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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문학의 품격을 높인 대문호, 괴테

기사입력 : 2017년08월09일 11:30

최종수정 : 2017년08월10일 09:29

예술보다 사랑, 사랑보다 예술(2)

서울 남산에 위치한 주한 독일문화원 '괴테 인스티튜트' 전경 <사진=이철환>

“발하임으로 이주한 지식인 베르테르는 무도회에서 처음 만난 로테에게 한눈에 반한다. 베르테르는 로테에게 접근하여 친교를 맺고 집을 왕래할 정도로 그녀와 가까워진다. 로테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커져갈 무렵 갑작스레 로테의 약혼자 알베르트가 발하임으로 돌아오면서 베르테르는 크게 실망한다. 베르테르는 알베르트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지만 로테를 향한 연정이 깊어지면서 베르테르는 알베르트와도 불편한 관계가 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던 베르테르는 로테를 잊고자 발하임을 떠나보기도 했지만, 귀족사회의 퇴폐적이고 퇴영적인 모습에 좌절하여 다시 발하임으로 돌아온다. 이미 유부녀가 되어버린 로테의 주위를 맴돌며 베르테르는 고통스러워하고, 로테는 베르테르에게 친밀감과 호감을 느끼면서도 남편을 위해 베르테르와 거리를 두고자 한다. 결국 베르테르는 로테에게 구애하며 키스를 시도하고, 당황한 로테는 베르테르와의 절교를 선언한다. 절망에 빠진 베르테르는 알베르트에게 빌린 총으로 스스로의 머리를 쏘아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젊은 지식인 베르테르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줄거리다. 이는 베르테르가 친구 빌헬름에게 편지로 고백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는데, 그 편지는 1771년 5월 4일에 시작해서 1772년 12월 20일까지 이어진다.

1774년 발표된 이 작품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당시 유럽의 많은 젊은이들이 주인공 베르테르처럼 옷을 입고 다니는가 하면, 작품 속 베르테르의 자살을 모방해서 자살을 감행한 사람이 2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러한 베르테르식 열병을 우려한 나머지 소설은 1775년 판매금지 당하기도 했다.

이후 유명인의 자살을 모방하여 자살하는 현상을 일컬어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라고 부르고 있다. 완성에 거의 60년이 소요된 그의 대표작 '파우스트'조차도 이 작품의 인기를 넘어서지 못하였다. 그러나 정작 괴테는 자신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작가로만 기억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독일 '질풍노도(Sturm und Drang)'운동과 바이마르 고전주의 운동의 지도자였고, 유럽에 낭만주의를 확산시킨 장본인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모국어인 독일어를 국제사회에서 인정받는 언어로 끌어올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독일어는 '짐승의 언어'라고 불릴 정도로 아주 천대받고 있었다. 당시 유럽사회에서 통용되는 언어는 불어와 영어뿐이었다. 그러나 괴테의 작품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하자 독일어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괴테는 또 문학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걸쳐 학식을 지닌 천재였다. 생물학, 해부학, 지질학 등 과학 분야에서 14권의 저서를 펴냈고, 화가로서 3천점에 이르는 그림을 남겼다. 이러한 그의 업적과 영향력을 기려 독일 정부는 자국문화를 널리 알리기 위해 다른 나라에 세우는 해외문화원의 명칭을 '괴테 인스티튜트(Goethe Institut)'라고 지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는 174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불어, 영어, 이탈리아어 등을 배웠고, 그리스·로마의 고전 문학과 성경 등을 읽었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시를 써서 조부모에게 선물할 정도로 문학적 재능을 드러냈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1767년에 첫 희곡 '연인의 변덕'을 썼다. 대학 졸업 후 법률 사무소에서 견습생으로 있던 중 약혼자가 있는 샤로테 부프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때의 체험을 소설로 옮긴 것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괴테는 1775년 바이마르로 이주하여 그곳을 문화의 중심지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행정가로 국정에 참여해 다양한 성과를 거두었고, 식물학, 해부학, 광물학, 지질학, 색채론 등 인간을 설명하는 모든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다. 1786년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고전주의 문학관을 확립했고, 1794년 시인이자 극작가인 프리드리히 실러를 만나 함께 독일 바이마르 고전주의를 꽃피웠다.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건축· 회화· 조각 등 고대 조형예술에 커다란 감명을 받았다. 특히 회화에 관심을 가지고 화가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1천점에 이르는 스케치를 그렸다. 그리고 이 여행은 예술가로서의 괴테 생애에서 고전주의로의 지향을 결정한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실러와의 상봉은 그의 문학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종합적이고 직관적인 괴테와 이념적이며 분석적인 실러와의 문학적인 친교는 1805년에 실러가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서한은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가장 귀중한 자료로 여겨진다. 괴테의 대표적인 교양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도 이 시기에 출간되었다.

실러의 죽음으로 괴테는 큰 충격에 빠지지만 이후에도 창작과 연구 활동을 끊임없이 이어갔다. '시와 진실' 등 일련의 자서전을 저술하기 시작하는 한편, 이미 착수했던 창작의 완성에 힘썼다.

괴테의 작품들은 대부분 그의 체험을 통해 이루어진 것들이다. 그는 독일과 프랑스의 7년 전쟁, 프랑스대혁명, 나폴레옹 점령기와 몰락 과정도 지켜보았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체험하지 않은 것들은 한 줄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줄의 문장도 체험한 것 그대로 쓰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런 말도 남겼다. “눈물과 더불어 빵을 먹어 보지 않은 자는 인생의 참다운 맛을 모른다. (Who never ate his bread in tears, Who never lay awake for hours Plagued by doubts and fears, Knows you not, you heavenly powers!)”

괴테는 수많은 여성들과 사랑을 나누었다. 여성은 괴테에게 남성의 영원한 인도자요 창조적 삶의 원천인 동시에, 정신과 영혼의 가장 숭고한 노력의 구심점이었다.

그의 첫사랑은 스물한 살의 나이에 만났던 프리데리케 브리옹이라는 시골처녀였다. 그녀는 첫사랑이기에 괴테의 여러 작품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인물이다. 괴테는 잠든 프리데리케를 깨울 때도 자신이 쓴 시를 낭송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순수한 사랑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괴테는 점차 그녀에게 흥미를 잃어가게 된다. 이후 괴테는 그녀에 대한 죄책감을 평생 가지고 살았다고 한다. 그의 작품 '파우스트'에 드러난 ‘순진한 처녀를 괴롭힌 것에 대한 죗값’은 프리데리케에 대한 죄책감의 투영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두 번째 사랑은 그 유명한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탄생하게 한 샤로테이다. 법률 사무소에서 견습생으로 있던 1772년 괴테는 19세의 샤로테 부프라는 처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 시기는 프리데리케와 헤어진 지 1년도 되지 않던 때였다. 그러나 새로운 사랑 또한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샤로테에게는 이미 결혼을 약속한 약혼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이들의 사랑은 괴테의 작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형상화된다. 이 작품 출간연도가 그들의 첫 만남으로부터 2년 뒤인 1774년이며, 주인공의 이름이 '로테'인 것 또한 이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즈음 친구 아내를 사랑하다 자살한 예루살렘이란 사람에 대한 뉴스는 괴테가 이 소설을 쓸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그래서 펜을 든 지 불과 4주 만에 작품을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괴테를 일약 최고의 문필가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괴테는 그때부터 독일적 인간 사상해방 문학운동인 '질풍노도'의 중심인물로서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게 된다.

샤로테 부프에 대한 사랑이 허망하게 끝난 뒤에도 그의 여성편력은 지속되었다. 바이마르 공국에서 공직생활을 할 무렵, 괴테는 유부녀인 샤로테 폰 슈타인 부인을 만났고 그 관계는 12년 동안이나 이어진다. 그는 샤로테 부인과의 만남 속에서 인간적 및 예술적 측면에서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부인을 향한 애정과 동경, 질풍노도의 격정을 극복하고 절도를 지키며 체념하는 과정을 통해 내면의 평정을 찾고 인간으로서 원숙해 갔다. 그러나 이 둘의 애정관계도 1786년 괴테가 이탈리아 여행에 오르면서 끝을 맺게 된다.

그 뒤 1788년 이탈리아 여행을 끝내고 바이마르에 돌아온 괴테는 가난한 집안의 딸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이 결혼을 통해 비로소 가정적인 행복을 누리게 되지만 얼마 후 아내 불피우스가 죽자 사랑의 불길은 또 다른 여인에게로 향한다. 아내가 죽은 지 얼마 후 빌레머 부인을 만나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고, 그녀를 사모해 읊은 '서동시집(西東詩集)'이 간행되었다.

괴테의 여성 편력은 그의 나이 72세가 되어도 그치지 않았다. 1821년 여름, 그는 피서여행 차 체코 지방의 마리엔바트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알게 된 17세의 처녀 울리케 폰 레베초를 사랑하게 되었다. 주변에서는 55세의 나이차가 있는 이 사랑에 대해 냉소적이었다. 정신이 혼미해진 노인네의 추태 정도로 여겼다. 그러나 정작 괴테 자신은 매우 진지했다. 당시 울리케는 괴테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다. “그(괴테)는 아침에 산책을 나갈 때면 거의 매일 나를 데리고 갔다. 그런데 나는 함께 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도 그는 나에게 꽃을 가져다주곤 했다. 그는 문 앞 긴 의자에 앉아 온갖 것에 대해 몇 시간이고 나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가 대단한 학자이기 때문에 나는 그를 신뢰했다.”

괴테는 그녀를 알게 된 지 2년이 되던 해 청혼을 하였는데, 청혼하기 전 의사에게 건강진단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청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크게 상심한 괴테는 그 연모의 정을 '마리엔바트의 비가'라는 시집에 담게 된다. 그는 여기서 이렇게 읊었다. “울리케로 인해 나의 탄식은 멈추었다.”

괴테는 인생의 모든 것은 사랑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 로맨티스트였다. 그래서 끊임없이 사랑하고 시를 쓰며 편지를 보냈다. 괴테는 자신의 삶을 세단어로 표현했다. “사랑했노라, 괴로워했노라, 그리고 배웠노라.”

사랑을 통해 아파하고 고뇌하며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던 시인 괴테. 그는 스물네 살에 구상하기 시작하여 생을 마감하기 바로 한 해 전에 완성한 역작 '파우스트'를 마지막으로 1832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바이마르 대공가(大公家)의 묘지에 대공 및 실러와 나란히 안치되어 있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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