레아스 교수와 우정 관계를 전제로 결혼했으며, 28세에는 극작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과 사귀었다. 36세 때는 22세의 문학청년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만나 러시아 여행길에 나섰다. 루를 향한 릴케의 사랑은 온 영혼을 다한 것이었지만, 루는 릴케의 어두운 영혼을 오래 감당할 수 없었다. 그 뒤 루는 국제정신분석학회 바이마르 회의에서 프로이트를 만나 그 밑에서 정신분석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러다 프로이트의 제자 타우스크와 한때 열애에 빠지기도 했으나, 루는 타우스크를 버렸고 그 역시 루가 떠나자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이처럼 거침없는 남성편력으로 인해 그녀를 남자를 파멸시키는 팜므파탈이었다는 부정적 평가도 없지 않다. 그러나 루는 사랑과 성을 남녀의 인생을 잡아끄는 커다란 자력의 운명적 힘으로 여겼고, 그러면서도 사랑과 성에 자신을 구속시키지 않은 자유의 여신이었다는 평가가 대세를 이룬다.

릴케에게 있어 많은 사랑의 경험은 그의 문학생활에 커다란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다양한 여인들과의 사랑이 가능했던 것은 그만큼 많은 곳을 떠돌아다닌 덕분이기도 하다. 실제 릴케는 수많은 곳을 여행했다. 그는 여행을 통해 많은 시적 영감을 얻게 된다. 특히 12년간 살았던 프랑스, 두 차례에 걸쳐 루와 함께 여행했던 러시아, 만년에 정착해 7년여 살았던 스위스는 ‘자신이 선택한 또 하나의 조국’이라고 표현했다.

러시아는 비록 두 차례의 여행을 한 것이 전부이지만 그 어떤 지역보다 릴케에게 깊은 인상과 결정적인 체험을 하게 해준 곳이었다. 루 살로메와 함께 1899년 봄에 처음으로 러시아를 방문했으며 다음해인 1900년 여름 다시 그곳을 여행했다. 여기서 그는 내면적인 깊이를 더해 나가는 계기를 접하게 된다. 러시아는 릴케의 내면세계에 원초적이며 거의 종교적인 감동을 불러일으켰던 곳이다.

릴케는 만년에 스위스에 정착해 살다가 1923년 12월 29일 51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그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아름다운 론 강 계곡에 위치한 자신의 거처지 뮈제트 성으로 찾아온 이집트 여자 친구를 위해 장미꽃을 꺾다가 가시에 찔린 것이 원인이 되어 패혈증으로 고생하다 죽었다는 설이 그 하나이다. 또 다른 하나는 릴케가 백혈병을 앓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모른 채 죽음을 맞았다는 것이다. 그의 시신은 이듬해 1월 2일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유언에 따라 거처지 인근에 위치한 라롱의 언덕 위 교회 옆에 묻혔다. 묘비에는 릴케 자신이 직접 작성한 묘비명이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누구의 잠도 아닌 기쁨이여
(Rose, oh reiner Widersprluch, Lust
niemandes Schlaf zu sein unter soviel Lidern.)”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뉴스핌 베스트 기사]

사진
尹 지지율, 2.6%p 오른 32.7% …김건희 논란 사과 긍정 영향 [서울=뉴스핌] 박성준 기자 =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이 소폭 상승해 30%대 초반을 기록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16일 발표됐다. 이재명 대표와의 영수회담과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김건희 여사 논란에 대해 사과한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종합뉴스통신 뉴스핌 의뢰로 여론조사 전문업체 미디어리서치가 지난 13~14일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15명에게 물은 결과 윤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긍정평가는 32.7%로 집계됐다. 부정평가는 65.0%로 나타났다. '잘 모름'에 답한 비율은 2.3%다. 윤 대통령이 지난 9일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배우자 김건희 여사의 명품 가방 수수 의혹에 처음으로 사과하는 등 자세를 낮췄지만, 지지율은 2.6%p 상승하는 데 그쳤다. 부정평가는 1.7%p 하락했다. 긍정평가와 부정평가 간 격차는 32.3%포인트(p)다. 연령별로 보면 40대에서 긍·부정 평가 격차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만 18세~29세에서 '잘함'은 29.3% '잘 못함' 68.7%였고, 30대에서는 '잘함' 31.5% '잘 못함' 65.9%였다. 40대는 '잘함' 25.6% '잘 못함' 73.2%, 50대는 '잘함' 26.9% '잘 못함' 71.8%로 집계됐다. 60대는 '잘함' 34.9% '잘 못함' 62.5%였고, 70대 이상에서는 '잘함'이 51.8%로 '잘 못함'(43.7%)보다 높게 나타났다. 지역별로는 서울 '잘함' 27.8%, '잘 못함'은 70.8%로 집계됐다. 경기·인천 '잘함' 32.6% '잘 못함' 65.9%, 대전·충청·세종 '잘함' 36.0% '잘 못함' 61.0%, 부산·울산·경남 '잘함' 40.3% '잘 못함' 58.0%로 나타났다. 대구·경북은 '잘함' 43.8% '잘 못함' 51.7%, 전남·광주·전북 '잘함' 16.0% '잘 못함' 82.2%로 나타났다. 강원·제주는 '잘함' 31.6% '잘 못함' 60.1%로 집계됐다. 성별로도 남녀 모두 부정평가가 우세했다. 남성은 '잘함' 28.8% '잘 못함' 68.9%, 여성은 '잘함' 36.5% '잘 못함' 61.3%였다. 김대은 미디어리서치 대표는 윤 대통령 지지율 상승 배경에 대해 "취임 2주년 기자회견과 김건희 여사 의혹 사과 이후 소폭 반등 했다"면서도 "향후 채상병 및 김 여사 특검, 의대정원 문제, 민생경제 등 현안에 대해 어떻게 풀어갈지에 따라 지지율이 달라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차재권 부경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영수회담, 기자회견, 김 여사 논란 사과 등으로 지지율이 소폭 상승했다"면서도 "보여주기식 소통이 아니라 국정운영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지지율은 상승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번 여론조사는 성·연령·지역별 인구비례 할당 추출 방식으로 추출된 표본을 구조화된 설문지를 이용한 무선(100%) ARS 전화조사 방식으로 실시했으며 응답률은 2.8%,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p다. 통계보정은 2024년 1월말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통계를 기준으로 성별 연령별 지역별 가중 값을 부여(셀가중)했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parksj@newspim.com 2024-05-16 06:00
사진
한중, FTA 2단계 협상 재개키로...서비스·문화·관광·법률까지 개방 확대 [서울=뉴스핌] 김승현 기자 = 우리나라와 중국이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2단계 협상을 재개키로 합의했다. 그간의 상품 교역 분야 시장 개방을 넘어 서비스 분야에서 문화, 관광, 법률 분야까지 양국 간 개방을 확대한다. 또한 양국 외교부와 국방부가 참여하는 '외교안보대화'를 신설해 다음달 첫 회의를 개최키로 했다. 이밖에 중단됐던 한중 투자협력위원회를 13년 만에 재개하며 올 하반기에 한중 공급망 협력‧조정 협의체와 한중 수출통제 대화체도 개최키로 했다. [서울=뉴스핌] 윤석열 대통령이 26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에서 리창 중국 총리와 회담에 앞서 악수하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대통령실]2024.05.26 photo@newspim.com 김태효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1차장은 이날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브리핑을 열고 윤석열 대통령과 리창 중국 총리와의 양자 회담 결과를 설명했다. 김 차장은 "윤 대통령은 먼저 '어떤 대내외 환경 속에서도 한중 양국이 소통을 지속해나가는 게 필요하다. 그래야만 서로 존중하면서 공동 이익을 추구하고 역내 평화와 번영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다'고 제안했고 이에 대해 리창 총리는 '오늘 같은 유익한 대화가 이어지길 바란다. 중국은 한국의 좋은 친구, 좋은 이웃, 좋은 동반자가 되고 싶다. 앞으로 한중 우호 관계를 계속 발전시키고 상호 신뢰 관계를 제고했으면 좋겠다'고 화답했다"고 말했다. 김 차장은 "우선 고위급 한중 외교안보대화를 신설해서 6월 중순 첫 회의를 개최한다. 외교부와 국방부 당국 간 2+2 협의체라고 볼 수 있는데 외교부 차관과 국방부 국장급 관료가 참석하게 된다"며 "한중 외교안보대화를 새로 출범시키면서 그동안 있었지만 뜸했던 대화체도 하반기에 다시 이어나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김 차장은 "경제 협력 분야, 투자 분야에서 한중 투자협력위원회가 13년째 중단됐는데 다시 재개하기로 했다"며 "한국 산업부, 중국 상무부 간 장관급 협의체로서 양국 간 무역, 투자 활성화에 기대를 걸어도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특히 양국 간 투자, 기업 활동을 얘기하면서 윤 대통령은 리창 총리에게 '우리 기업들이 중국에 보다 활발히 투자하고 이미 가 있는 기업들이 보다 안심하고 기업 활동을 펼 수 있도록 글로벌 기준, 스탠다드에 맞는 경제, 투자 지원정책이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했고 여기에 대해 리 총리는 '법치에 기반한 시장화를 계속 추진하겠다. 국제화를 더욱 더 높여나가겠다'고 화답함으로서 한국 기업에 대한 배려 지원 의지를 피력했다"고 말했다. [서울=뉴스핌] 윤석열 대통령이 26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에서 리창 중국 총리와 회담을 하고 있다. [사진=대통령실]2024.05.26 photo@newspim.com 대통령실에 따르면 양국은 경제·통상 관련 한중 간 경제 협력이 서로의 경제와 민생에 기여하는 중요한 원동력이라는 데 공감하면서, 양국 간 교역·투자를 더욱 활성화하기 위해 2011년 이후 중단된 '한중 투자협력위원회'를 13년 만에 재개하기로 했다. 또한 FTA 수석대표회의를 6월 초 개최해 한중 FTA 후속협상의 동력을 다시 살려 나가기로 했다. 이밖에 올해 하반기 '한중 공급망 협력‧조정 협의체' 개최, '한중 공급망 핫라인' 수시 가동, '한중 수출통제 대화체' 출범 등을 통해 원자재와 핵심광물의 수급 등 안정적 공급망 관리를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 양측은 올해 하반기에 제2차 '한중 경제협력교류회'를 개최해 양국 기업인들과 중앙, 지방 정부 관계자들 간의 교류와 협력도 촉진해 나가기로 했다. 윤 대통령과 리 총리는 한중 간 항공편과 인적 교류 규모가 회복되고 있는 만큼, 앞으로 양국 간 인적 교류를 더욱 활성화해 나가자고 했다. 양측은 마약·불법도박·사기(피싱) 등 초국경 범죄 대응을 위해 경찰 기관 간 협력을 강화해 국민 안전을 실질적으로 증진시켜 나가기로 하는 한편, 한중 인문 교류 촉진위원회를 재가동하고, 코로나로 중단되었던 양국 청년 교류 사업을 재개해 나가기로 했다. kimsh@newspim.com 2024-05-26 18:58
안다쇼핑
Top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