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경(詩經)에서 이르기를 ‘아자(雅者)는 정야(正也)라’ 했다. 우리말로 옮겨 쓰면 ‘아(雅 : 바르다, 우아하다)라는 것은 바르다.’는 것이니, 이는 음악의 노래를 바르게 함이다.
국악은 궁중악과 민속악으로 구분한다. 궁중악을 다른 말로 아악(雅樂) 또는 정악(正樂)이라고 한다. 위에서 살펴본 시경에서 이 말을 빌려 썼다. 왕이 주관하여 잔치하고 제향 올리는 음악은 소아정(小雅正)이라고 한다. 왕이 신하들과 조회할 때 울리는 음악은 대아정(大雅正)이라고 한다.
소아정(小雅正)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은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다. 2001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걸작에 최초 등재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종묘대제는 사계절과 매년 말(末) 등 1년에 다섯 번 제사를 지냈다. 지금은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문화재청와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주최로 봉행한다.
종묘제례악에는 여러 가지 악기가 쓰인다. 그 중 중심 악기가 편종(編鐘)과 편경(編磬)이다. 편종은 쇠로 만들었다. 편경은 돌로 만들었다. 편경과 편종을 유율(有律) 타악기(打樂器)라고 한다. 음의 높낮이가 있다는 뜻이다. 반면 음의 높낮이가 없는 북, 장구, 징, 괭가리는 무율(無律) 타악기다.
국가에서는 지난 2012년 편종ㆍ편경 제작 기술을 보유한 김현곤을 국가 중요문화재 제42호 악기장으로 처음 지정했다. 김 악기장을 찾아가던 날은 맑고 깨끗했다. 종로 3가역 6번 출구로 나가 창덕궁 방향으로 100여 미터 걸어가면 연악사(硏樂社)라는 국악기 판매점이 나온다. 대한민국의 국악기 점은 모두 이 국악거리에 몰려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연악사(硏樂社).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국악기 판매점이니 잔치 연(宴)이나 제비 연(燕)자를 쓸 것 같은데 갈(또는 궁구) 연(硏)자를 썼다. 김현곤 악기장 말에 따르면 젊은 시절 충무로에서 서양악기점 사원으로 근무할 때 신의주 출신 사장 문태민이 만든 계모임 성격의 연악회(硏樂會)에서 그 이름을 땄다고 했다. 이 연악회(硏樂會)에는 한 시절 주먹으로 풍미(風味)한〈시라소니(본명 이성주)〉도 있었다 한다. 악기장의 동공이 극장 되어 그 옛날 젊은 시절이 필림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김현곤 악기장은 1935년 전북 순창에서 유교적 가풍의 중농(中農) 집안에서 태어났다. 순창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공부하기 위해 무작정 올라왔다. 처음으로 자리 잡은 곳이 충무로에 있는 서양악기점 연악사(硏樂社)였다.
이봉조(색소폰), 엄토민(엄앵란 삼촌, 색소폰), 박시춘, 황해, 백설희, 박철희(드럼) 등 당대 최고의 연예인들이 이곳을 출입했다.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자리에는 미군 PX가 있었다. 거리엔 미군들이 넘쳐났다. 연예인들과 미군들이 뿌리는 지폐가 거리에 흩날렸다.
어느 연예인은 악기를 팔아 마약을 했다. 그러면 연악사 사장 문태민은 사재를 털어 악기를 다시 사 연예인에게 돌려줬다. 그런 연예인을 가두는 형무소가 충무로 필동에 있었다. 마약을 하지 않으면 닭 병 걸린 것처럼 콧물을 질질 흘리며 흐리멍덩하던 사람이 마약 형무소를 갔다 오면 살이 찌고 눈이 똘방똘방해져 나왔다. 대다수의 마약 연예인들이 나오자마자 ‘딱 한 번만 더 하고 진짜 끊겠다.’하며 마약에 다시 손을 대 인생이 거덜 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는 서울 4대 공립고등학교(경기고, 경복고, 서울고, 용산고)중 하나였던 용산고등학교를 시험 쳐 떨어지고 선린상고에 진학했다. 주간엔 일하고 야간엔 학교를 갔다. 천부적으로 절대 음감을 가지고 있는데다, 손재주까지 뛰어난 그는 어느 덧 연예인들 사이에 악기 수리 명인으로 소문나기 시작했다. 아코디언, 피아노, 기타, 색소폰 등 못 고치는 것이 없었다. ‘전라도 하와이’란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밤잠안자며 치열하게 일했다.
그러던 중 잠시 고향으로 낙향했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서양 악기점을 차렸다. 음악다방이 유행하기 시작할 때였다. 은하수, 돌체, 르네상스 가 인기 절정을 이뤘다. 악기가 잘 팔렸다. 돈을 쓸어 담았다. 종로 3가에 건물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벌었다. 하지만 돈 관리를 못했다. 버는 대로 명동으로 어디로 돌아다니며 썼다.
황홀한 열정기가 펼쳐질 때 10살 아래 고향 처녀와 결혼했다. 부인은 답십리 미주상가에서 피자, 햄버거 장사를 했다. 깨소금 같은 신혼의 재미와 돈 버는 재미가 겹쳐졌다. 세상이 모두 아름다워 보였다. 이럴 즈음 악기 제작에 직접 나섰다. 1960년 중반 교재용 악기로 실로폰, 탬버린, 리코더, 드럼, 비브라폰 등을 만들기 시작했다. 전문가 수준은 아니었지만 우리나라 최초로 세계 악기 제작을 한 것이다. 수출용 악기도 만들었다. 멜로디언을 제작하다 집 한 채 값도 날렸다.
거침없는 삶을 살던 중 40대 중반에 국악과 인연을 맺었다. 친구의 권유로 영등포에 있는 성락교회를 갔다가 성가대로 활동하던 한만영 교수(국립국악원장 역임)를 만난 것이다. 얼마 후 의정부 덕정리 악기공장 개원식에 참여한 한 교수가 “이것도 좋지만 국악 일도 좀 합시다.”고 제안한다. 세종문화회관 개관식 때 연주될 정악단의 ‘방향’ 악기 제작을 의뢰한 것이다.
국립국악원에서 막상 금속악기 ‘방향’ 제작을 제안했지만, 기록도 없고 스승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불안했던 것이다. 하지만 ‘방향’과 원리가 비슷한 실로폰, 마림바, 차임 같은 서양악기를 수도 없이 만들고 있던 터라 자신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1984년 ‘방향’이 처음으로 탄생하게 된다.
그 무렵 유물로 물려받은 악기를 쓰고 있던 국립국악원에서는 우리 전통 악기의 복원이 시급한 과제였다. 그에게 전통악기의 복원과 개량을 의뢰하게 돼 지금까지 그 일을 하고 있다.
편경 만드는 돌을 구하기 위해 2년간 사비로 중국 일원을 누비고 다닌 것은 소설 같다. 세종실록에 나와 있는 편경 만드는 돌을 찾아 다녔지만 국내에서는 구할 수 없었다.(2000년 이후 경기 여주지역에서 남양옥을 발견하게 된다.)
중국을 찾았다. 연변으로부터 내몽고, 원난, 화베이, 저장, 둔황까지 2년간 돌아다녔지만 허사였다. 이 때 지금의 돈으로 환산하면 10억 원은 족히 썼다. 까만 경석(磬石)을 찾아냈지만, 국악원측에서 옥돌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해 사용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귀국하다 우연히 공항 면세점에서 옥으로 만든 ‘건신구(손으로 만지며 가지고 노는 것)’를 보니 경석(磬石) 재질이었다. 그 길로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진평이라는 곳에서 재료를 구입할 수 있었다.
서양악기는 기록에 나와 있는 대로 제작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의 악기는 연주자마다의 제(制)와 류(流), 바디가 있어 악기가 다 다르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악기의 음과 청이 달라도 연주 때의 화음은 같다. 놀라운 우리 악기의 과학이다.
대한민국에서 그를 2012년 4월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42호 편종ㆍ편경 악기장으로 지정했다. 악기장의 나이가 80이다. 아직도 그는 배고 고프다. 꿈이 있고, 희망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다.
전수회관을 건립해야 해야 하고, 아직도 복원하지 못한 악기를 복원해야 한다. 전수회관 건립지를 물색하고 있지만 흔쾌히 나서는 지자체가 없어 고민(건립지가 확정되면 국비 50%, 지방비 50%로 건립)이다. 문화재로 지정됐지만 전수하겠다는 사람이 나서지 않는다. 힘들기만 하고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아들 김민종이 전수 장학생으로 업을 이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는 꿈을 꾸고 있다. 꿈은〈세계 악기 박물관〉이다. 대륙별, 악기별 전시관을 꾸미고 체험할 수 있는 교육장을 만들고, 실크로드를 따라 악기가 전파된 역사를 재현하는 것이다. 꿈은 이미 10년 전부터 시작됐다.
긴 인터뷰를 마치고 낙원상가 삼계탕 집에서 함께 저녁을 했다. 거나하게 밥을 먹고 배를 쓰다듬으며 나오는 나에게 김현곤 악기장이 힘주어 말했다.
“세계 악기 박물관은 막연하게 해 보겠다고 하는 소리가 아니고, 꼭 해보고 싶고, 할 것이다.”
역사가 숨 쉬는 인사동 위로 싸라기 같은 별빛이 쏟아져 내렸다.
김현곤! 그는 꿈 많은 젊은 옹(翁)이었다. 그가 있어 대한민국의 혼(魂)과 얼이 살아서 역사의 강을 만들고 있다. 그를 존경하는 마음이 벌떡였다. 그의 꿈이 이루어지길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참 감동적인 인터뷰였다.
변상문 전통문화연구소장 (02-794-8838, sm290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