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끝자락 날씨가 훈훈했다. 고석진 북 명인과의 약속장소로 향하는 차창 밖에는 한강 물이 물컹한 비린내와 함께 넘실댔다. 예술의전당 앞 삼거리엔 사람과 차들로 북적였다. 대개의 공공기관 건물이 그렇듯, 예술의전당도 사람 향기 보다는, 딱딱한 돌덩이로 만든 무덤 같이, 혼이 없어 보였다.
약속 장소인 오페라 극장 1층 찻집 푸치니 통로에는 온통 영어로 된 안내 간판들이 정신을 어지럽게 했다. 찻집 입구에 놓여 있는 홍보물을 집어 들었다. 영·유아 및 초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들을 대상으로 하는 ‘좋은 부모 교육’ 자료집이었다. 유럽풍 의상을 입은 엄마와 소녀가 사진으로 박혀있었다. 씁쓸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리의 혼이 그리웠다.
고석진 북 명인을 처음 만났을 때 그의 북 소리는 나를 몽환상태로 몰아넣었다. 곱슬곱슬한 머리, 강렬한 눈 빛, 긴 턱 수염, 팔작지붕 같은 어깨선, 길 가다가 멈춘 것처럼 보이는 절묘한 기하학적 다리 모양에서 뿜어져 나오는 북소리는 풍류 그 자체였다. 북소리는 사람의 심장을 뛰게 한다. 그런데 고석진의 북소리를 보고 듣고 있노라면 심장이 뛰는 정도가 아니라 심장이 목젖 밖으로 튀어 나오는 것 같다.
고석진은 가장 한국적인 남자이다. 손동작 발동작 하나하나가 우리 장단과 춤사위를 담고 있다. 엄마 뱃속에 잉태됐을 때부터 우리 장단과 춤을 배운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천부적 재능을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경남 고성에서 상여 소리꾼 아버지 고성일로부터 장구와 소리를 배우며 자랐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고성 오광대에 들어가 춤과 장구를 배웠다. 365일 장구를 치고 춤을 추었다. 친구들과 녹음테이프가 스승이었다. 특이 춤이 좋았다. 덧배기 굿거리장단에 몸을 맡기고 문등북춤을 추웠다.
전국청소년탈출경연대회에서도 이 문등북춤으로 개인전 1등을 차지했다. 자연히 공부를 게을리 할 수밖에 없었다. 중앙대학교 무용과에 시험을 치렀으나 떨어졌다. 후기로 수원대 무용과를 지원했으나 역시 낙방이었다. 오기가 발동했다. 장구를 들러 매고 서울예술대학교 무용과를 지원했다. 면접시험 때 장구를 치겠다고 박일규 뮤지컬 교수께 건의했다. ‘춤 출 놈이 춤은 안 추고 장구를 치겠다.’ 했으니 엉뚱한 놈으로 비쳐졌을 것이나, 여백의 싹수가 있다고 보았는지 10:1의 경쟁을 뚫고 합격했다. 대한민국 북 명인 1등이 될 수 있는 길이 닦여진 것이었다.
고석진 북 명인의 이력은 다채롭다. 경남 고성 철성고등학교 졸업, 서울예술대학 무용과 졸업,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한국음악과 졸업,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오광대 전수자, 소리꾼 장사익 음반 바라지, 이춘희 경기민요 사사, 진도씻김굿 박병천류 진도북춤 사사, 중앙대학교 전통예술학부 연희예술 타악과 출강, 서울예술대학교 무용과 출강 등이다. 국악인으로서 이론과 실전을 두루 겸비한 이 시대의 최고의 명인으로 예우하는데 손색없는 경력이다.
요즘 사회적으로 모듬북이 유행이다. 김규형이 일본 북을 모방해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은 1명이 두 개의 작은 북을 친다. 한국은 1명이 5개 정도의 북을, 그것도 큰 북 작은 북을 모아놓고 치는 것으로 재창조했다. 그런데 북 모양새나 타법, 자세 등에서 일본 냄새가 진하게 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고석진에게 ‘모듬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어 보았다.
“법고창신(法古創新)에 맞습니다. 일본 것을 모방해서 만든 것이나, 장단을 우리식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일부 국악인들이 따따, 따따 하는 일본 이분박으로 북을 치고, 북채를 하늘 방향으로 치켜드는 자세를 취하는 등 일본 것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심지어 어느 예술인은 일본 북을 그대로 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북에 우리 장단으로 모듬북을 칩니다. 모듬북-1은 이동안류 올림채 가락, 웃다리 풍물의 칠 채, 경기도당굿의 도살풀이, 휘모리를 칩니다. 모듬북-2는 진양, 중모리, 동해안별신굿의 두나베기와 전라도 좌도풍물가락 짝드름, 경기도당굿의 사방치기, 휘모리로 합니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이 제 예술의 기본철학인 셈입니다.”
강렬한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상이 예술의 전당에 우리의 전통 혼을 불어 넣고 있었다. 온통 서양풍뿐인 예술의 전당에 그의 법고창신(法古創新) 정신이 꿋꿋하게 투영되고 있었다. 인터뷰 전부터 메슥거리던 속이 그의 말을 들으면서 개운해 지기 시작했다. 북은 어느 나라에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호흡으로 우리의 장단을 재창조하는 그를 보면서 문화강국의 대운이 성큼 당겨져 옴을 느낄 수 있었다.
인터뷰 자리를 두부 집으로 옮겼다. 칼칼한 두부전골이 끓었다. 그가 젓가락을 들었다. 끓고 있는 냄비를 두들겼다. 밥뚜껑을 때렸다. 밥상을 투 둑 투 둑 쳤다. 어깨가 들썩이며 신명이 굴렀다.
“보고 들으신 바와 같이 모든 사물의 소리가 타악 입니다. 생활 자체가 음악인 것 입니다. 생활을 즐기는 것이 음악을 즐기는 것이고, 음악을 즐기는 것이 생활을 즐기는 것 입니다. 즉 인생 자체가 즐거운 것이지요.
모든 것은 변합니다. 그런데 국악인의 사고는 변하지 않습니다. 이제 국악도 변해야 합니다. 다른 나라의 음악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없는지 따져보며 법고창신(法古創新)해야 합니다.
김홍도의 씨름판 그림을 보면 엿장수가 엿가위를 들고 철컥거리며 장단을 칩니다. 여기에 착안하여 엿가위 장단을 만들었습니다. 곧 이 엿가위 장단이 새롭게 공개될 것인데 민속도구를 이용한 훌륭한 음악일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엿가위 장단이지만 전통을 전통의 방식으로 깨부술 때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전통이 만들어짐을 보여 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생맥주 집으로 또 한 번 자리를 옮겼다. 함께 시원한 맥주를 뱃속에 쏟아 부었다. 속이 얼얼했다. 고석진류(?) 북소리가 얼얼한 속을 뜨겁게 만들어 주었다. 희망이 북소리, 도전의 북소리, 창조의 북소리가 밤하늘로 끝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변상문 전통문화연구소장 (02-794-8838, sm2909@hanmail.net)