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담사 가는 길은 하얀 눈이 얼어있었다. 대절(貸切) 버스는 얼음 위 강아지처럼 쩔쩔매며 미끄러져 갔다. 버스에서 내리니 휘∼잉 칼 바람이 불었다. 백담사 계곡을 걸었다. 발이 눈에 푹푹 빠졌다. 앞일에 대한 설렘 반 두려움 반인 마음이 칼바람 속에서 요동쳤다. 숙소로 돌아오니 멋스러운 남자 한 명이 가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맑은 기운이 전해져 왔다. 소설 〈토지〉에 나오는 ‘이용’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소설 〈토지〉를 열세 번 째 읽고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삭힌 삶에서 나오는 사람 향기를 맡는다. 무당의 딸 월선이가 사랑하는 이용의 팔을 베고 낮 설은 중국 용정 땅에서 죽을 때 지은 평온한 미소의 향기를.
홍윤기는 풍류가 있는 멋스러운 남자다. 수원 태생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 동아리 풍물 반에 들어간 것이 인연이 돼 사물놀이 길을 걷고 있다. 뼛속까지 장구, 꽹과리, 징, 북이 들어있는 타악 주자다. 현재는 사물놀이 한울림 예술단 단장이다. 사물놀이 창시자 김덕수, 이광수로부터 장구를 배웠다.
1978년 서울 종로구 계동에 자리 잡은 〈공간〉에서 새로운 예술이 탄생했다. 이른바 사물놀이다. 남사당패 출신의 젊은 풍물꾼 이광수, 김덕수, 김용배, 최종실이 그 주인공이다. 각자가 1개의 타악기를 가지고 연주하는 형식이었다. 이광수는 북, 김덕수는 장구, 김용배는 꽹과리, 최종실은 징을 쳤다. 타악기만으로 치는 연주였다. 그러나 그 효과는 놀라웠다. 하늘의 소리인지 사람의 소리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어안이 벙벙했다는 말이 딱 맞았다. 이 놀라운 예술의 형태는 곧 전국으로 번졌다. 그리고 미국, 일본, 프랑스, 홍콩, 캐나다, 독일, 영국, 스위스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수백회의 공연을 가졌다. 사물놀이 패가 다녀간 곳에는〈사물로리안(Samullorian)〉이라는 팬클럽이 생기기도 했다. 우리 민족의 긍지를 한껏 높여 주는 세계적 예술로 발돋움한 것이다.
홍윤기가 어렵게 시간 내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사무실을 찾은 시각은 중화참이 좀 안된 시각이었다. 어깨에 가방을 메고 들어오는 모습이 여유로워 보였다. 따끈한 차 한 잔을 놓고 도란도란 국악 이야기로 말 머리를 풀어갔다. 국악이 좋아서 사물놀이 길을 가는 그의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첫 질문을 장구로 던졌다. “지난번 김덕수 선생님 광대 60년 공연 때 보니 장구를 신명나게 쳤습니다. 타악기가 많은데 왜 장구를 선택했습니까?”
“김덕수 선생님과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사제지간의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 때부터 장구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장구는 모든 타악기의 중심입니다. 게다가 양손으로 치는 것이 매우 매력적이었습니다. 소리 또한 어느 타악기보다 가슴을 울립니다. 하늘 소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장구를 이광수, 김덕수 두 분으로부터 배웠습니다. 25년 장구를 쳤습니다. 이제 좀 감이 옵니다. 감이라는 것은 시김새를 의미합니다. 뭐랄까요. 손맛이라고 할까요. 뭐 그런 것이 옵니다. 모습을 안보고도 음원만 들어도 ‘아! 저 장구소리는 누가 치는 것이다.’라는 것을 금방압니다.
이광수 선생님 장구 맛은 끈적끈적하고 정겹습니다. 엄마같이 편합니다. 김덕수 선생님은 아버지 같습니다. 넓고 씩씩합니다. 서양 맛이 납니다. 표준 맛이 납니다. 김청만 선생님 장구 맛은 구성집니다. 장구 소리는 그 사람의 구음 소리와 같습니다. 입장단과 같습니다. 장구 소리는 그 사람만의 특질, 성격 이런 것이 고스란히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장구에 미치는지도 모릅니다.
첫 질문을 던지자 낙궁장단 떨어지듯 좌르르르 말을 쏟아냈다. 말소리가 장단타고 흘렀다. 가락도 흘렀다. ‘역시 광대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꼬리를 확 잡아채 아픈 질문을 던졌다. “먹고 살기 괜찮습니까? 국악하시는 분들 중 문화재 보유자급 선생님들 일부를 제외하고는 배고프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허덕이는 정도는 아니라서 만족합니다. 공연만 갖고는 먹고살기 힘듭니다. 개인 교육을 통해서 어느 정도 밥벌이를 하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국악인들이 개인 교육을 통해 경제활동을 보태고 있습니다.”
그는 양평에서 살고 있다. 중앙선을 타고 서울로 출퇴근하고 있다. 사람을 좋아해서 어떤 모임도 가타부타 하지 않고 참석한다. 그리고 늦도록 술 마시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중앙선 막차만큼은 놓치지 않고 탄다. 그만큼 자기 관리가 철저하다. 그런 그에게 현존하는 타악 주자 중 누가 최고냐고 물었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문화재급 선생님을 제외하고는 〈진쇠〉라는 팀의 상쇠〈김복만〉이 아닌가 합니다. 고(故) 김용배 선생님 제자이기도 합니다. 입장단이 매우 좋습니다. 그러니 덩달아 꽹가리 타법이 좋습니다. 꽹가리는 작은 악기이지만 정말 다루기 힘든 악기입니다. 쇠가 원래 날카롭기 때문에 다루기 어렵습니다. 이런 쇠를 김복만은 떡 주물 듯 다룹니다. 쇠를 잘 다스리는 사람이 최고입니다.”
홍윤기는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타악 주자다. 그래서 장단에 대해 평소 궁금한 점을 물었다. “웃다리, 아랫다리가 뭡니까?”
“서울, 경기도, 충청도 북부 지역 풍물을 웃다리 풍물이라고 합니다. 충청도 남부, 전라도, 경상도 풍물을 아랫다리라고 합니다. 웃다리가 되었든 아랫다리가 되었든 그 지역만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구는 호남 우도 가락이 기본입니다. 호남 좌도는 굳셉니다. 우도는 섬세하고 여립니다. 제가 볼 때 유랑하면서 호남에서 배운 장단을 각 지역으로 가지고 가 그 지역만의 특색 있는 장단을 만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같은 장구, 같은 장구채지만 치는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이러한 것이 모여 웃다리 장단, 아랫다리 장단으로 발전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요즘 공연이 부쩍 줄었다 한다. 예년에 비해 50% 정도 줄어든 것 같다고 했다. 그만큼 경제사정이 나쁘기 때문에 공연이 준 것이다. 공연 횟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내내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분위기 반전이 필요해 〈비나리〉 소리를 청했다.
벌떡 일어나 장구채를 잡았다. 목을 쥐었다 폈다 하며 소리를 뽑아냈다. 고압, 저압의 소리가 향기 되어 흩어졌다.
“천개우주 하늘 되고, 지개조축 땅 생길 때 국태민안 범연자 시화연풍 돌아들 때 2015년 을미신년을 맞이하여 각 가정에 축원 덕담 발원이오. 명일랑 주시려면 삼천갑자 동방석에 기나긴 명을 점지하시고, 복일랑 주실라면 대국부자 왕개석승에 복을 주니 만복은 받았거니와 만고액살 제쳐줄 때 삼재팔난 관재구설 우환질병 잡귀귀신 일체액살을 휘몰아다가 금일정성 대를 바쳐 원강에 소멸하니 만사가 대길하고 백사가 여일하고 마음과 뜻과 잡순대로 소원성취 발원이라....”
홍윤기의 비나리 내용대로 을미년 한해 뉴스핌 애독자 여러분 모두에게 대박 나길 기도한다.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 (02-794-8838, sm290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